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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강학보 600호,그대 흘린땀 세상을 이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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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2-12-07 16:57 조회15,05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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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서강타임스로 창간한 서강학보가 11월 5일 지령 600호를 발간했습니다.

개교와 더불어 52년 동안 역사를 써나가는 동안 수많은 기자들은 땀과 눈물로 ‘자주언론’ 서강학보를 지켜왔습니다. ‘그대 흘린 땀이 세상을 이기리라’라는 서강학보 기치는 무색하지 않았습니다. 시대 아픔을 공감하는 청년 서강의 목소리에 따라 반정부적 기사를 실었다가 1980년 폐간되기도 했지만, 1981년 복간하면서 한문표기를 없애고 가로쓰기를 도입하는 등 선구적인 시도로 한층 발전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1992년에는 편집권 논란으로 인해 학교 측과 갈등을 빚기도 했으며, 당시 편집국장이 21일 동안 단식투쟁에 나섰을 정도였습니다. 1990년대 후반부터 독자들의 무관심이라는 벽을 맞닥뜨리기도 했지만 2005년 배포대와 홈페이지를 제작하고, 2010년 대판 8면에서 베를리너판 12면으로 변화를 시도하는 등 독자들과 소통하기위해 끊임없이 노력하고 있습니다.

 

신재희(11 신방) 현직 국장은 “서강학보 역사와 학내 역할에 대해 돌아보고 책임감을 되새기게 된다”라며 “학보가 학내언론 대변인역할을 해내도록 하겠다”라고 말했습니다. 아래에 서강학보 지령 600호에 실린, 서강타임스·학보 동문들의 글, 인터뷰와 시대별 발자취를 옮깁니다.


"자랑스러운 서강학보의 생명력"


조광현(88 경제 / 서강타임스·서강학보 동인회 회장)

서강학보 600호. 개교와 함께 ‘서강타임스’로 창간한 신문이니 52년 동안 600번의 신문을 만들었다. 일간신문이라면 2년, 주간신문이라면 11년 정도 걸리는 일을 52년만에 해낸 셈이다. 연평균 11.5번의 신문을 만들었다는 산술적인 계산이 나온다.

수치상으로 보면 학교를 대표하는 학생신문의 위상에 걸맞다. 단순 평균해 보면 52년 동안 한 달에 한 번 꼴로 꾸준히 신문을 발행했다는 수치다. 이는 서강학보가 지치지 않고, 또한 대내외 환경에 굴하지 않고 지면을 통해 학내 구성원들과 지속적으로 소통해 왔음을 보여준다. 이렇게 서강대학교와 서강학보는 한 짝이 되어 처음부터 지금까지 떨어지지 않고 52년을 함께하고 있다.

우여곡절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1980년에는 계엄령 아래 군부에 의해 폐간의 아픔을 겪기도 했고, 이후에도 원치않는 외압에 의해 신문의 배포가 수없이 중지되기도 했다. 기록되기도 했고, 기억 속에만 있는 수많은 부침을 거쳐 서강학보 600호가 만들어졌다.

1호부터 600호까지 서강학보 600호 안에는 이를 만든 학생기자들과 600호를 펼친 독자들의 역사가 있다. 60학번부터 12학번까지 서강학보를 만든 학생기자는 수습기자를 기준으로 52년 동안 약 600명 정도다. 600호 안에는 이 600여 명의 20대 청춘의 땀과 눈물이 담겨있다. 또한 ‘서강대학교’라는 이름으로 함께 했던 5만여 명의 졸업생과 재학생, 교수, 교직원의 이야기가 담겨있다.

서강학보 600호가 자랑스러운 이유는 여기에 있다. 서강학보가 52년을 이어오며 학교의 역사와 함께 호흡해 온 끊이지 않는 생명력이 있고, 그 생명력을 이어온 학생기자들의 역사가 한 뿌리에서 시작돼 온갖 고난과 역경에도 죽지 않고 여전히 무성하게 자라고 있는 것이다.

서강학보는 학생이 만드는 신문이다. 그 말은 신문 발행의 기획부터 편집, 배포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과정에 대한 판단을 학생 스스로 한다는 뜻이다. 즉, ‘편집권’이 학생에게 있음을 의미한다.

