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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학과동문 유적답사, 놀라워라 부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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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3-05-15 09:11 조회18,234회 댓글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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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석사(浮石寺) 무량수전 배흘림 기둥에 기대서서 멀리 소백산 능선을 바라보았습니다. 일망무제(一望無際)! 풍광은, 듣던 대로 장관이었습니다.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이 문화유산답사기에 쓴 대로 ‘장엄’했습니다.

 

태백산맥 연봉들이 남쪽으로 치달리는 산세가 쫙 펼쳐지는 것도 놀라웠지만, 도력(道力) 높은 산사(山寺)가 정원처럼 품은 것이 더 장관이었습니다. 해발 1000m가 넘는 국망봉(1421m), 비로봉(1439m), 연화봉(1383m), 도솔봉(1314m)이 한눈에 들어왔고, 새벽에 내린 진눈깨비가 준령의 9부 능선 위를 온통 하얗게 분칠했기에, 산밑 꽃사태와 설산(雪山)으로 변한 산마루의 대비가 이채로웠습니다.

 

이처럼, 천년 고찰(古刹)의 아우라가 확연한 부석사 답사는 4월 20~21일 이뤄졌습니다. 학창시절 전국의 문화유적을 찾아다닌 사학과 전통을 졸업 뒤에도 이어온 ‘2013 봄 답사 - 경상북도 영주, 충청북도 제천’ 편(篇)이 펼쳐졌습니다. 최병찬(73 사학) 동문부부를 비롯한 20여명의 동문과 가족들이, 중부내륙을 찾아 1박2일 동락(同樂)하며 문화유적에서 뿜어 나오는 문향(文香)에 흠뻑 취했습니다.

 

첫째날 – 부석사의 감흥, 소수서원의 문자향 서권기

첫날 최윤식(85 사학) 동문이 마련한 마이크로버스를 타고, 아침 일찍 동문회관에서 출발했습니다. 충북 박달재를 넘자 띄엄띄엄 내리는 비는 진눈깨비로 변했습니다. 노란 개나리꽃, 하얀 벚꽃, 보라색의 진달래꽃 위로 흰눈이 쌓이고 산마루가 새하얗게 변해 가는데, 아! 여기가 신설들이 사는 선계(仙界)인가 싶었습니다.

 

첫 답사처 경상북도 영주시 부석사 밑 사하촌에 도착한 때는 점심이 다 됐을 때였습니다. 25년 전, 학창시절 들렀던 산채비빔밥 집(평화식당)을 다시 찾아 옛일을 회고하며 주인아주머니와 재회의 기쁨을 나눴습니다.

 

불혹과 지천명의 나이에 부석사를 다시 찾은 감격에 술 생각이 절로 났습니다. 파전에 동동주 반주가 빠질 리 없었겠죠. 이팔청춘 팔팔했을 때와 달라 술심을 빌어볼 요량도 있었을 겁니다. 이창섭(84 국문)-마유미(84 사회) 동문부부는 “죽기 전에 해야 할 일 100가지 중에 부석사 방문이 있었는데, 나이 50줄을 앞두고서야 처음 찾은 감회가 남다르다”며 조바심을 냈습니다.

 

남한 땅 5대 명찰(名刹)에 속하는 부석사는 가파른 봉황산 중턱에 터 잡은 ‘위대한 건축’ 자체였습니다. 건축학을 전공하는 사람들의 필수 순례코스일 만큼 건축적 짜임새, 가람배치가 일품이었습니다.

 

박물관 학예사를 지낸 박찬희(88 사학) 동문의 친절한 해설은, 부석사로 오르는 진입로 은행나무 길부터 진가를 발휘했습니다. △일주문 지나 절 입구 왼편에 우뚝 선 당간지주(幢竿支柱) △천왕문, 범종루(梵鐘樓)와 이어지는 돌계단 △돌축대 대석단 △안양루(安養樓) △맞배지붕 주심포 양식으로 지은 무량수전(無量壽殿) △2개의 삼층석탑 등등 어느 것 하나 소홀히 지나칠 수 없게 붙잡았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탄성을 부르는 무량수전의 추녀 곡선 △무량수전 앞 석등과 배흘림 기둥의 예술성 △무량수전에 모신 아미타여래불(佛)이 남쪽 아닌 동쪽을 바라보는 까닭 △물에 뜨는 돌(浮石) 전설과 선묘각(善妙閣)의 여인초상화 △자인당(慈忍堂)과 조사당(祖師堂)에 얽힌 전설과 설화가 구수하게 이어졌습니다. 그의 해박한 설명은 유불선(儒佛仙), 통일신라와 고려사(史), 불교문화, 건축조형, 문헌과 구전(口傳)을 종횡으로 넘나들며, 부석사에 관한 입체적 이해를 도왔습니다.

