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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계 서강학파 주역 차하순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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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5-12-24 16:46 조회22,25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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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트러짐 없는 꼿꼿함, 르네상스 휴머니스트의 따뜻함
차하순 명예교수


대한민국학술원 3층 도서실의 문을 열고 들어서자 창문 밖을 내다보는 노스승의 뒷모습이 눈에 밟혔다. 한 치의 흐트러짐도 용납하지 않는 꼿꼿한 등. 필자가 기억하는 바로 그 등이다. 학창시절의 한 페이지가 펼쳐졌다. 1994년 그이는 정년퇴임을 앞두고 ‘프랑스혁명과 나폴레옹시대사’를 강의했다. 군복무를 마치고 돌아온 어리바리한 복학생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긴 수업이었다. 꼬장꼬장한 출석체크와 엄숙한 수업분위기, 그리고 기말성적표에 박힌 C학점….

차하순 명예교수를 만났다. 만나고 싶었다. 선생은 사학과의 전설이다. 재직할 당시 이기백, 전해종, 길현모 교수 등과 함께 역사학계에서 ‘서강학파’의 전성기를 열었다. 공부는 지지리도 안 했지만 한 때의 역사학도로서 선생과 일대일로 대면한다는 건 꿈같은 일이다. 같은 이유로 어려운 마음도 없지 않았다. 무려 차하순 교수가 아닌가. 20여 년 전에 받은 C학점 이야기를 꺼낸 건 그래서다.

“그때 저한테 왜 그러셨어요?”

사사로운 화제로 편안한 자리를 만들려 했을 뿐, 절대 뒤끝은 아니었다. 제자의 장난스러운 질문에 차 교수는 너털웃음을 지었다.

“나도 대학 때 이병도 선생 강의를 들었는데 C나 D를 받았어요. 그래도 사석에서 만나면 날 많이 위해 주셨고, 결혼할 때는 주례도 서주셨지요.”

올해로 86세에 접어든 스승은 당신의 학창시절을 떠올렸다. 차 교수는 처음부터 역사학자가 될 마음은 없었다고 한다. 이과인 원자물리학을 전공하려다가 중국의 과학기술이 서양에 뒤떨어진 이유가 궁금해 서울대학교 사학과에 들어갔다는 것이다. 하지만 정작 그를 학문의 세계로 안내한 것은 교내 서양사연구실이었다. 조교가 된 선생은 한겨울에 난방도 안 되는 연구실을 지키며 남대문시장에서 사온 파카를 뒤집어쓰고 서양사를 파고들었다.

차하순 교수가 서강대학교와 인연을 맺은 것은 개교한 그 해인 1960년이었다. 당시 서강대는 6개 학과로 문을 열었는데 영어영문학과, 철학과, 수학과, 물리학과, 경제학과와 함께 사학과도 포함돼 있었다.

“내가 신수동 근처에 살았는데 건물 짓는 걸 봤어요. 다른 대학에서 전임을 하다가 서강대학교로 옮겨 시간강사부터 다시 시작했죠. 시간강사도 서강대는 힘들었어요. 강의는 물론 학생지도까지 맡겼거든요. 당시에도 학생들과 상담해보면 출석체크와 FA제도에 대한 스트레스가 상당했습니다. 한국에 없는 새로운 시스템인데다 지금보다 훨씬 엄격했어요. 게다가 퀴즈도 너무 자주 보니까 ‘들들 볶는다’, ‘닦달질 한다’며 불만을 토로했죠. ‘서강고등학교’라는 별명도 그때 생겼어요.”

차 교수는 이듬해 전임이 되면서 서강대학교 사학과에 뿌리를 내렸다. 선생은 이기백, 이광린, 길현모 교수 등 쟁쟁한 역사학자들을 서강대로 영입하는 등 차근차근 ‘서강학파’의 토대를 닦았다. 또 1977년에는 서강대학교 최초의 한국인 교무처장이 되었다.

