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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경률의 차트로 읽는 한국사 (3) >> 외국어 열풍, ‘영컴’의 추억과 ‘닥공’ 외국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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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20-09-21 15:30 조회33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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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컴’의 추억과 ‘닥공’ 외국어


 

1990년대엔 서강대학교 하면 떠오르는 별난 이미지들이 있었다. 수업 종, 독후감, 지정 좌석제, 출석 체크, FA 등 남다른 학사관리로 밖에서 ‘서강고등학교’라는 놀림을 받던 때였다. 물론 야무지고 똘똘하게 공부시킨다며 좋게 보는 시선들이 더 많았다.

서강대 학생들은 영어를 잘한다는 이미지도 있었다. 미국 신부님들이 세운 학교였기 때문일까? 실제로 교양 과목인 ‘영컴’, 곧 영어 커뮤니케이션 수업은 정평이 나 있었다. 회화와 작문 위주였는데 버벅거리면서도 편안하게 수업에 참여했던 기억이 난다. 입시와 토익 중심의 ‘벙어리 영어’가 아니었다. 영어가 서툴러도 외국인과 말 섞는 분위기였다. (까칠한 전공 수업보다 학점이 잘 나와서 호감으로 기억하는지도 모르겠다. 인간은 기억하고 싶은 대로 기억하니까.)

그때나 지금이나 이 나라는 영어 열풍이 뜨겁다. 요즘은 유치원부터 영어가 대세다. 진학이든, 취직이든, 승진이든 영어를 못하면 타격이 크다. SNS, 포털사이트, TV에 온통 영어학습 광고가 도배되는 이유다. 너도 할 수 있다며 지갑을 열란다. 이 영어 열풍은 대체 언제부터 불기 시작했을까? 영어가 들어오기 전에는 어떤 외국어를 배웠을까? 옛 사람들은 어학 공부를 얼마나 열심히 했을까? ‘닥공’, 닥치고 공부한 외국어 순위를 한국사에서 뽑아봤다.

 

 

 

 

[3위] 마누라와 설렁탕에 소주잔 기울이는 몽골스타일 

3위는 고려에 정착한 몽골어다. 몽골 침략에 맞서 강화도에서 농성한 고려는 13세기 후반부터 100여 년간 원나라 간섭기에 접어든다. 당시 고려왕들은 원나라 왕녀와 결혼했으며 죽고 나서는 ‘충(忠)’자 시호를 썼다. 원나라의 사위국으로서 황제에게 충성한다는 뜻이었다. 고려 왕실에 칭기즈칸의 피가 섞이면서 자연스레 몽골어가 궁중 언어로 사용되었다.

궁중 몽골어는 차츰 민간으로 흘러나갔다. 왕비를 높여 부르는 ‘마누라’, 임금의 음식을 가리키는 ‘수라’ 등이 궁중에서 퍼져나간 몽골어다. 갓 태어난 영아를 의미하는 ‘아기’, 미혼의 처녀를 일컫는 ‘아가씨’ 등도 몽골어가 민간에 스며든 것이다. 벼슬아치, 장사치, 갖바치 등에 붙는 접미어 ‘치’도 직업을 나타내는 몽골어 끝 글자에서 유래했다.

언어에는 문화가 탑재되어 있다. 몽골어와 함께 풍습도 퍼져나갔다. 한국 풍습으로 알려진 것 중에는 몽골의 영향을 받은 게 꽤 많다. 신부가 족두리를 쓰고 연지 곤지를 찍는 전통혼례를 보자. 족두리는 몽골 여자들이 쓰는 외출용 모자였는데, 고려에서는 혼례용 모자로 사용되었다. 이마와 양쪽 볼에 빨갛게 연지 곤지를 찍는 것도 원래 나쁜 귀신을 쫓는 몽골 풍습이었다. 몽골 음식도 빼놓을 수 없다. 한국인이 즐기는 설렁탕과 소주, 그리고 호떡이 원나라에서 건너왔다.

