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동문 특집-문영주 화요가족 총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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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5-10-01 10:08 조회17,668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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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 최고의 멘토를 만나게 해준 서강이 제 마음의 모교”
문영주 (이화여대 76 심리) 화요가족 총무
문영주씨는 서강 졸업생이 아니다. 그럼에도 30년이 넘는 세월동안 서강동문들이 주축이 된 모임의 총무를 맡고 있고 앞으로도 이 사실은 변할지 않을 듯하다. 회원 가운데 그녀처럼 오랫동안 총무를 맡은 동문이 없을뿐더러 다른 회원이 총무를 맡는 일을 생각해본 적도 없는 것 같다. 부동(不動)의 총무 문영주씨는 어쩌다 서강가족 모임의 총무가 되었으며, 그 자리를 30년 넘게 유지하는 비결이 무엇일까.
화요가족에 대해 소개해주세요.
매주 화요일 저녁 故베이즐 프라이스 신부님과 함께 했던 모임 이름입니다. 프라이스 신부님은 서강 설립자 중 한 분이고 30년 넘게 사학과 교수로서 학생들을 가르치셨으며 노동자 권익을 보호하고자 산업문제연구소를 설립하고 운영하신 분이죠. 이 모임은 1976년 9월 10일 당시 복학생이었던 정훈(70 신방) 동문과 프라이스 신부님과의 만남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이후 매주 화요일 저녁에 정기적으로 모이면서 ‘화요가족(火曜家族)’이라 불렀고, 줄여서 편하게 ‘화가(火家)’라 부르기도 하죠.
화요가족은 신부님과 영어공부도 하고 세상 이야기도 하면서 친목을 다지고 서로의 경조사와 안부를 챙기다보니 회원들의 드나듦은 있었지만 40년 가까이 이어져오고 있습니다. 2004년 신부님 선종하신 후론 예전의 화요일 모임은 끊어졌지만 매년 6월 신부님 생신과 9월 신부님 기일에 맞춰 함께 성묘도 하고 신부님 추억하는 시간을 갖고 있습니다. 몇 년 전부터는 정월에 예수회 원로 신부님들께서 거주하고 계신 평창동 성이냐시오집에 가족 동반으로 방문하며 신부님들과 함께 식사하고 건강을 챙기며 프라이스 신부님의 정신을 되새기고 있습니다.
어떤 계기로 화요가족 회원이 되었고 또 총무를 맡게 되었는지요?
대학 다닐 때부터 영어공부에 관심이 많았는데 EBS 입사 후 서강동문이자 직장 선배였던 故박준용(68 신방)씨가 사내 영어공부 모임을 이끌고 있었기에 저도 가입해서 함께 공부했습니다. 그곳에서 정훈 선배님을 만났고, 선배님 권유로 1984년 발렌타인 데이에 처음 화가모임에 나갔어요. 평소 부럽게 여기던 서강의 글로벌 정신과 간략히 전해들은 프라이스 신부님의 신실함이 제게 화가모임에 대한 관심을 갖게 했습니다.
나중에 알았지만 신부님께서 화가 회원자격으로 세 가지 조건을 제시하셨다고 해요. 서강동문일 것, 부자가 아닐 것, 영어를 잘하지 못할 것. 저는 서강동문이 아니었으니 자격미달이었던 셈이지요. 나중에 알고 보니 회원 중에 서강동문이 아닌 회원이 여러분 더 계시더군요.
모임은 저녁 7시부터인데 대부분 직장인들이라 퇴근해서 제 시간에 도착하는 회원이 드물었어요. 저는 6시 퇴근버스를 타면 7시까지 충분히 도착할 수 있었죠. 신부님은 어김없이 7시에 저희를 기다리고 계셨고, 아무도 오지 않은 그 시간만큼은 신부님을 독차지할 수 있었기에 행복한 시간이었습니다. 먼저 도착한 제가 저녁간식으로 토스트나 음료를 준비했고, 모임에 빠지는 회원에게 전화도 걸고, 회비도 걷는 등 소소한 것들을 챙기다보니 자연스레 총무가 되었어요. 다른 회원들이 미안해하기도 하지만 30년 내내 총무 역할을 혼자만 해온 것도 아니고, 규모가 작은 모임이다보니 총무가 하는 일이 많지도 않아 크게 힘들 건 없었어요.
