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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서강과 한국에서의 시간은 사랑이었습니다-다니엘 키스터 신부님(기수현 교수님) 서강 50주년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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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24-12-18 16:46 조회96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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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니엘 키스터 신부님(기수현 교수님) 서강 50주년 인터뷰

서강과 한국에서의 시간은 사랑이었습니다

 

 

 2024년 12월 2일, 2024년이 한 달이 채 되지 않게 남은 어느 날, 길고도 짧았던 한 해를 마무리할 시점에 우리는 특별한 서강인 한 사람을 만났다. 바로 다니엘 키스터 신부님(Rev. Daniel A. Kister, 한국 이름 기수현)이다. 2024년은 신부님께서 한국에 첫 발을 딛은 지 50년을 맞이하는 해이다. 1974년, 젊은 나이로 한국 땅을 밟은 신부님은 그동안 서강대학교를 기점으로 한국 사회의 많은 이들에게 깊은 영향을 끼쳤다. 신부님은 자신이 걸어온 50년의 여정을 되돌아보며, 한국에서의 사목과 삶을 통해 얻은 소중한 교훈과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이 특별한 송년의 시간을 맞아, 우리는 신부님과의 인터뷰를 통해 그가 경험해 왔던 서강만의 독보적인 가치, 그리고 그가 바라본 한국과 서강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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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창동 예수회 이냐시오 공동체에 계신 다니엘 키스터 신부님. 신부님은 2024년, 서강에 오신 지 50주년을 맞이하셨다. ( 사진 : 김현우(21 물리) 학생기자 )


1. 안녕하세요. 다니엘 키스터 신부님, 건강하신 모습 직접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신부님께서는 1974년 한국에 처음 오신 후 2024년, 50주년을 맞이하셨습니다. 서강옛집을 통해 신부님을 다시 뵙게 될 신부님의 제자들을 포함한, 서강가족 분들에게 신부님의 소개를 부탁드립니다.


안녕하세요. 서강 가족 여러분. 저는 Daniel A. Kister 신부입니다. 미국 미주리에서 태어났고, 1953년 미국에서 예수회 입회를 했습니다. 미국 세인트루이스 대학 졸업 이후, 남가주대학에서 비교문학, 유럽문학 특히 희곡, 현대문학 쪽으로 석·박사 학위를 취득했습니다. 이후 1974년 모교 영어영문학 전공의 교수로 부임했어요. 2001년까지 학생들을 가르쳤습니다. 대개 희곡과 시를 가르쳤었죠. 



2. 은퇴 후 요즘 어떻게 지내고 계시는지 궁금합니다. 건강은 좋으신지, 건강관리는 어떻게 하고 계신지요?


한국에 올 때에는 38살이었는데, 올해 88살이예요. 건강하지요?(웃음) 요새는 수영을 꾸준히 합니다. 일주일에 한 두 번 정도, 근처 초등학교에 수영장이 있어요. 그 수영장에 가서 꾸준히 수영을 하고 옵니다. 


2-1. 신부님께서 드뷔시 곡을 연주하시는 모습을 유튜브로 보고 왔습니다. 

아직도 볼 수 있어요?(웃음) 그래요. 여전히 피아노 연주를 합니다. 많이 치지는 않지만, 방에 피아노가 있어서 30분 정도 피아노를 칩니다. 드뷔시, 쇼팽을 좋아하고 그들의 곡을 주로 연주합니다. 

 

3. 신부님께서는 한국에서 생활하신 지 50년을 넘기고 계십니다. 생애의 상당 기간을 한국에서 보내셨는데, 한국 생활 50년을 맞은 소감은 어떠실지 궁금합니다. 

 

한국에서 1974년에 왔으니 50년 전에 왔었죠? 여기 한국에서는 38년 있었어요. 미국에서 38년, 한국에서 38년, 중국에서 12년 살아왔습니다. 벌써 시간이 많이 흘렀군요. 


3-1. 예수회 사제로서 수많은 국가 중 한국을 택하시게 된 계기는 무엇인지요?

한국을 택하신 후 후회되는 일, 예를 들면 다른 나라를 택했으면 더 좋았을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은 없으셨는지요?