 

특히 당간지주와 석등을 기품 있게 조각한 석공의 솜씨를 칭찬하고, 의상대사를 애모하다 바다에 몸을 던져 용이 된 중국여인 선묘 아가씨를 언급하며 선묘의 초상화가 봉안된 선묘각으로 일행을 인도할 때는, 내공 깊은 문화해설사의 ‘인간미’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박 동문은 “화엄사상을 창시한 의상대사가 강조한 것은, 일즉다(一卽多), 다즉일(多卽一)”이라며 “너와 나는 다르지 않다. 구별 짓고 가르고 차별하지 말라는 가르침”이라고 설명했습니다.

 

부석사에 압도당했지만, 마냥 머무를 수 없었습니다. 하산의 발걸음이 못내 아쉽지만, 해가 지기 전 다음 코스인 소수서원(紹修書院)을 찾아가야 했습니다.

 

소수서원은, 우리나라 최초의 사액서원으로 조선 중종 38년(1543년)에 건립한 백운동 서원에서 비롯됐습니다. 퇴계 이황 선생이 풍기군수로 부임하면서 조정에 건의해 ‘소수서원’이라는 사액(賜額)을 받은 것입니다. 임금이 사당, 서원 등에 이름을 지어서 그것을 새긴 액자(이름하여 扁額)를 내린 것입니다. 지금의 지방국립대학이 셈이죠.

 

일행을 깜짝 놀라게 한 것은 소수서원 입구에 조성한 소나무숲이었습니다. 수백년은 족히 됐을 법한 고목인데 기품 당당한 거목으로 자라 서원을 지키고 서 있었습니다. 서양의 대학이 역사와 전통을 돌로 쌓은 건물에서 찾는다면, 목조 건물로 학당(學堂), 학사(學舍)을 지은 우리는 노거수(老巨樹) 군락에서 그것을 찾을 수 있겠다 싶었습니다. 나무 밑동에서 하늘을 향해 지켜 찍은, 용틀임하는 노송의 자태가 웅혼했습니다.

 

자료를 보니, 학자수림(學者樹林)으로 부른다 합니다. 겨울을 이겨내는 소나무처럼 인생의 어려움을 이겨내는 선비가 되라는 뜻에서, 겉과 속이 붉은 적송(赤松) 수백그루를 심어 조성했습니다.

 

일행은 유생들이 공부하던 강학당(講學堂), 학구재(學求齋), 지락재(至樂齋), 일신재(日新齋)와 대학도서관인 장서각(藏書閣)을 꼼꼼히 들여다보았지만, 마음은 콩밭에 가 있었습니다. 분명 서원 주변에 유생들이 몰래 풍류를 즐기던 숨은 명소가 있을 텐데 하면서 찾기 시작했습니다.

 

소수서원을 감싸고 흐르는 죽계천(竹溪川) 주변에 해답이 있었습니다. 죽계교와 백운교(白雲橋)로 계천을 건너 서원 반대편 물가에 이르자, 취흥을 부르듯 이름도 기묘한 취한대(翠寒臺)가 나타났습니다. 물론 취한대는 취(醉) 자와 무관한 ‘반듯한’ 장소였습니다. 이황 선생이 이름 지은 정자로, ‘푸른 연화산의 산기운과 맑은 죽계의 시원한 물빛에 취하여 시를 짓고 풍류를 즐긴다’는 뜻입니다. 송취한계(松翠寒溪)에서 따왔다고 합니다.

 

이곳에서 죽계천 넘어 소수서원의 경관을 보자, 진경산수화를 보듯 멋스러웠습니다. 노고산 언덕에서 학기말 시험을 끝내고 ‘진인사 대천명’을 외치면서 시원하게 들이킨 술맛을 떠오르게 할 만한 장소였습니다. 학업에 지친 후학들의 머리를 식혀주려는 ‘선배들의 내리사랑’이 담긴 숨은 명소 아닐까,라고 지레짐작해도 괜찮다 싶었습니다.  