서강학보 52년의 역사, 600호를 발행하기까지 변하지 않았고, 앞으로도 변하지 않아야 할 딱 한가지 원칙이 있다면 바로 이것, ‘학생 편집권’을 유지하는 것이다. 사실 서강학보 52년 역사 속의 수많은 부침은 단 한가지 이유, ‘편집권’ 때문이었다. 학생 기자들은 지키고 싶었고, 누군가는 간섭하고 싶었다. 학생들이 스스로 판단하여 알리고 싶고, 쓰고 싶은 기사가 있었지만 누군가는 학생들의 판단을 존중하지 않았다. 그 누군가는 학생들을 믿지 않았고, 그들의 의도대로 학생들을 움직이고 싶었다.

그러나 서강학보는 결국 지켜냈고, 오늘 600호를 발행했다. 꺾이지 않는 생명력으로 오늘을 맞이한 후배 학생기자들이 사랑스럽다. 600호가 나오기까지 서강학보를 읽어주고 지켜준 모든 서강 구성원들이 자랑스럽다.


[인터뷰] 서강타임스 폐간에서 서강학보로 도약하기까지


이진수(79 영문 / 20기 편집국장) 동문

서강학보의 옛 이름은 서강타임스였다. 서강타임스라는 이름으로 발간되던 때는 60년대와 70년대로 불안한 시대적 상황을 반영하듯 발행주기가 불규칙적이었다. 80년도에 민주화 욕구가 거세지자 대학 언론에 대한 압박과 검열 또한 심해졌다. 그러나 서강타임스 기자들은 굴하지 않고 정권을 비판하는 기사를 실었다. 이것이 화근이 돼 끝내 81년 144호에 폐간 조치가 내려진다. 당시의 상황을 30여 년이 지난 지금 이진수(영문 79) 동문을 만나 들어봤다.

그는 79년도에는 신문이 발간되지 않을 때가 더 많았다며 당시를 회상했다. “격월마다 발간되는 체제였으나 툭하면 기사가 잘리거나 배포가 금지되던 때였어요. 기사에 조금이라도 반정부적 성향이 보이면 학생처장이 제재를 가했죠.”

81년 7월에 기자들은 4.19 혁명을 기리는 기사와 당시 전두환 정권을 독일 나치 정권에 빗대어 비판한 기사들로 지면을 구성했고 이것이 발단이 돼 폐간 조치가 내려졌다.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에서 서강학보를 대학 언론사들의 본보기로 삼아 폐간시킨 것이다. “당시는 휴교령이 내려 학생들이 학교에 가지 않을 때라 저항할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다”고 상황을 전했다.

그러나 일방적인 폐간 조치에도 굴하지 않고 기자들은 계속해서 한 자리에 모여 회의하고 취재했다. 그러던 중 학보 없는 대학은 존재할 수 없단 생각에 서강타임스의 복간을 기획했다. 복간을 추진하자 많은 신입생들이 수습 기자로 지원했다. 신문 이름을 서강타임스에서 서강학보로 바꾸고 지면에 한문을 없앴으며 가로쓰기를 도입하는 등의 선구적인 시도를 했다.

당시에는 학교의 앞잡이 노릇을 하던 학도호국단이 있었다. 기자들이 이들의 예산 실태를 분석하는 기사를 냈는데 이를 빌미로 호국단이 학보사에 난입해 소동을 일으켰다. 이후 호국단은 계속해서 기자들을 감시했다. “학생처장은 기사를 검열하고 안전기획부 사람들에게는 미행을 당하기 일쑤였죠. 기자들은 결국 총사퇴를 결심하게 됩니다.” 학교 측은 선뜻 총사퇴를 허락했고 주간 교수도 학생 기자들의 뜻에 동조해 자리에서 물러났다.

격동의 시기를 보낸 이 동문이 서강학보사에 남기는 말은 무엇일까. 그는 현재는 정치적인 문제가 사라졌을지라도 여전히 등록금과 과열된 취업 경쟁 등의 문제가 존재한다고 말하며 현직 기자에게 이런 문제들을 짚어내고 학우들에게 알리는 비판 기능을 충실히 수행할 것을 부탁했다. “학보사에서 불의에 도전하고 투신할 후배들의 역할을 기대합니다.”  이슬기 기자


[인터뷰] 발간 정지와 빈번했던 편집자율권 침해


권경률(90 사학 / 33기 편집국장) 동문

권경률(사학 90) 동문이 서강학보의 기자가 되기로 결심한 것은 모집 홍보 포스터에 적힌 ‘그대 흘린 땀이 세상을 이기리라’라는 문구가 그의 마음을 사로잡으면서였다. 하지만 권 동문의 학보사 활동은 생각만큼 순탄치는 않았다. 당시 주간 교수의 간섭과 학교의 제지로 편집 자율권을 침해받았고 이후 다시 정상화되는 과정에서 많은 어려움을 겪어야 했기 때문이다.