사실 고려 시대 몽골어는 대국의 언어이긴 했으나 널리 공부하고 익히지는 않았다. 물론 충렬왕이 통문관을 설치하고 몽골어 역관을 뒀지만 어디까지나 정치외교 분야에 한해 쓰임이 있었다. 원나라 간섭기에 흘러들어온 몽골어는 오히려 문화교류의 성격이 강했다. 마누라와 설렁탕에 소주 한 잔 기울이는 밤! 생각만 해도 정겹지 않은가. 오늘날 한국인의 삶에 뿌리내린 ‘몽골스타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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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 공민왕과 원나라 공주 초상

 

 

 

[2위] 중국어 역관, 고되지만 부자 되는 동시통역의 길

2위는 조선 역관들의 고된 중국어 공부다. 한국사에서 중국어 학습은 유서가 깊다. 삼국시대부터 중국에 유학생을 보내 습득하게 했다. 신라는 6두품들이 대거 유학했는데 당나라의 외국인 대상 과거시험인 빈공과에서 최다 합격자 배출국이 되기도 했다. 고려 시대에 잠시 몽골어가 득세했지만 중국어의 위세는 꺾이지 않고 조선으로 이어졌다.

‘유교국가’ 조선은 명나라에 사대했기에 건국 직후부터 중국의 말과 글에 매달렸다. 처음에는 명나라 황제에게 조선 유학생을 받아달라고 청했다. 하지만 외교 관계 악화로 명나라가 유학생을 받지 않자 1393년 태조 이성계의 명으로 ‘사역원’을 설치했다. 사역원(司譯院)은 국립 외국어 교육기관으로 지금의 동시통역사 격인 역관을 양성했다. 이곳에서는 일본어, 몽골어, 만주어도 가르쳤지만 뭐니 뭐니 해도 중국어를 으뜸으로 쳤다.

그럼 조선에서 중국어 역관이 되려면 어떻게 했을까? 1차 관문은 물론 사역원 입학이었다. 역관 지망생은 중인 집안에서 많이 나왔다. 입학시험은 현직 역관의 추천을 받아 응시했는데, 15명의 심사위원 중 13명 이상 찬성해야 합격이었다. 입학 연령은 대개 10대였으나 어떤 천재는 5살에 들어가기도 했다.

사역원 학생들은 기숙사 생활을 하면서 밤낮으로 공부하고 매달 시험을 치렀다. 교과목은 일상생활, 비즈니스, 외교 등 실용회화 위주였는데 중국 관리들을 상대하기 위해 역사, 경전, 한시도 곁들였다. 중국어 학습교재로는 <노걸대>가 유명했다. 이 책은 세 명의 상인이 중국에서 겪는 다양한 상황을 이야기로 풀어나간 어학 교재였다. 사역원 안에서는 수업뿐 아니라 대화까지 가급적 외국어를 사용했다. 이렇게 최소 3년 이상 고된 수련기간을 거쳐야 역관을 뽑는 과거시험인 역과를 볼 수 있었다. 중국어 역관의 합격정원은 13명, 그것도 기준에 못 미치면 줄였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조선 시대 중국어 역관들은 실력이 뛰어났다. 그들은 북경과 한양을 오가면서 한중관계에 크게 기여했다. 임진왜란을 맞아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명나라 지원군의 파병을 성사시킨 것도, 숙종 때 백두산 정계비를 세워 청나라와의 국경을 확정 지은 것도, 홍순언과 김지남 같은 유능한 역관들이 없었으면 불가능했다.

역관들의 중국 출장길은 비즈니스를 펼칠 기회이기도 했다. 조선 인삼을 중국에 내다 팔고, 중국 비단과 책을 국내로 들여왔다. 일본, 여진과 중개무역까지 벌이면 이문은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장희빈의 당숙 장현은 17세 조선의 거부였다. 그는 중국에서 생사(生絲, 삶지 않은 비단실)를 수입해 부를 쌓아나갔다. 장현의 중개무역 파트너는 사돈 변승업이었다. 변승업은 일본어 역관이었는데 생사를 일본에 수출하고 은을 대금으로 받았다. 일본에서 쏟아져 들어온 막대한 은이 그를 조선 최대의 갑부로 만들었다.