회원 대부분이 서강동문이고 모임 장소도 서강 캠퍼스여서 불편하지는 않았는지요?
서강 출신도 아니었지만 가톨릭 신자도 아니었습니다.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사랑을 주시는 신부님이 계셨고 화가 서강동문들도 저를 자연스럽게 후배로, 선배로 대해주었기 때문에 타교 출신이라는 거리감은 전혀 느끼지 못했어요. 다만 학창시절 교수님들 이야기나 학교 시설 등에 대해 이야기 할 때 공유하지 못한 경험이다 보니 조금 소외감도 느끼고 부럽기도 했어요. 아직까지요.
신부님께서는 20년 동안 만나면서 한 번도 종교를 강요하신 적이 없었답니다. 다만 루카복음으로 공부를 한 적이 있어요. 신부님께서 복음 중에 가장 문학적이라며 추천하신 덕분이죠. 루카복음 끝내는데 3년이 걸렸는데 그때 성경 구절과 관련 내용에 대해 무척 열정적으로 말씀하시던 모습이 생생하게 기억나요. 국적과 종교를 초월하여 성실, 신의, 감사를 가르치고자 하셨던 신부님의 교육정신이 깃든 시간이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저는 신부님과 만난 지 20년만인 지난 2004년 12월에 영세를 받았어요. 신부님께서 말없이 20년을 기다려주신 셈이죠. 세례명 ‘헬레나’는 병상의 신부님께서 지어주셨는데 결국 신부님 돌아가시고 세례를 받았어요. 기쁜 날인데 무척 슬펐습니다.
동문회비도 납부하고 서강옛집 애독자이자 동문회 행사에도 참석하고 계십니다. 서강 동문이라는 생각이 드실 것 같습니다.
서강은 20년 동안 매주 한 번씩 왔던 곳이고 신부님께서 안 계시는 지금도 매해 몇 번씩은 들르면서 30년 세월을 오간 곳이지요. 특히 프라이스 신부님 흉상이 있는 로욜라 동산은 제게 가장 친근하고 평안한 장소가 되었어요. 화요가족들과 함께 학교 행사나 동문회 행사에 많이 참석한데다 동문회에서 서강옛집도 빼놓지 않고 보내주시니 서강이 마치 제 모교인양 자연스럽고 친숙합니다. 솔직히 제 실제 모교 실정은 잘 몰라요. 서강 현안이나 상황에 대해서는 웬만한 서강 졸업생들보다 많이 알고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인기인이나 유명인도 아니고 서강 동문도 아닌 저를 동문처럼 인터뷰까지 해주시니 이런 게 바로 서강스러운 거라 싶으면서도 송구스럽기도 하고 감사하기도 합니다.
화요가족 회원들이 ‘문영주 총무는 진정한 서강인’이라고 표현합니다. 33년 넘게 한 직장에서 한 우물만파셨습니다.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고 서강의 교육 이념인 ‘남을 위한 삶’을 실천하는 이화여대 출신 서강인입니다.
첫 직장이자 유일한 직장이었던 EBS에서 33년 2개월을 근무하고 지난 6월 말 정년퇴직 했습니다. 옆에서 격려해주고 도와주신 선후배 동료들 덕분이죠. 특히 방송국 특성상 소신과 보람을 가지고 일할 수 있었기에 끝까지 완주할 수 있었다고 봅니다. 저는 이화여대 학부와 대학원에서 발달심리를 전공했어요. 석사를 마치고 1982년 4월에 입사해 유아프로그램 담당 연구원으로 일을 시작했죠(박사학위는 1996년 취득). 18년간 연구원으로 일하다 EBS가 공사가 되면서 라디오 프로듀서를 지망했어요. 마흔이 넘어 뛰어든 새로운 분야의 일이라 처음에 많이 힘들기도 했지만 비교적 적성에 잘 맞아 재미있게 방송을 제작했습니다. 덕분에 PD입문 1년 만인 2001년 <영어동화, I Love Stories> 프로그램으로 ABU(Asia Pacific Broadcasting Union, 아시아태평양 방송연맹)가 주관하는 ‘라디오 어린이 부문 대상’을 수상했어요. 이는 EBS의 첫 ABU 대상 수상이자 EBS 역사상 첫 국제상 수상이라 방송국 차원에서도, 개인적으로도 큰 의미가 있는 상입니다.