 

미국의 한 예수회 소속 대학교 강단에서 학생들을 가르쳤었습니다. 당시 교원들에 대한 금전적 보상이 충분치 못해, 학교의 젊은 교수들이 많이 나갔어요. 다시 말해 일자리가 부족했습니다. 나 역시 예외가 아니었지요. 나는 유럽 문학으로 박사 학위를 취득했지만, 동시에 인도나 아시아 등 다른 지역의 문화에도 큰 관심을 갖고 있었어요. 그래서 인도나 아시아 지역에 위치한 예수회 학교에서 강의를 할 수 있는 기회가 있는지 편지를 보냈습니다. 그곳에서 2~3년 동안 학생들을 가르치며 현지 문화를 직접 익히고, 미국으로 돌아오고자 했었습니다. 그리고 서강대학교에서 답장이 왔어요. 그래서 한국과, 서강과 연을 맺게 된 것입니다. 


답장을 받고 약 두 달 뒤 처음 한국에, 서강에 왔던 날이 1974년 6월 5일이예요. 그리고 다음 날인 6월 6일 우리 예수회가 북한산에 피크닉을 갔어요. 정말 우연히 처음으로 무당굿을 봤습니다.-그 땐 근처에 무속인들이 많이 살았었어요. 또 내 박사 논문이 샤머니즘과 조금 관련이 있었어요.  또 국문과 김열규 교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여기 와서 한국 사람들을 이해하려면 무속에 대해 배워두는 것이 좋다고 하더군요. 나와 연이 많이 겹치지요?

 

내가 한국에 온 목적은 이 곳의 문화를 배우고 싶어서였고 또 그렇게 한국에서의 생활을 시작했는데, 여기 와서 보니 서강의 학생들이 정말 좋았어요. 사실 나는 고등학생 때 교사가 되고 싶었어요. 재미없는 과목의 수업을 들으면서 어떻게 하면 재미있게 가르칠 수 있을까 고민을 했었습니다. 그리고 그 때 한 연극 수업을 들었는데, 그 연극 내용을 보니 선생님과 학생들이 아주 좋은 관계를 이어가더군요. 그 연극처럼, 선생님에 그치기보다 학생들과 좋은 관계를 맺는 스승이 되고 싶었습니다. 미국보다는 여기 한국에서 우리 서강의 영어영문학과 학생들과 더 그럴 수 있었습니다. 당시 서강 영어영문학과는 한 해에 40명 정도만 입학했습니다. 규모가 작다 보니 학생들 개개인의 상황을 자연스럽게 알 수 있게 되었고, 같이 구경도 다니고 여행도 다니며 친분을 쌓을 수 있었어요. 나는 서강에 와서 서강의 학생들 덕분에, 좋은 경험을 하고 인간적인 가치를 배웠어요. 그래서 계속 남아있기로 결정한 것입니다.


4. 한국에서의 생활, 특히 서강에서 보낸 50년을 회고해 주신다면요. 신부님께서는 예수회 사제로, 서강에서는 27년간 교수로 제자들을 키워 오셨고, 영미시문학 뿐 아니라 한국 문학에도 큰 관심을 갖고 한국의 아름다운 시문학 작품을 번역해 알리는 등 번역문학가이기도 하십니다. 한국에서의 지난 삶에 대해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한국에 와서는, 여름에는 한국말을 배우고, 가을에는 오전에는 연세대학교를 가서 한국어를 배우고 오후에는 서강대학교에서 강의를 했어요. 


독립문 근처에 무당집이 하나 있었어요. 몇 번 거기 가서 학생들에게 보여줄 굿 구경 준비를 하기도 했고... 그리고 1977년에는 서강예수회공동체에서 야간학교 설립을 하자는 의견이 있었어요. 그 때는 청년들의 교육에 관심이 많았는데, 상당수의 한국 학생들이 금전적으로 어려운 형편 때문에 낮에는 일을 해야 해서, 저녁에 공부를 하고 싶어했어요. 결국 야간 학교가 성공적으로 설립되었고, 그렇게 설립된 '성 이냐시오 야간학교'에서 20~25년간 교장으로 일했지요. 1980년대에 학생들이 많이 들어와서, 아주 좋아했어요, 학생들과 친하게 지내기도 하고, 가르치는 사람들은 서강 또는 다른 대학 사람들이 와서 별도의 비용 없이 교육 봉사를 하고 학생들은 무료로 배우고. 아직도 잘 운영되고 있습니다. 지금은 젊은 사람은 없지만, 나이가 많거나 어렸을 때 공부를 하지 못했던 사람들을 대상으로 계속 야간 학교는 운영되고 있어요. 서강에 와서 제일 좋은 것 중 하나예요.


