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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매자 (61 영문) 재미(在美) 여류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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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3-11-25 22:14 조회13,33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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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생의 중요한 순간마다 함께했던 건 서강이었죠”

영문 자전소설 ‘The voices of heaven’을 출간한 이매자(61 영문) 동문에게 서강은 상처를발견했을 때 동여맨 붕대이자 흉터도 치료한 항생제 연고다. 1965년 졸업 후 미국 유학을 준비하던 그해 여름, 자신이 양부모 밑에서 자랐다는 사실을 알게 됐고, 5년 뒤인 1970년 모교 성당에서 미국인 남편과 결혼해 우리나라를 떠나면서 다시는 한국에 오지 않겠다는 결심을 돌리게 했던 계기가 서강이었기 때문이다.
 
“일제 강점기 시절 생부가 만주에서 망명하던 1943년도에 저를 낳았답니다. 먹을 것도 없던 때, 발에 제대로 낄 신발도 없었을 때, 제가 아프기까지 했대요. 심지어 남녀 쌍둥이였는데, 당시 쌍둥이는 같이 안 키운다는 미신때문에 양아버지의 삼촌에게 맡겨졌어요. 건강 회복하면 다시 데려온다는 조건이었다는데 양아버지의 삼촌은 서울에 사는 조카 내외가 아이가 없어서 아이를 만주에서 데려와 아예 호적에 올려버렸대요. 그 사실을 대학 졸업한 그해 여름에야 처음 안거죠.”

입양 사실을 모른 채 지낸 어린 시절, 가정은 무척 화목했지만 대를 이을 아들이 있어야 한다는 전통사상과 할머니 성화로 양아버지는 작은 어머니를 들여야 했다. 그 시절 허물이 아니었던 첩 풍속이었다.

“금슬 좋은 부부셨지만 엄마는 작은엄마가 들어온 이후 아프기 시작했어요. 아빠는 엄마를 사랑했지만 엄마를 떼어두고 옆방에 가서 자야했던 첫날 밤엔 ‘차라리 셋이서 같이 자자’라며 오열하셨죠. 책 제목 ‘하늘의 목소리’는 유교 사상을 빗댄 의미에요. 하늘에서 뚝 떨어진 명령처럼 유교 사상에 복종해야했던 때를 뜻하죠. 사랑하는 사이였지만 유교의 가르침에 복종했던 부모님의 아픔을 통해 지난 시절 이야기가 하고 싶었답니다.”
 
이 동문은 졸업 이후 미국에서 석사 학위를 취득하고 돌아와 수도여자사범대학(현 세종대학교)에서 영문학과 교수로 교편을 잡았다. 그러던 중 1970년 1월 평화봉사단원으로 우리나라를 방문했던 지금의 남편을 만나 미국 이민길에 올랐다. 딸이라는 이유만으로 천대 받았을 만큼 ‘하늘의 목소리’와 같았던 유교적 사회 분위기는 남녀 차별이 훨씬 덜한 미국으로 떠나게 했다. 현재 트루먼도서관 및 박물관 관장인 남편 마이클 디바인과 3남 2녀를 장성하게 키워냈다.

“작가가 될 줄은 몰랐어요. 동기인 안정효는 학창 시절에만 소설 2편을 쓸 정도로 천재였는데, 저는 창작을 할 생각은 전혀 없었고 평론가가 된다는 생각을 했죠. 평소 남편이나 주위 사람에게 제가 살아온 이야기를 했을 때 외국인 입장에서 정말 특이한 내용이라며 글 써볼 것을 권유받은 게 계기였죠. 처음에는 자서전으로 썼다가 출판 관련 에이전트가 글을 접하고는 소설 형식으로 바꿔서 출판하자고 제의했죠. 사실 너무 괴롭고 아픈 기억이기에 글 쓰는 과정이 힘들었어요. 조금 쓰다보면 화장실 가서 울어야했죠. 그런데 소설 쓰다 보니 엄마 입장에서도 생각하고, 아빠 입장에서도 생각하게 됐어요. 누군가가 글쓰기는 자기 치유 과정이라 했다는데 그 말이 맞아요.”

사실 이 동문은 미국 이민 이후 아직도 남아선호사상에 젖은 한국과 일부러 거리를 뒀다. 그러던 중 모교에서 강의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그래서 용기를 냈다. 이민 간 지 25년 만인 1995년의 일이었다. 상처가 조금씩 아물 수 있는 기회를 서강이 제공한 셈이다. 

인생 여정에 큰 영향을 끼친 서강이기에 이 동문의 애교심은 헌신적이다. 이는 ‘개교 50주년 기념 책자 에피소드’와 ‘故존P.데일리 신부 추모 문집’을 집필하는 과정에서 고스란히 드러났다. 이 동문은 서강가족 100여 명을 섭외해서 원고를 청탁하고 인터뷰를 정리해서 집필과 제작 과정까지 책임지는 일에 나섰다. 후배들이 서강을 추억할 수 있고 서강 역사를 길이 남기기 위해 필요한 자료를 구축하는 서강에 대한 사랑과 고마움을 표현하는 작업이었다.

“학교를 위한 일인 데 가만 있을 수 없었죠. 앞으로 제 계획은 소설로 한국을 알리는 일에 매진하는 거에요. 영문판을 먼저 쓰고나서 한글로 번역했는데(한글판 출판 미정) 영문판은 서강에서 배운 영어와 영문학의 탄탄한 기초 없이는 불가능했죠. 이렇게 제 일생의 가장 중요한 끄나풀들은 모두 서강에서부터 풀려나왔군요. 에이전트가 이 책이 중국이나 일본에 관한 내용이었으면 지금보다 훨씬 잘 팔릴 거라 말할 정도니 할 일이 많습니다. 예를 들어 글을 통해 한국을 알리려고 일부러라도 문맥에 우리 속담을 많이 넣었어요. ‘간에 붙었다 쓸개에 붙었다’, ‘콩인지 팥인지도 모르는 바보 천치’, ‘입안의 혀처럼 행동하기’,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 ‘손 안대고 코풀기’ 등의 표현을 직역하니 외국인들이 무척특이하다고 난리도 아니에요.”

글·사진=정범석(96 국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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