새로운 일을 시작할 수 있었던 용기, 한 길을 꾸준히 걸어올 수 있었던 일관성, 소신껏 일할 수 있었던 신념 모두, 화요가족과 오랫동안 함께 한 시간들이 만들어준 선물입니다. 물론 그 중심엔 언제나 말없이 큰 가르침을 주신 프라이스 신부님이 계셨지요. 신부님은 제 인생 최고의 멘토였고 최고의 스승이셨습니다. 그런 분을 만났고 그 분과 함께 했던 서강이 제겐 당연히 마음 속 모교지요.
서강 후배에게 한마디 부탁드립니다.
프라이스 신부님은 자신에게 무서우리만치 철저하셨고 내핍을 생활화하셨습니다. 프라이스 신부님과 함께 했던 ‘화요가족’ 모임은 작고 소박했지만 늘 그분의 큰 정신을 본받으려 노력했습니다. 서강 후배들이(이 대목에서 문영주씨는 이 호칭이 너무나 자연스럽게 나온다며 살짝 민망해했다) 일생동안 서강을 위해 살다 가신 프라이스 신부님 같은 분들의 국적과 종교를 초월한 인간사랑과 서강사랑을 오래오래 기억하고 발전적인 변화와 더불어 그 정신을 잘 이어가기 바랍니다. ‘그대 서강의 자랑이듯 서강 그대의 자랑이어라’ 제가 정말 부러워하는 멋진 슬로건입니다.
문영주 (이화여대 76 심리) 화요가족 총무
문영주씨는 서강 졸업생이 아니다. 그럼에도 30년이 넘는 세월동안 서강동문들이 주축이 된 모임의 총무를 맡고 있고 앞으로도 이 사실은 변할지 않을 듯하다. 회원 가운데 그녀처럼 오랫동안 총무를 맡은 동문이 없을뿐더러 다른 회원이 총무를 맡는 일을 생각해본 적도 없는 것 같다. 부동(不動)의 총무 문영주씨는 어쩌다 서강가족 모임의 총무가 되었으며, 그 자리를 30년 넘게 유지하는 비결이 무엇일까.
화요가족에 대해 소개해주세요.
매주 화요일 저녁 故베이즐 프라이스 신부님과 함께 했던 모임 이름입니다. 프라이스 신부님은 서강 설립자 중 한 분이고 30년 넘게 사학과 교수로서 학생들을 가르치셨으며 노동자 권익을 보호하고자 산업문제연구소를 설립하고 운영하신 분이죠. 이 모임은 1976년 9월 10일 당시 복학생이었던 정훈(70 신방) 동문과 프라이스 신부님과의 만남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이후 매주 화요일 저녁에 정기적으로 모이면서 ‘화요가족(火曜家族)’이라 불렀고, 줄여서 편하게 ‘화가(火家)’라 부르기도 하죠.
화요가족은 신부님과 영어공부도 하고 세상 이야기도 하면서 친목을 다지고 서로의 경조사와 안부를 챙기다보니 회원들의 드나듦은 있었지만 40년 가까이 이어져오고 있습니다. 2004년 신부님 선종하신 후론 예전의 화요일 모임은 끊어졌지만 매년 6월 신부님 생신과 9월 신부님 기일에 맞춰 함께 성묘도 하고 신부님 추억하는 시간을 갖고 있습니다. 몇 년 전부터는 정월에 예수회 원로 신부님들께서 거주하고 계신 평창동 성이냐시오집에 가족 동반으로 방문하며 신부님들과 함께 식사하고 건강을 챙기며 프라이스 신부님의 정신을 되새기고 있습니다.