“그 전까지는 교무처장도 미국인 신부였고, 교수회의도 영어로 진행했어요. 내가 교무처장이 되니까 학생들이 건의를 많이 했죠. 특히 FA제도를 완화해달라는 목소리가 컸어요. 곰곰이 생각한 끝에 지켜나가기로 결정했습니다. 이거 없어지면 서강대학교 특성이 없어지겠다, 싶었거든요. 그랬더니 엉뚱하게 문교부(지금의 교육부)가 반겼어요. 서강대의 출결시스템을 다른 대학에서 참고하도록 했죠. 대학생들의 반정부 시위 때문에 골치 아팠거든요.”

그러나 선생의 이런 행보는 서강대학교 구성원들에게 깐깐하다는 이미지를 심어주기도 했다. 그 이미지는 차 교수가 학교를 떠날 때까지 끈질기게 따라붙었다.

“내가 학생들에게 까다로워 보인 건 절대 양보 안 하는 원칙이 있었기 때문이에요. 공부만큼은 어정쩡하게 하지 말라는 거였죠. 학문은 적당히 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었고요. 하지만 그 외에는 사람의 자유의지를 존중하는 편입니다. 집에서 자식을 키우면서도 진학, 취업, 결혼 다 맡겼어요.”

실제로 선생은 유신을 거쳐 신군부 시절까지 지식인의 현실 참여에 대해 적지 않게 고뇌했다. 1980년에는 ‘지식인 105인 선언’에 이름을 올렸다가 군부에 끌려간 적도 있다.

“학생들이 우리는 데모하고 갇히는데 선생님은 뭐 하는 겁니까, 하고 묻습니다. 고민 안 할 수가 없죠. 그러다가 문필로 세상을 비판한 르네상스 휴머니스트들을 떠올렸습니다. 지식인이 할 일은 사회평론이라고 판단했어요. 신문과 잡지에 시국 관련 글을 기고하고 그것을 묶어 책으로 펴냈죠(<역사와 지성> 등).”

차하순 명예교수는 한국에 ‘형평(equity)’ 개념을 도입한 학자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선생의 형평이론은 아리스토텔레스부터 17~18세기 서양근대사상까지 연구하여 고전적 평등이론의 문제점을 수정한 것이다. 사람은 본질적으로 평등하지만 요건에 따라 평등하지 않은 대우를 받을 수 있다는 게 골자다. 이 이론은 그의 박사논문 주제에서 출발했는데, 1983년 국내에서 펴낸 저서 <형평의 연구>로 대한민국학술원상을 수상하기도 했다(1986년). 차 교수는 형평사회를 자유민주주의와 공산주의를 뛰어넘는 이데올로기로 상정한다.


<차하순 명예교수의 저서 '서양사총론' 1990년판 표지>

역사학 분야에서 선생이 쌓은 업적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그런데 차 교수가 수십 년 간 애지중지해 온 보물은 따로 있다. 바로 차하순 하면 떠오르는 책, 서양사개설서의 ‘바이블’, <서양사총론>이다. 필자가 가방에서 대학시절 교재로 사용했던 1990년판을 꺼내자 선생은 감회어린 눈빛으로 책을 한참 들여다보았다 .

“얼마 전 모임에서 정운찬 전 총리와 만났는데, 학교에 있을 때 <서양사총론>을 자주 읽었다고 하더군요. 역사학 분야 바깥의 사람들을 만나면 대개 이 책을 화제로 삼습니다.”

차하순 교수는 1950년대부터 서양문화사, 서양사개설 수업을 다니면서 이 책을 구상했다고 한다. 역사학을 전공하지 않아도 편하게 읽을 수 있도록 하자는게 포인트였다. 1976년 초판을 선보인 <서양사총론>은 지속적으로 개정판을 내다가 2000년 두 권으로 분권했다. 교수와 학생들의 수정보완 의견을 오랜 세월 반영하다보니 분량이 한 권으로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방대해진 것이다. 선생의 수십 년 강의내공부터 후학들과의 폭넓은 피드백까지 어우러져있으니 가히 ‘살아있는 역사책’이라고 할 만하다.