당시 주간 교수는 “학생 기자라면 지도자인 주간 교수의 지시에 따라야한다”며 기사를 일일이 선별하고 내용을 검열했다. 또한 서강학보사가 외부 운동권 단체와 연계돼 운영된다고 주장하면서 외부 투고를 청탁 받는 것 조차도 금지시켰다.

주간 교수와 기자들 간의 의견을 조율하는 과정이 길어진 까닭에 92년도엔 학보 발간이 불규칙적일 수밖에 없었다. 이에 대해 학생회와 학내 자치 조직은 항의 집회를 벌였으나 학교 측에서는 이를 수용하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오히려 학교 측은 학교와 학생이 각각 발간하는 신문의 이원화를 제안했다. 그러나 학보사는 경제적 지원이 부족한 상황하에서는 신문이 제대로 발간될 수 없다며 이를 거부했고, 이에 주간 교수는 학보사 기자들을 배제하고 독단적으로 어용 신문을 내기에 이르렀다.

겨울 방학에 학교 측과 협상이 진전되면서 학교 측은 학보사를 정상화하는 조건으로 주간 교수의 의견을 반영하는 신문을 발간토록 하는 제안을 했다. 권 동문은 “상처를 입은 많은 기자들이 학보사를 떠난 상황에서 우리는 학교 측의 요구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고 전했다. 마침내 93년 2월 졸업특집호를 발간하며 학보사는 끝내 정상화될 수 있었다.

그는 편집권 싸움이 학우들에게 쉽게 읽히는 신문을 만들지 못했던 것에 대한 성찰의 계기가 됐다면서 “독자들에게 사랑받는 신문을 만드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게됐다”고 말했다. 학보에 대해 학우들의 큰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신문 발간이 중단됐을 때부터 정상화가 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기 때문이다. 이후 기자들은 본격적으로 신문에 독자들의 취향과 새로운 요구를 충분히 담아내기 위해 노력했다.   정민희 기자


[인터뷰] 12면의 베를리너판형으로 변화 시도


권오현(09 국문 / 52기 편집국장)

2010년은 학보의 판형과 지면 수가 변화한 시기다. 판형은 기존의 대판에서 베를리너판으로, 면수는 8면에서 12면으로 바뀌었다. 이전에는 사용 가능한 인쇄기와 인력 및 편집의 문제로 판형 변형을 미뤄왔으나 2008년 중앙일보를 통해 베를리너판 발행이 가능한 윤전기를 들여오면서 계기가 마련됐다.

당시 학보사 기자들은 2009년 겨울, 타 대학의 학보사 기자들과 교류하는 기자학교에 참가했고 그곳에서 학보와 관련된 새로운 패러다임을 배우고 습득한다. 당시 준기자였고 후에 53기 국장을 지낸 권오현(국문 09) 동문은 “기자학교에서 자극을 받은 기자들이 다같이 학보의 새로운 모습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고 정황을 밝혔다.  

이후 2009년 겨울 합숙을 떠난 기자들은 2박 3일동안 함께 묵으며 판형에 대한 고민을 시작한다. 기자들 간에 베를리너판으로 변경함으로써 얻게되는 이득과 손실을 따져보는 자유로운 토론이 오고 갔다. 권 동문은 “판형이 축소되면 자연스럽게 지면 수 또한 늘려야한다는 의견이 대두했다”고 전했다.

판형 변화를 찬성하는 기자들은 먼저 기존에 8면으로 구성된 대판 형태의 학보에 문제점을 제기했다. 다양한 소재의 기사를 학우들에게 전달하고 싶지만 지면 수의 한계로 다각화가 어렵다는 것이다. 또한 신문이 변화하는 추세가 더 이상 읽는 신문이 아닌 보이는 신문이라는 점을 들어 짧은 문장으로 이뤄진 기사가 읽기 편하다는 의견이 제기됐다.

이러한 논의 끝에 결국 12면의 베를리너판형으로 학보의 형태를 바꾸기로 결정이 났다. 다양한 레이아웃의 시도가 가능해진 베를리너판 첫 신문 561호가 발간됐고 배포 첫날부터 독자들의 많은 호응을 이끌어냈다.