한국에서 사는 것, 아주 좋아요. 나무도 많고 숲도 많은 한국의 자연은 그 자체로 나에게는 안정을 줍니다. 한국에서 돌아다니면서 아름다운 자연과 그 오랜 역사가 참 좋습니다. 두어 달 전에 76학번 졸업생과 함께 전라도 백양사를 다녀 오기도 했고. 한국에 있을 적 여행을 참 많이 다녔었습니다. 50년 전 추석 때에는 처음으로 광주, 그리고 백양사를 갔었군요. 그리고 45년 전 어머니와 함께 부여의 낙화암을 배를 타고 갔다 오기도 했어요. 요새 중국의 역사 시리즈물을 보고 있는데, 그 시리즈 속 문구를 빌리자면 한국은 ‘Land of the Morning Calm’입니다. 


서강에서 가르칠 때 북한산도 자주 갔었습니다. 매주 목요일, 일주일에 한 번 정도는 혼자 또는 학생들과 산책 후 같이 샌드위치를 싸 가서 먹고, 목욕탕을 들렀다 오곤 했어요. 가까운 곳에 좋은 산이 있다는 것은 정말 행복한 일입니다. 북한산 올라가면, 자연을 보면서 어떤 생각을 하기보다는 현실에서의 책임을 잠깐 내려놓고 스트레스를 해소하고 오지요. 그 당시 북한산은 무속인들이 많아서, 굿 구경도 많이 하고 그랬어요. 


한 번은 여행을 간 적이 있어요. 70년대에, 동해 쪽으로 속초, 고성까지 혼자 여관에서 잠을 자면서 돌아다녔었죠. 그 와중에 다른 손님이 보기엔 내가 간첩인가 싶었나 봐요(웃음). 간첩 신고를 받기도 했어요. 다음 날 아침에 경찰서에서 사람이 와서 ‘아 선생님, 혹시 간첩이 아니시겠죠?’ 이렇게 묻더군요. 돌아다니다 보니 이런 기억도 있군요. 

그 무렵에, 포항 쪽으로 가니 죽은 어부를 위한 굿이 열리고 있었어요. 원래는 해변에서 굿 하는 것을 군인들이 싫어해요. 그래서 해산하려고 했는데 내가 있으니 신부님이 있다고 그냥 놔두더군요. 


한 번은 부산 영종도에 약속이 있어 가게 되었는데, 죽은 사람을 위해 굿을 하는데 매력을 느꼈습니다. 사람이 자연과 어우러지는 모습이 좋았어요. 성당은 의식을 재미있게 보다는 엄숙하게 진행하는데, 굿은 사람들이 노래도 부르고 흥겨워하면서 추모하는 것이 참 기분이 좋았습니다. 굿은 수 백년 동안 기도하고 추모하고 기뻐하는 전통을 한 곳에 담아낸 인간적인 매력이 가득한 전통 문화입니다. 


원래 나는 박사 과정을 밟으면서 현대 불란서 희곡에 나타나는 전통 민속적 상징에 대해 논문을 썼었는데, 그것이 한국에서는 샤머니즘인 셈이죠. 솔직히, 서강과 연이 닿기 전에는 한국에 대해서 잘 몰랐어요. 하지만 한국에 오면 이런 문화를 경험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고, 그게 한국에 오게 된 계기가 되었기도 합니다. 80년대에는, 나는 서강에 몸담고 있으면서도 수원 가톨릭 대학에서 일주일에 한 번 정도, 대학원생들에게 무속을 가르치기도 했어요. 


90년대, 그 당시는 정지용 시인의 시를 출판할 수 없었어요. 하지만 나는 그의 시를 참 좋아했습니다. 한 2년 동안 아침마다, 저녁마다 조금씩 취미로 번역했고 나중에 미국에 번역 시집을 출간했었어요. 반응이 아주 좋았습니다. 나는 미국이나 영국 시를 가르쳤는데, 특히 영국 시는 많이 생각을 해야 합니다. 조금 복잡하죠. 그런데 한국 시와 중국 시는 생각하는 것보다는 인간과 자연을 체험하고 깊이 느끼도록 하는 점이 아주 좋습니다. 그게 정지용 시인의 작품을 좋아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4-1. 신부님, 사실 한국 시 구절은 표면적으로는 매우 간단해서 영어 또는 외국어로 그대로 직역하면 정말 간편하지 않습니까? 

