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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경률의 차트로 읽는 한국사 (5) >> 맛있는 침략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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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20-11-18 14:20 조회6,18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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짜장면, 커피, 소주와의 행복한 만남

 

“좋아하는 사람과 맛있는 음식 먹을 때 가장 행복하다.”

행복이 별 건가? 언젠가 표정훈 선배(철학 88)가 페이스북에 올린 ‘한 줄 비결’이다. 나도 동의한다. 맛있는 음식은 미각의 즐거움만 주는 게 아니다. 사람과 사람이 서로 호감을 표하고 기분 좋게 소통하는 데 음식만 한 촉매제가 또 있을까. 사람들이 굳이 맛집을 찾는 이유가 여기 있다. 누군가와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싶기 때문이다.

돌이켜보면 대학 1학년 때 소개팅에서 퇴짜를 맞은 것은 표 선배의 행복론을 간과한 내 불찰이었다. 교문 앞 커피집 ‘프랑소아즈’에서 비엔나커피 홀짝거리며 말 섞을 때까지는 분위기 좋았다. 그런데 한강공원 가서 하염없이 걷기만 하자 그녀의 표정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배부터 채울 일이었다. 커피와 함께 맛있는 수제비를 팔던 ‘레떼’에서 만날 걸 그랬다.

1990년대 초반 학교 앞에는 가성비 좋은 맛집들이 즐비했다. 입학 기념으로 들러 양장피 시켰다가 겨자 잘못 먹고 눈물을 쏟은 ‘진미’, 값싸고 싱싱한 모듬회를 안주 삼아 코가 삐뚤어지게 소주잔 기울이던 ‘동해횟집’, 조물조물 양념해서 숙성시킨 돼지갈비를 구우며 노상 모임을 가진 ‘노고산숯불갈비’까지…. 세상은 넓고 맛있는 음식은 많다. 그래서 범위를 좁혀 한국인의 식탁을 침략한 외래음식을 뽑아봤다. ‘맛있는 침략자’ 베스트 3를 만나보자.

 

[3위] 추억은 방울방울, 중국집 하면 짜장면!

 

3위는 중국에서 온 추억의 아이콘, 짜장면이다.

짜장면 하면 나는 500원 동전이 떠오른다. 어머니는 초등학생 아들에게 심부름을 시키고 나면 두루미가 날아가는 새 동전을 손에 쥐어주었다. 나는 500원 동전을 들고 나는 듯이 동네 중국집 모모반점에 달려가 짜장면을 시켰다. 짬뽕도 있고 우동도 있지만 기어코 짜장면이었다. 기다리면서 어찌나 입맛을 다시고 군침을 삼켰는지, 안 그래도 맛있는 짜장면이 효소 덕분에 환상의 맛을 자아냈다. 내 입맛을 사로잡은 강렬한 추억이다.

짜장면의 유래는 1880년대 인천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882년 임오군란이 터지자 고종은 청나라에 지원병을 요청했다. 청나라 군대가 조선에 주둔하면서 노동자들도 따라 들어왔다. 인천 부두의 중국인 노동자들은 간편식을 먹으며 일했다. 특히 고기와 야채를 된장으로 볶아 면에 얹어 먹는 음식이 눈길을 끌었다. 중국 산동, 북경, 동북에서 즐겨 먹던 ‘작장면(炸醬麵)’이었다. 중국어 발음이 ‘자쟝미엔(zhájiàngmiàn)’이므로 짜장면의 원조로 보면 된다.

작장면은 딴딴면, 도삭면, 이부면 등과 함께 중국을 대표하는 면이다. 그런데 대체로 끓여 먹는 중국 면과 달리 이건 비벼 먹는다. 사실 작장면은 북방 유목 민족에게서 나왔다. 그들은 벌판에서 말 타고 빨리 이동하기 때문에 간편하게 해 먹는 음식문화가 발달했다. 면도 탕에 끓이는 것보다 비벼서 먹는 걸 선호했다. 작장면은 몽골족과 만주족이 중국 서민층에 퍼뜨린 간편식이었다. 그 비벼 먹는 면이 중국인 노동자들을 따라 조선에 들어온 것이다.