학생 커뮤니티의 활성화와 각종 인터넷 매체의 등장으로 학내에서 과거의 지위가 무너지고 있었던 학보는 지면의 질을 높이고 읽기 편한 신문을 만드는 데 전력을 쏟았다. 권 동문은 “실용적 정보 전달을 위해 취업면과 학술면을 신설하고 기사의 다양화를 꾀했다”고 밝혔다. 그렇게 시행착오의 과정을 거친 학보는 현재까지 12면의 베를리너판형 형태를 유지해나가고 있다.  구민지 기자


<서강학보 시대별 발자취를 따라가다>





1960년대 - 50년 역사의 서막

서강학보의 모태가 되는 서강타임스는 1960년 서강대학교 개교와 동시에 창간됐다. 창간호는 당시에 획기적이었던 가로쓰기 형태의 타블로이드 판형으로 뉴스, 학술, 학생활동, 문학면 총 4면으로 구성됐다. 초창기에는 기자들에게 따로 배정된 교내 공간이 없어 주간교수의 자택에서 원고를 작성하고 편집해야만 했다. 자체적인 교정을 마친 후 조판을 할 때는 일일이 원고지를 손에 쥐고 활자를 찾아내 지형을 떠야 했다고.

3년 뒤, 학생회관 1층에 서강타임스 사무실이 마련되고, 보다 본격적인 신문제작이 이뤄질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된다. 한편 64년엔 서강타임스 기자들에 의해 영자신문인 서강헤럴드가 창간됐고 여기서 현재 우리 대학의 슬로건인 “Be as proud of Sogang, as Sogang is proud of you”라는 표어가 처음으로 등장하게 된다.

신문 창간 초창기인 탓에 운영상의 어려움으로 신문을 한 달에 한 번 발행하기도 힘들었지만 기자들은 아슬아슬한 학점 경계를 넘나들며 기자 생활에 뜨거운 열정을 바쳤다. 초창기 서강타임스의 구성원으로서 서강대 언론의 역사를 개척했다는 자부심은 서강대학교 학생이 아닌 ‘서강타임스학교’ 학생이 되는 것을 가능케 했다.

당시 기사의 주요 관심사가 학교 행정과 학생회 운영에 대한 감시와 이에 대한 비판적인 보도였기에 기자들은 학교 당국, 학생회와 늘 마찰을 빚었다. 한편 60년대 후반에 들어서면서 박정희 정권의 신문 검열이 강화됐고 기자들도 자유로운 편집권의 보장을 외치며 직접 시위에 나서게 된다. 이 과정에서 기자들이 경찰서에 연행돼 구치소에서 함께 밤을 지새운 적도 많았다고 한다.

이러한 외부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학교 측은 학내 언론사에게 최대한 자율을 보장해 주려는 노력을 보였으며 외풍에 대해서 바람막이 역할을 해줬다. 이런 시대적 상황 하에서 60년대 유일한 학내 언론사였던 서강타임스는 학내에 자신만의 독자적인 영역을 구축해가며 대학 언론매체로서 학교와 학생간의 교량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한채영 기자




1970년대 - 극심한 혼란과 계속되는 저항


1970년대에도 서강타임스는 여전히 간헐적으로 발간됐다. 정권이 가하는 압력이 60년대보다 더욱 심해진 것이다. 학교 안팎은 군사정권의 탄압에 저항하는 학생들의 시위로 긴박하고 어수선했다. 급기야 정부는 각 캠퍼스 내에 정보경찰을 주둔시켜 학생들의 동태를 감시하기에 이르렀다.

이런 상황으로 인해 학교에 집회 분위기가 감돌자 서강타임스 기자들도 하고 싶은 말을 기사에 표출하기 시작했다. 우리 대학 본부는 정부의 압박이 계속되자 저항적인 기사들을 쏟아내는 서강타임스를 압박하기 시작했다. 결국 학교는 서강타임스의 운영비와 발간비를 충분히 지원해주지 않았고 기사는 일일이 주간 교수의 깐깐한 검열을 거쳐야 했다. 또한 인쇄된 신문이 배포 전에 전량 회수된 경우도 있었다.

1972년 유신헌법 발표 직전, 학생들의 데모가 절정으로 치닫던 해에 급기야 대학에는 휴교령이 내려졌고 학교의 정상적 운영이란 사실상 불가능했다. 서강타임스 역시 일 년에 두 번 발행되는 것에 그쳤다. 하지만 이러한 상황 하에서도 서강타임스는 1973년 2월엔 지령 100호를 맞았고 때마침 로욜라 도서관이 개관해 최초의 컬러 신문으로 특집호가 제작됐다. 74년에는 학교 운동장에 군 막사가 들어서면서 학생들의 학교 출입이 아예 금지됐고 신문도 한 번 밖에 발행되지 않았다.