앞서 말했다시피 한국 시를 지난 2년 동안 틈틈이 번역을 하고, 국문학 교수와 그 수하생에게 도움을 받기도 하고 또 다시 읊고 고치고... 왜냐하면 정말 많이 생각해야 하니까요. 원래는 번역을 하면 아무래도 그 본래의 의미를 그대로 전달하기란 어렵지만, 그 분위기를 이해하고 제대로 전달하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5. 신부님께 가르침을 받은 당시의 학생들은 신부님을 '학생들에 대한 관심과 사랑이 크신 분'이라고 입모아 말하더군요. 노고산을 참 많이 가시는 교수님, 어떤 영문과 출신 서강인은 신부님의 강의 '영미시문학'을 자신이 서강에서 들은 손꼽히는 명강의라고 하기도 합니다. 서강에서 신부님께서는 교수님으로서 뿐 아니라 서강의 구성원으로서 어떤 일을 해 오셨는지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나는 서강 영문과 교수로서 강단에서 영문과 학생들을 가르쳤고 그들과 가깝게 지냈습니다. 덕분에 아직도 일부 학생들과는 연락을 이어가고 있어요. 며칠 전에도 한국이나 중국에 있는 친구들, 특히 70년대에 가르쳤었던 학생들 몇 명을 만났었지요. 또 80년대에 만나 온 학생들, 서강의 학생들과 성 이냐시오 학교의 학생들 모두 다 만납니다. 예전에는 서강의 학생들과 교수들이 친밀한 관계가 가능했는데, 한 90년대 이후부터는 교수와 학생들 사이에 밀접한 관계가 잘 없어요. 그런데 2001년에 중국을 갔을 때, 그 때는 70년대의 서강처럼 아주 학생들과 교수가 친밀하고 가까운 사이가 될 수 있었습니다. 중국에서 가르치다가 13년 전에 한국에 다시 돌아와서 서강 공동체에서 잠깐 일을 하기도 했는데, 많은 신자들과 교류하고 영미시문학을 가르치며 알게 된 사람들과 알게 되어 아주 재미있고 뿌듯한 마음이 있습니다.


노고산 하니, 나무를 열심히 심었던 기억이 나는군요. 1988년부터 한 8년 동안 노고산에 가서 나무를 심기 시작했어요. 나는 가끔 노고산에 가서 산책을 했는데, 아카시아 나무와 오리나무밖에 없더군요. 재미가 없었어요. 나중에 나이를 좀 더 먹고는 더 좋은 산에 가고 싶다는 마음으로 조금씩 나무를 심기 시작했어요. 한 8년 동안 봄에는 여름까지 석 달, 겨울에는 두 달 반 정도 나무를 심었습니다. 서강에서 가르칠 때 일주일에 한 두 번, 학생들에게 나무를 심고 싶으면 노고산으로 오라고 하니 학생들 2~3명이 와서 2시간 반 정도 작은 묘목들을 갖다 심어요. 그리고 서강예수회공동체에 들어와서 같이 식사를 하고. 아주 재미있는 추억이예요. 우리가 팔만 그루 정도 심어서, 지금은 아주 울창할 거예요. 노고산 가 본 적 있어요? 아카시아 나무 외에도, 나무 종류가 아주 다양하고 많지요? (웃음) 

 


6. 신부님, 정지용의 시 '향수'에 이런 구절이 반복되지요.-"—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서강에서의 기억 중 신부님께서 꿈에서도 종종 떠올리실 서강의 공간과 서강의 제자들과의 일화가 궁금합니다.  


'서강'하면, 성 이냐시오 야간 학교, 노고산이 떠오릅니다. 많은 학생들과 교류하고 소중한 추억이 담긴 곳입니다. 노고산은 아카시아 나무, 오리나무 뿐이었는데 이제는 많은 나무들이 잘 자라 더욱 멋진 풍경을 자아내지요. 지난 봄에 사제관 뒤를 올라 하비에르관 쪽으로 노고산을 산책했습니다. 


제자들은, 학생 셋이 떠오릅니다. 75년~76년 일이었어요. 12시 쯤에 전화가 왔는데 그 전화를 못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후에 그 학생의 어머니께서 전화 주셨습니다. 학생이 자살을 했다구요. 서강 영문과 학생이었어요. 

그리고 95년인가, 성 이냐시오 야간 학교 학생 한 명이 자살을 했어요. 군에서 제대한 후 경찰이 되고 싶었는데, 학생의 아버지의 신원 상의 문제 때문인지 경찰을 못하게 되었다고 하더군요. 그리고 나한테 우편으로 작은 선물을 보내 주었는데, 나는 그 당시 참 이상하다고 생각을 했었어요. 그리고 며칠 후 그 학생의 형이 나에게 연락이 왔어요.

그리고 한 15년 후, 중국인 여학생이었어요. 베이징 근처에게 가르쳤는데, 40대의 이혼 경력이 있는 남성과 결혼을 한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결혼한 지 일주일 후 자살을 했다고 그녀의 동기로부터 연락을 받았습니다.