어떤 계기로 화요가족 회원이 되었고 또 총무를 맡게 되었는지요?
대학 다닐 때부터 영어공부에 관심이 많았는데 EBS 입사 후 서강동문이자 직장 선배였던 故박준용(68 신방)씨가 사내 영어공부 모임을 이끌고 있었기에 저도 가입해서 함께 공부했습니다. 그곳에서 정훈 선배님을 만났고, 선배님 권유로 1984년 발렌타인 데이에 처음 화가모임에 나갔어요. 평소 부럽게 여기던 서강의 글로벌 정신과 간략히 전해들은 프라이스 신부님의 신실함이 제게 화가모임에 대한 관심을 갖게 했습니다.
나중에 알았지만 신부님께서 화가 회원자격으로 세 가지 조건을 제시하셨다고 해요. 서강동문일 것, 부자가 아닐 것, 영어를 잘하지 못할 것. 저는 서강동문이 아니었으니 자격미달이었던 셈이지요. 나중에 알고 보니 회원 중에 서강동문이 아닌 회원이 여러분 더 계시더군요.
모임은 저녁 7시부터인데 대부분 직장인들이라 퇴근해서 제 시간에 도착하는 회원이 드물었어요. 저는 6시 퇴근버스를 타면 7시까지 충분히 도착할 수 있었죠. 신부님은 어김없이 7시에 저희를 기다리고 계셨고, 아무도 오지 않은 그 시간만큼은 신부님을 독차지할 수 있었기에 행복한 시간이었습니다. 먼저 도착한 제가 저녁간식으로 토스트나 음료를 준비했고, 모임에 빠지는 회원에게 전화도 걸고, 회비도 걷는 등 소소한 것들을 챙기다보니 자연스레 총무가 되었어요. 다른 회원들이 미안해하기도 하지만 30년 내내 총무 역할을 혼자만 해온 것도 아니고, 규모가 작은 모임이다보니 총무가 하는 일이 많지도 않아 크게 힘들 건 없었어요.
회원 대부분이 서강동문이고 모임 장소도 서강 캠퍼스여서 불편하지는 않았는지요?
서강 출신도 아니었지만 가톨릭 신자도 아니었습니다.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사랑을 주시는 신부님이 계셨고 화가 서강동문들도 저를 자연스럽게 후배로, 선배로 대해주었기 때문에 타교 출신이라는 거리감은 전혀 느끼지 못했어요. 다만 학창시절 교수님들 이야기나 학교 시설 등에 대해 이야기 할 때 공유하지 못한 경험이다 보니 조금 소외감도 느끼고 부럽기도 했어요. 아직까지요.
신부님께서는 20년 동안 만나면서 한 번도 종교를 강요하신 적이 없었답니다. 다만 루카복음으로 공부를 한 적이 있어요. 신부님께서 복음 중에 가장 문학적이라며 추천하신 덕분이죠. 루카복음 끝내는데 3년이 걸렸는데 그때 성경 구절과 관련 내용에 대해 무척 열정적으로 말씀하시던 모습이 생생하게 기억나요. 국적과 종교를 초월하여 성실, 신의, 감사를 가르치고자 하셨던 신부님의 교육정신이 깃든 시간이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저는 신부님과 만난 지 20년만인 지난 2004년 12월에 영세를 받았어요. 신부님께서 말없이 20년을 기다려주신 셈이죠. 세례명 ‘헬레나’는 병상의 신부님께서 지어주셨는데 결국 신부님 돌아가시고 세례를 받았어요. 기쁜 날인데 무척 슬펐습니다.
동문회비도 납부하고 서강옛집 애독자이자 동문회 행사에도 참석하고 계십니다. 서강 동문이라는 생각이 드실 것 같습니다.