“역사학의 저변을 넓히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랑케의 과학적인 사관도 좋지만 지금은 대중에게서 멀어진 역사학을 되돌아봐야 해요. 그래서 요즘은 ‘Narrativism’을 강조합니다. 역사는 원래 이야기였어요. 전문적이고 깊이 있는 것은 학문하는 사람들이 하면 돼요. 한편으론 역사를 이야기로 해석해서 많은 사람들에게 호소력을 갖도록 해야지요. 고증에 충실하면서도 이야기 요소가 있으면 누구나 재미있게 읽을 수 있습니다.”

선생은 1994년 정년퇴임한 이래 지금까지 20여 년 동안 시간이 남아돈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 고령인 차 교수는 최근까지도 국제역사학위원회와 한일역사가회의의 위원을 맡아 주제공모를 주관하고 국제회의를 추진했다. 올해는 중국에서 열린 국제역사학위원회 세미나에 참석해 역사학에 있어 감정과 디지털화의 이슈에 대해 식견을 넓히고 왔다. 그는 무엇보다 세계를 하나로 보는 역사관을 갖는 게 중요하다고 믿는다. 그런 측면에서 근래 논란이 되고 있는 역사교과서 국정화 문제에 대해 비판적 입장에 서있다.

“역사교과서 국정화라는 것은 역사를 하나의 관점으로 보자는 이야기인데, 다른 나라에 가서 말 꺼내기도 창피한 일이에요. 교육이 애국심을 키워야하는 것은 맞지만 거기에만 초점을 맞추면 편협해집니다. 1970년대에 박정희 정권이 ‘국적 있는 교육’을 외쳤었죠. 나는 ‘국사’라는 용어 자체가 잘못됐다고 생각해요. 전체 역사교육 속에서 한국사를 봐야 하고, 세계사 속에서 한국사를 파악해야 해요. 하지만 우리나라의 역사교육은 대단히 정치화되어 있습니다. 정치하는 사람들이 그런 방향으로 몰고 가니까요. 역사적 사실은 보는 사람에 따라 달리보이기도 하지만 팩트 자체의 객관성도 엄연히 존재합니다. E. H. 카는 사회주의자였지만 역사서술에 있어서는 이 원칙을 견지하고 흔들리지 않았어요. 팩트 자체를 무시하는 역사가는 있을 수 없습니다.”

차하순 명예교수는 2002년부터 학자로서 최고의 영예인 대한민국학술원 회원이 되었다. 그동안 학계의 원로라고 대접받기보다 역사학의 외연을 키우기 위해 동분서주해온 그이다. 그러나 앞으로는 좀 한가해질 듯싶다고 한다.

“이 나이에 계획이랄 게 있나요? 아직 나이에 비해 건강한 편이니까 기력이 다할 때까지 강연은 다닐 겁니다. 인생에 최선을 다하고 싶으니까요. 그리고 웰다잉(well-dying)을 준비해야겠지요. 내 마음대로 되는 것은 아니겠지만…. (웃음)”

역사학은 이미 그이의 삶에 은은한 향기로 배어든 것 같았다. 그런 노스승에게 서강의 추억은 특별한 선물이라고 한다.

“서강대는 내 평생 가장 좋은 시간을 허락해준 곳입니다. 사학과 교수로 재직하면서 다른 대학들이 부러워하는 ‘역사학계 서강학파’를 일굴 수 있었고, 부총장 시절에는 쌍용그룹 김석원 동문을 만나 이냐시오관 건립 기부를 성사시키기도 했어요. 내가 열심히 일하고 결실을 거둘 기회를 준 학교에 늘 고마운 마음이었어요. 마침 동문회에서 인터뷰하러 온다니까 지면을 통해서라도 서강식구들을 만날 수 있겠구나, 싶어 반가웠습니다. 덕분에 오랜만에 서강이야기를 주거니 받거니 했네요. 서강동문들에게 좋은 기억으로 남았으면 합니다.”

차하순 명예교수는 그렇게 작별인사를 남기고 뒤돌아섰다. 아련히 멀어지는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번에는 르네상스 휴머니스트의 따뜻하고 인간미 넘치는 등이다. 후학들과 다음 세대는 그 거대한 등을 바라보며 저마다 세상 속으로 뚜벅뚜벅 걸어갈 것이다.

권경률(90 사학) 서강옛집 편집위원


<차하순 명예교수(왼쪽)과 권경률 서강옛집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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