나는 아직도 그 세 사람을 특별히 떠올립니다. 어떤 때는 요즘의 젊은 사람들이 겪는 어려움에 대해, 하느님의 품 속에 계신 그들에게 기도를 합니다. 내가 가르친 학생들이 좋지 않게 풀리게 되었음에 마음의 짐을 갖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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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먼저 떠난 제자들을 회상하는 다니엘 키스터 신부님 
( 사진 : 김현우(21 물리) 학생기자 )



7. 신부님께서 서강을 떠올릴 때, 가장 강하고 큰 감정은 '그리움'이 아닐까 싶습니다. 또 한편으로는 빠르게 흐르는 시간 속에서, 많은 서강인들이 그들이 살아가던 시절의 서강을 그리워합니다. 그 때의 서강을 기억하며, 지난 서강인들을 기리기도 합니다. 벌써 2024년이지요? 곧 맞이할 2025년의 서강은 또 2024년의 서강과 다를 텐데요. 점점 무게를 더하는 그리움과 삶의 고됨을 삼키며 한 해를 마무리하는 이 시점에서, 신부님의 인터뷰를 읽어 볼 서강가족들에게 메시지를 전해 주시겠습니까?


나는 요즘 학생들이 어떤지는 사실 잘 모릅니다. 하지만 서강의 학생들에게 항상 말해 왔던 것이 있습니다. ‘자기가 하고 싶어하는 것을 알고 그것에 따라 공부하고 행동하는 것이 좋다‘고요. 어떤 경우는 부모님이 희망하는 바를 자기가 하고 싶은 것마냥 생각하기도 하는데, 그것보다는 본인이 하고 싶은 바를 찾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하고 싶어요. 


한 중국 학생이 떠오르는군요. 그 학생은 동물의 생태와 행동을 연구하고 싶어했어요. 제인 구달 박사처럼 연구를 하고 싶어하던 학생이었습니다. 그 학생은 부모님의 뜻에 따라서 경영학과로 진학했지만, 본인이 결국 동물학을 공부하고 대학원에서는 2년 동안 유인원 연구를 하고는 지금은 대학에서 동물학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리고 만약에 어떤 제한 때문에 본인이 하고 싶은 바가 잘 안 되어도, 조금의 융통성이 있어야지요. 다른 것을 잘 할 수 있도록 말이죠. 


몇년 전 84학번 영문과 졸업생들과 모임을 했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 친구들이 벌써 55세더군요. 나는 65세부터 다시 인생을 시작했습니다. 중국에 가서, 옛날 고등학생처럼 가르치고, 그 나라의 언어를 배우고, 아주 새로운 환경에서 내 삶을 다시 시작했어요. 그래서 그 학생들에게 이렇게 말을 했어요. 앞으로 30년 동안 살 텐데 퇴직하기 전에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 것인지 생각해 두어야 한다고. 그리고 인간 관계가 아주 중요합니다. 그러니 계속해서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 있도록 기다리지 말고 먼저 연락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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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과 서강에서의 추억을 말씀하시는 다니엘 키스터 신부님 
( 사진 : 김현우(21 물리) 학생기자 )



[마무리] 키스터 신부님, 아니 기수현 교수님, 오래 건강하십시오. 인터뷰 마지막으로 한 마디 해 주시겠습니까?

 

고맙습니다. 어떤 것을 사랑한다면, 좋은 면도 나쁜 면도, 모두 포용하게 됩니다. 나에겐 서강이, 한국이 그렇습니다. 내가 서강에 왔었던 70년대부터 한국에서는 데모가 많이 있었습니다. 학생들이 데모를 나가면 1~2주 정도는 학교에 못 돌아왔어요. 그래서 교수들이 나가서 잡혀 간 학생들을 데리고 왔어요. 그게 예식처럼, 처음에는 웃고 넘어갈 수준이었습니다. 그런데 갈수록 데모가 더욱 무섭게 진행이 되고 80년대에 이르러서는 분위기가 더욱 뒤숭숭해졌었습니다. 그 때 나는 복잡한 심경으로 부산에 내려가서 달맞이고개를 갔었습니다. 그 때는 길도 없었고 그냥 숲이었어요. 그 속을 헤쳐 들어가면 바다가 보입니다. 거기서 먼저 떠난 이들의 흔적을 보고 있으면 바다를 보면서 아름답지만 동시에 잔인하고, 무섭다고도 느꼈습니다. 무엇인가를 사랑한다면 그 양면성을 알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두 사랑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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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니엘 키스터 신부님께서 계시는 예수회 이냐시오 공동체의 입구 모습 
( 사진 : 김현우(21 물리) 학생기자 )




서강옛집 담당자 이수민(14 수학), 김현우(21 물리) 서강옛집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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