중국 작장면은 인천의 음식점에서 팔리기 시작하며 한국 짜장면으로 바뀌어갔다. 이 땅에서 처음으로 짜장면을 만들어 판 식당은 제물포에 문을 연 ‘공화춘’이었다. 이른바 ‘중국집’의 숫자가 늘어나고 경쟁이 붙으면서 짜장면은 한국인의 입맛에 맞게 거듭났다. 북경의 노란 된장, 동북의 짠 된장보다 산동의 달짝지근한 된장이 인기를 끌었는데, 여기에 캐러멜 등을 넣어 현지화한 결과 한국식 춘장이 탄생했다.

짜장면 특유의 단맛은 일제 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고통에 신음한 한국인의 삶에 한 줄기 위안이 되었다. 산업화 시대와 고도 성장기에는 간편식으로 자리 잡았다. 손쉽게 비벼 먹는 짜장면은 ‘빨리빨리’ 쫓기듯 사는 사람들에게 안성맞춤 메뉴였다. 추억의 짜장면은 지금도 한국인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진화를 거듭하고 있다.

 

[2위] 커피에 아편 넣어 황제의 생명을 노리다

 

2위로는 고종 임금이 즐겨 마신 커피를 빼놓을 수 없다.

커피는 7세기 에티오피아의 양치기 소년이 발견했다고 한다. 소년은 양들이 붉은 열매를 먹으면 흥분하는 걸 보고 그 열매를 이슬람사원에 가져갔다. 커피는 그렇게 중동 지역에 알려졌다. 이후 십자군이 유럽에 가져간 커피는 근대 제국주의 침략과 함께 세계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아프리카, 중남미, 아시아 곳곳에서 재배해 세계인이 마시는 음료가 된 것이다.

한국에는 1882년 조미수호통상조약을 필두로 서구열강에 문호를 개방하면서 도입되기 시작했다. 서양 외교사절들이 갖고 온 커피는 특유의 향미와 카페인으로 조선의 지배층을 유혹했다. 1890년대에 들어서면 커피가 ‘가배(咖啡)차’ 또는 ‘양탕(洋湯)국’이라 불리며 서서히 보급되었다. 서울 궁궐과 개항지 호텔 등지를 벗어나 민간으로 흘러들었다.

당시 커피 애호가로 가장 유명했던 인물은 고종 임금이었다. 1896년 2월 그는 왕비를 시해한 일본의 마수에서 벗어나 러시아 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겼다. 이 아관파천의 막후에서 활약한 독일 여성이 손탁(Sontag)이었다. 그녀는 배일(排日)운동 단체인 정동구락부의 연락책이었는데 고종에게 커피를 진상하는 등 생활 편의도 제공했다. 1897년 2월 경운궁(덕수궁)으로 돌아온 고종은 서양식 정자 정관헌에서 ‘가배차’를 즐기며 삶의 위안으로 삼았다.

그해 10월 고종은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에 즉위했다. 일제와 서구열강의 틈바구니에서 고종 황제는 위협에 시달렸다. 1898년 9월 11일에는 커피 때문에 목숨을 잃을 뻔했다. 이날 저녁 황제와 황태자가 커피를 마셨는데 황태자가 토하면서 혼절했다. 냄새가 안 좋다며 입만 댄 고종은 다행히 화를 면했다. 커피에는 많은 양의 아편이 들어 있었다. 조사 결과 거액을 착복한 혐의로 흑산도에 유배 중이던 친러파 김홍륙이 앙심을 품고 사람을 써서 벌인 짓이었다. 관련자들은 곧 사형당했다. 이른바 ‘김홍륙 독차사건’이었다.

한편 손탁은 1902년 황제가 지어준 정동의 2층 양옥 건물에 외국 귀빈을 영접하는 호텔을 열고 한국 최초의 커피숍을 운영했다. 커피숍은 일제 강점기에 도회지를 중심으로 하나둘 생겨났다. 한국전쟁 이후에는 미군 부대에서 커피가 흘러나왔다. 미제 커피 세례를 받아 1960년대 들어 전국적으로 다방이 성업했다. 1970년대에 인기를 얻은 국산 커피믹스는 커피 1스푼, 설탕 3스푼, 크림 2스푼의 다방 커피 비율이었다.