서강은 20년 동안 매주 한 번씩 왔던 곳이고 신부님께서 안 계시는 지금도 매해 몇 번씩은 들르면서 30년 세월을 오간 곳이지요. 특히 프라이스 신부님 흉상이 있는 로욜라 동산은 제게 가장 친근하고 평안한 장소가 되었어요. 화요가족들과 함께 학교 행사나 동문회 행사에 많이 참석한데다 동문회에서 서강옛집도 빼놓지 않고 보내주시니 서강이 마치 제 모교인양 자연스럽고 친숙합니다. 솔직히 제 실제 모교 실정은 잘 몰라요. 서강 현안이나 상황에 대해서는 웬만한 서강 졸업생들보다 많이 알고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인기인이나 유명인도 아니고 서강 동문도 아닌 저를 동문처럼 인터뷰까지 해주시니 이런 게 바로 서강스러운 거라 싶으면서도 송구스럽기도 하고 감사하기도 합니다.
화요가족 회원들이 ‘문영주 총무는 진정한 서강인’이라고 표현합니다. 33년 넘게 한 직장에서 한 우물만파셨습니다.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고 서강의 교육 이념인 ‘남을 위한 삶’을 실천하는 이화여대 출신 서강인입니다.
첫 직장이자 유일한 직장이었던 EBS에서 33년 2개월을 근무하고 지난 6월 말 정년퇴직 했습니다. 옆에서 격려해주고 도와주신 선후배 동료들 덕분이죠. 특히 방송국 특성상 소신과 보람을 가지고 일할 수 있었기에 끝까지 완주할 수 있었다고 봅니다. 저는 이화여대 학부와 대학원에서 발달심리를 전공했어요. 석사를 마치고 1982년 4월에 입사해 유아프로그램 담당 연구원으로 일을 시작했죠(박사학위는 1996년 취득). 18년간 연구원으로 일하다 EBS가 공사가 되면서 라디오 프로듀서를 지망했어요. 마흔이 넘어 뛰어든 새로운 분야의 일이라 처음에 많이 힘들기도 했지만 비교적 적성에 잘 맞아 재미있게 방송을 제작했습니다. 덕분에 PD입문 1년 만인 2001년 <영어동화, I Love Stories> 프로그램으로 ABU(Asia Pacific Broadcasting Union, 아시아태평양 방송연맹)가 주관하는 ‘라디오 어린이 부문 대상’을 수상했어요. 이는 EBS의 첫 ABU 대상 수상이자 EBS 역사상 첫 국제상 수상이라 방송국 차원에서도, 개인적으로도 큰 의미가 있는 상입니다.
새로운 일을 시작할 수 있었던 용기, 한 길을 꾸준히 걸어올 수 있었던 일관성, 소신껏 일할 수 있었던 신념 모두, 화요가족과 오랫동안 함께 한 시간들이 만들어준 선물입니다. 물론 그 중심엔 언제나 말없이 큰 가르침을 주신 프라이스 신부님이 계셨지요. 신부님은 제 인생 최고의 멘토였고 최고의 스승이셨습니다. 그런 분을 만났고 그 분과 함께 했던 서강이 제겐 당연히 마음 속 모교지요.
서강 후배에게 한마디 부탁드립니다.
프라이스 신부님은 자신에게 무서우리만치 철저하셨고 내핍을 생활화하셨습니다. 프라이스 신부님과 함께 했던 ‘화요가족’ 모임은 작고 소박했지만 늘 그분의 큰 정신을 본받으려 노력했습니다. 서강 후배들이(이 대목에서 문영주씨는 이 호칭이 너무나 자연스럽게 나온다며 살짝 민망해했다) 일생동안 서강을 위해 살다 가신 프라이스 신부님 같은 분들의 국적과 종교를 초월한 인간사랑과 서강사랑을 오래오래 기억하고 발전적인 변화와 더불어 그 정신을 잘 이어가기 바랍니다. ‘그대 서강의 자랑이듯 서강 그대의 자랑이어라’ 제가 정말 부러워하는 멋진 슬로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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