조선 후기로 가면 역관의 위세가 어지간한 양반가를 능가하기에 이른다. 코피 쏟으면서 동시통역 공부 고되게 한 보람이 있었다. 한국인의 중국어 열기는 일제 강점과 중국 공산화로 식었다가 1992년 한중수교와 함께 뜨겁게 되살아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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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정희의 [세한도]를 중국에 알린 역관 이상적

 

 

 

[1위] ‘출세의 자본’ 영어 인플레 시대 개막

1위는 구한말 이 땅에 상륙한 영어 열풍이다. 1797년 부산에 정박한 영국 함선 프로비던스호에서 경상도 관찰사 이형원은 괴상한 글자를 목격했다. 그는 ‘구름이나 산 같은 그림’이라고 임금에게 보고했다. 한국인이 영어를 묘사한 최초의 공식기록이다. 하지만 이 서양말을 배우고 익힌 사람은 그 후로도 오랫동안 거의 없었다.

1882년 조선은 서구열강 가운데 처음으로 미국과 수호통상 조약을 체결했다. 조선인 통역을 구하지 못해 청나라 사람이 대신했다고 한다. 뒤이어 미국에 보빙사라는 사절단을 보낸 조선은 산업시설 등 신문명에 충격을 받고 본격적인 영어교육에 나섰다. 그리하여 1886년 한국 최초의 국립영어학교 육영공원이 설립되었다. 을사오적으로 악명 높은 이완용이 이 학교 1회 졸업생이었다. 그는 원래 친일파가 아니라 친미파였다.

선교사 아펜젤러가 세운 배재학당에서도 영어를 배울 수 있었다. 아펜젤러가 학생들에게 “영어공부를 왜 하느냐”고 물었더니 대부분 “출세하기 위해서”라고 답했다는 얘기가 전해진다. 1894년 배재학당에 입학한 이승만은 이후 미국 유학을 떠나 프린스턴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미국 주류사회 인맥을 쌓았다. 이를 발판으로 그는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이 되었는데 출발점은 배재학당에서부터 갈고닦은 영어 실력이었다.

한편 독립운동가이자 역사가였던 신채호는 독학으로 영어를 습득했다. 한학에 정통했지만 영어도 원서를 막힘없이 읽는 수준이었다. 신채호는 새로운 언어로 근대사상을 깊이 연구하려고 했다. 미국과 러시아에서 외교관으로 활동한 이위종도 1907년 이상설, 이준과 함께 네덜란드 헤이그로 건너가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영어로 알렸다. 이렇게 영어를 배우려는 이유는 제각각이었지만 그 열기는 이념과 입장을 떠나 뜨거웠다.

그런데 일제 강점기에 접어들면서 영어공부가 암초를 만났다. 문법과 독해 위주의 수업, 그리고 일본식 발음이 문제였다. 10년 넘게 영어를 배워도 외국인과 말 한마디 못 섞는 영어 수업, 지금까지도 계속되는 ‘벙어리 영어’가 일제 강점기에 만연하기 시작했다. 그래도 상급학교로 진학하려면 꼭 필요했고, 서구 문명까지 거세게 밀려오면서 영어는 선택이 아니라 필수가 되었다. 일제 강점기 신문 제목처럼 ‘출세의 자본, 영어 인플레 시대’가 이 땅에 도래한 것이다.

지금까지 한국사에서 ‘닥공’ 외국어를 살펴봤다. 중국어, 일본어, 몽골어도 있지만 아무래도 영어만큼 널리 붐을 일으킨 외국어는 없었던 것 같다. 한국에서 영어는 신분 상승의 엘리베이터요, 출세의 문을 여는 열쇠로 자리매김했다. 오늘날 연간 20조 원에 이르는 사교육비 가운데 영어교육의 비중이 무려 3분의 1을 차지한다고 하니 위세가 어마어마하다. 나는 그나마 서강대 ‘영컴’ 실력으로 근근이 버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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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 최초 국립영어학교 육영공원, 한국 국권회복운동을 도운 교사 헐버트

 

 

 

※ 권경률 (사학 90) - 역사 칼럼니스트, 월간중앙 필진. 사람을 읽고 생각하고 쓰면서 역사의 행간을 채워나간다. 유튜브·페이스북·팟캐스트에 ‘역사채널권경률’을 열어 독자들과 소통하고 있다. [시작은 모두 사랑이었다](2019), [조선을 새롭게 하라](2017), [조선을 만든 위험한 말들](2015) 등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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