1990년대 초반 대학가에는 커피전문점이 등장했다. 원두커피부터 비엔나커피까지 각양각색의 커피를 즐길 수 있는 곳이었는데 대학생들의 소개팅 명소로 각광받았다. 에스프레소 기반의 커피문화가 꽃피운 것은 1990년대 후반의 일이었다. 1999년 스타벅스 이대점이 문을 열면서 국내외 커피 브랜드가 한국에서 각축전을 펼치기 시작했다. 21세기 한국인은 온갖 종류의 커피를 입에 달고 산다. 가게는 물론 집집마다 커피머신이 들어와 검고 향기로운 음료를 내린다. 한국인의 핏속에 커피가 흐르고 있다.

 

[1위] 새벽 쓰린 가슴 위로 찬 소주를 붓는다

 

1위는 이슬처럼 맑고 영롱한 침략자, 소주다. 

“새벽 쓰린 가슴 위로 찬 소주를 붓는다!” 내가 대학 시절에 참 좋아한 노랫말이자 시구다. 소주는 원래 아랍 지역에서 탄생한 증류주였다. 한국을 비롯한 동아시아에서는 전통적으로 양조주, 그러니까 곡물을 발효시킨 술을 마셨다. 오늘날의 청주, 막걸리, 맥주 등이 양조주에 속한다. 반면 증류주는 양조주를 끓여서 증발한 기체를 냉각시킨 것이다. 알코올도수가 높아 빨리 취하지만 다음날 숙취는 덜하다.

소주는 13, 14세기에 몽골제국이 유라시아 대륙을 정복하면서 동아시아로 건너왔다. 아라비아 증류주가 한국과 중국에 들어온 것이다. 고려 시대 이래 소주는 다양한 이름으로 불렸다. 불을 때서 술을 받는다고 하여 ‘화주(火酒)’라고도 했고, 냉각한 기체가 이슬처럼 맺혀서 ‘노주(露酒)’라고도 했다. ‘참이슬’이라는 유명 소주 브랜드가 여기서 나왔다. 중국에서는 ‘백주(白酒)’라고 불렀는데 술이 맑다는 뜻이었다.

조선 시대에는 소주를 약술로 썼다. 조선 5대 임금 문종이 세상을 떠나자 어린 단종이 상주 노릇을 하느라 기진맥진했는데 소주를 먹여 기운을 차리게 했다. 약술이라도 과음하면 좋을 게 없다. 조선 태조 이성계의 장남 이방우는 고려의 충신이었다. 아버지가 역심을 품자 그는 반대하다가 소주를 퍼마시고 술병으로 죽었다고 한다. 임금과 사대부의 술, 소주는 조선 후기에 시장이 발달하면서 서민들에게도 널리 보급되었다.

일제 강점기에 소주는 한국을 대표하는 주종으로 떠오르며 날개 돋친 듯이 팔려나갔다. 덩달아 한국인의 음주량도 크게 늘었다. 1929년에는 전체 조세수입의 28.7%가 주세, 즉 술에 붙이는 세금이었다고 한다. 토지세를 능가할 정도였다. 문제는 식량 사정이 여의치 않았다는 것이다. 소주를 증류하려면 곡식이 많이 들었다. 한쪽에서는 보릿고개로 사람들이 굶어 죽고 있는데 다른 쪽에서는 술 퍼마시고 흥청망청하다니!

이 문제는 한국전쟁을 거쳐 1960년대까지 이어졌다. 급기야 1965년 박정희 정부는 곡식을 사용한 증류주 제조를 금지했다. 소주는 당밀, 타피오카로 에탄올을 만들어 희석시키는 화학주로 대체되었다. 하기야 화학주면 어떠랴. 새벽 쓰린 가슴 위로 찬 소주를 부으며 젊은 날의 열병을 가라앉혔던 게 엊그제 같다. 한국인을 술독에 빠뜨리고 식량난을 부채질하긴 했지만, 소주는 이슬처럼 맑고 영롱한 취기로 세상살이에 지친 서민들의 마음을 달랬다. 맛있는 침략자 가운데 으뜸으로 꼽는 이유다.

 

※ 권경률 (사학 90) - 역사 칼럼니스트, 월간중앙 필진. 사람을 읽고 생각하고 쓰면서 역사의 행간을 채워나간다. 유튜브·페이스북·팟캐스트에 ‘역사채널권경률’을 열어 독자들과 소통하고 있다. [시작은 모두 사랑이었다](2019), [조선을 새롭게 하라](2017), [조선을 만든 위험한 말들](2015) 등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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