이런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서강타임스는 언론의 자유를 위해 외로운 투쟁을 계속했다. 지성인의 깨어있는 정신으로 시대상황을 반영하는 대학신문을 만들고자 했던 기자들의 태도는 70년대 말에 발생한 ‘노동자 기사 사건’에서 잘 드러난다. 당시 군부 정권은 노동자들의 생존권 보장과 사회정의 구현을 외치던 대학생들의 반정부 시위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그런데 당시 본보에서 ‘노동자로부터 대학생에게’를 주제로 특집호를 발간했고, 이는 큰 논란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이 신문은 학생처장에 의해 몰수됐고 기자들을 향한 수사관의 압박도 계속돼 결국 이들은 정학과 기자직 해임이라는 학교의 일방적 명령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기자들은 서강타임스를 떠나야 했지만 혼란스러운 시대의 흐름을 되살리려 했던 열정만큼은 그들이 남기고 간 신문에 고스란히 녹아있다.  한채영 기자




1980년대 - 끊임없는 검열에 투쟁했던 기자들

1979년 말에는 유신이 몰락한 뒤 12.12 쿠데타가 발생해 새로운 군부 정권이 세워졌다. 이렇게 시작된 서강타임스의 80년대는 이미 격동의 시기에 들어서 있었던 것이다. 80년 끊임없이 기사로 저항하던 서강타임스는 81년 7월 계급의식과 사회불안 조성이란 이유로 문화공보부로부터 폐간 조치를 받았다. 당시는 계엄령 하에서 보도출판검열반의 검열을 거쳐야지만 신문을 낼 수 있던 때다.

81년이 돼서 ‘서강학보’라는 이름으로 새로이 복간됐고 동시에 대학 신문 최초로 가로쓰기를 도입했다. 그러던 중 학도호국단의 예산 문제를 짚은 기사가 발단이 돼 호국단이 학보사에 난입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소동이 있은 후 안전기획부 요원의 감시를 받는 등 계속되는 검열과 외부압력으로 신문은 제대로 발간되기 힘들었다. 그 해 6월 회의감을 느낀 기자들은 총사퇴를 결정하기에 이르렀다. 같은 해 2학기엔 학교 측의 주도로 뽑힌 새로운 기자들이 어용신문을 만들었고, 본래 학보사 기자들은 학교와의 보이지 않는 투쟁을 계속해 나갔다.

84년에는 학생들의 민주화 욕구가 터져 나오는 동시에 학원자율화와 관련된 기사가 주를 이뤘다. 이 시기엔 민주화의 바람으로 인해 본보도 많은 수혜를 입었다. 더 이상 언론자유쟁취에 힘쓰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편집의 자주성을 가질 수 있었고 학보의 정기 발행에 큰 역점을 둬 격주 발행이 정착됐다.

86년엔 학교 측이 아시안게임을 이유로 휴교 조치를 내렸는데 이를 비판한 기사를 실어 배포가 불허된 사건이 있었다. 기자들은 이에 학보를 교내 곳곳에 직접 뿌리는 방식으로 대응했고 그 책임으로 주간 교수가 자리에서 물러났다.

이후 87년 6월 민주화운동을 기점으로 학보사 기자들은 일반 학우들과 다름없이 학생 운동에 전념했다. 80년대 막바지엔 발행주기가 격주에서 주간으로 바뀌고 30명이 넘는 기자들이 활동해 학보의 황금기로 불렸다.  이슬기 기자




1990년대 - 고난과 존속 위기의 시기

서강학보는 학교 측의 편집권 박탈로부터 끝내 다시 안정된 학보사로 거듭나기까지 다사다난한 1990년대를 보냈다. 정부가 대학신문에 직접적 통제를 가했던 90년, 그리고 91년과 92년은 서강학보 52년 역사에서 가장 고난을 겪었던 시기이자 변화의 바람이 분 때였다. 학교 측의 일방적인 배포금지 조치와 철회 및 제작을 중단시키는 경우가 빈번했고 기자들이 배제된 채 신문이 제작되기도 했다. 기자들은 서강학보의 존속을 위해 단식 투쟁도 하며 견디고 또 견뎠다. 일반 학우들의 항의 집회가 이어졌으며 겨울 방학에 이르러서야 학교와의 협상이 진전됐다.

93년 정상화된 서강학보는 6명의 기자들로 시작됐다.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에 호외 신문을 발간하고 2월에 있을 졸업식에 맞춰 첫 신문을 냈다. 학보는 인력난으로 인해 90년까지 면수와 발행주기가 불안정했다. 94년에는 안정적인 간행이 정착됐고 학보는 1학기까지 격주로, 2학기엔 주간으로 발간했다.

95년 조판 방식이 인쇄된 종이를 잘라 신문크기 판에 붙이던 방식에서 컴퓨터 프로그램을 이용한 현대적인 방식으로 바뀌고 활자체의 크기도 커졌다. 90년대 후반에 들어서 여성기자의 수가 과반을 넘어가자 ‘서강여대학보사’라 불리기도 했다. 이러한 구성원의 변화는 지면구성과 기사 내용이 보다 섬세해지는 변화를 가져왔다.

기사 아이템의 경우 93년 신방과 교수임용 문제를 심층적으로 다뤄 서강학보가 학내 언론으로서의 위상을 회복하는 계기가 됐고 90년대 후반엔 당대 총장이 추진한 ‘서강의 브랜드화’로 기삿거리는 풍부해질 수 있었다. 총장은 청년광장에 주차장을 만들 것과 교내 시설의 외관 변화를 할 것을 주장했다. 그 결과 등록금이 인상됐지만 연말의 닥친 IMF로 계획은 무산 될 수밖에 없었다. 99년도엔 다수의 수습기자들이 학보사를 그만둬 인력난 문제가 대두되기도 했다.  정민희 기자




2000년대 - 새로운 바람이 불다

2000년대는 IMF 경제위기로부터 시작된 신자유주의 돌풍과 한국 사회 내에서의 생존 경쟁이 가속화된 시기다. 학생운동은 점차 과거의 투쟁적인 성격을 잃어갔고 가두시위를 나가는 대학생은 점차 줄어들었다. 대학생이 주로 사회에 참여하는 경로였던 학내자치단체도 찾아보기 힘들게 됐다. 이러한 시대의 흐름에 따라 과거 투쟁적 성격을 갖던 서강학보도 여러 변화를 시도하게 된다.

2000년대 기자들의 주된 고민은 급변하는 시대의 흐름 속에서 ‘자주언론’이라는 기치를 가진 대학언론이 추구해야 할 방향성에 대한 것이었다. 서강학보는 국가보안법, 비정규직 문제, 등록금 문제 등 사회적 사안을 학내 문제와 결부시켜 학우들의 관심을 끄는 것을 꾀했다. 2006년에 들어서면서 한국 사회의 큰 화두는 단연 ‘된장녀’와 ‘FTA’였다. 커피전문점에서 노트북을 앞에 두고 커피를 마시는 여성을 풍자하는 된장녀 신드롬을 기점으로 대학생의 문화가 상업화 됐고 서강학보는 이를 앞장서 비판했다. 또한 FTA와 스크린쿼터라는 기획기사를 심도있게 다루는 동시에 기자가 직접 집회에 참여하면서 FTA를 반대하는 목소리에 동참하기도 했다. 2005년 11월 21일자엔 500호가 발간돼 서강학보가 자주언론의 기수로서 역할을 꾸준히 해왔음을 보여줬다. 

갈수록 줄어드는 기자 수와 구조적 어려움 때문에 결국 서강학보는 2001년부터 주간 발행을 접고 격주로 신문을 내기 시작한다. 이와 함께 기자들은 인쇄매체에 무관심한 독자들에게 다가가기 위한 노력도 기울였다. 2005년엔 본보만의 배포대와 홈페이지를 제작해 학보의 대중화를 꾀하는 동시에 학내 구성원들과의 보다 나은 소통을 시도했다. 서강학보 50주년을 맞은 2010년에는 본보의 판형이 대판에서 베를리너판으로 바뀌고 면수 또한 12면으로 늘어나 학우들의 좋은 반응을 이끌어냈다.

2008년부터는 사진촬영방식이 필름카메라에서 디지털카메라로 바뀌었고 사진의 보관이 보다 간편해져 학보사는 기록보존소와 더불어 학내 가장 많은 사진자료를 구축할 수 있게 됐다. 비록 세상은 급격하게 변했지만 기자들은 현재까지 ‘그대 흘린 땀이 세상을 이기리라’는 기치 아래 자주언론의 역할을 꾸준히 수행해나가는 한편, 학우들과의 보다 활발한 소통을 위해 고민 중에 있다.   구민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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