 

첫날 저녁 만찬은, 경북 영주에서 충북 충주까지 내달려 먹은 송어회였습니다. 제천의 맛집으로 유명한 송어골에서 먹은 선홍빛 송어회는 입에서 사르르 녹는 감칠맛이 일품인 천상의 음식이었습니다, 부석사, 소수서원에서 문자향(文字香) 서권기(書卷氣)에 취해 지식은 풍족했지만, 시장기를 호소하는 배꼽시계를 속일 순 없었습니다. 마파람에 게눈 감추듯, 소주를 곁들여 뚝딱 해치우고 매운탕으로 뒷풀이를 했습니다.

 

저녁자리에 반가운 얼굴들이 합류했습니다. 주말에도 회삿일로 바쁜 이정수(81 사학)-서경미 부부가 후배들이 보고 싶어 먼 길을 한달음에 달려왔습니다. 강원도 평창 계곡에서 백봉(白鳳) 오골계를 기르며 ‘닭치는 농부’(www.silky.kr)로 유명한 김정기(84 사학) 동문은 일찌감치 도착해, 일행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술잔이 오가는 속도가 곱절로 빨라지면서 밀린 이야기보따리가 풀렸습니다. 하루일과를 보람차게 마친 군인처럼 다들 씩씩했고, 봇물 터지듯 거침없고 왁자지껄한 분위기는 갈수록 흥겨웠습니다.

 

숙소는 충주호 선착장 부근에 자리한 기업은행 연수원이었습니다. 충주호 주변을 감싸도는 도로에서 야간 벚꽃구경을 하면서 도착한 연수원은 A급 숙소였습니다. 다들 놀라며 “이번 답사가 갑자기 럭셔리해졌다”고 야단이 났습니다. 최병찬 동문이, 동기동창 연수원장에게 특별히 부탁해 최상의 잠자리를 마련했습니다.

 

일행은 지하 대형노래방에 모여 맥주, 소주, 백세주를 반주로 이야기꽃을 피웠습니다. 대형노래방은 군무(群舞)를 출 정도로 엄청 넓었습니다만 노래보다는 이야기에 열중했습니다. 취중진담이라더니, 할 얘기가 쏟아지면서 숙소로 이어진 술자리는 새벽까지 계속됐습니다. 궂은일을 도맡으며 수고를 마다한 조경식(88 사학) 동문의 말대로, 94년 시작한 답사모임이 내년이면 햇수로 20년이 된다더니 서로의 안부를 묻고, 자녀교육을 상의하고, 세상일과 살림살이를 걱정하는 선후배 모습이 마치 가족 같았습니다. ‘학창시절 4년 + 답사 19년’의 오랜 동행이, 서로에게 다정다감한 밑천인 듯했습니다.


둘째날 – 사자빈신사 옛 절터에서 청자 파편을 찾다

속풀이에는 올뱅이(올갱이, 다슬기) 해장국이 최고였습니다. 새벽까지 이어진 통음을 해장하려 충주시에서 유명한 향토음식 전문점 운정식당을 부러 찾아갔습니다. 간밤의 술기운이 한순간에 날아가고 속이 편해지자 또 술 생각이 났습니다. 백세주 몇 병이 금새 비워졌습니다.

 

둘째 날 첫 답사는 충북 제천 월악산 동쪽 자락의 신륵사(神勒寺)였습니다. 경기도 여주의 신륵사가 더 유명하지만, 월악산 준령을 뒷배로 골짜기 좁은 평지에 자리잡은 고찰도 멋졌습니다. 인적이 없다보니 사방이 고즈넉했습니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 건물인 극락전 △탑 꼭대기에 찰주가 뾰족하게 꽂힌 삼층석탑 등 가람배치는 단순했지만 고졸(古拙)한 멋을 풍겼습니다.

 

이어 월악산의 남서쪽 자락에 위치한 충북 충주 미륵대원으로 방향을 틀었습니다. 도중에 제천 10경(景) 중 6, 7경에 해당하는 용하구곡(用夏九曲), 송계계곡(松界溪谷)을 굽이굽이 드라이브하면서 기암괴석, 폭포, 벚꽃 길을 한없이 관광했습니다.

 

목적지인 미륵대원(彌勒大院)은 미륵리 옛 절터(彌勒里 寺址)를 발굴하는 과정에서 전모가 드러난 고려시대 원(院)입니다. 거대한 미륵석불(石佛)이 우뚝 서 있는 것도 놀라웠지만, 특이하게도 북쪽을 향해 서 있었습니다. 대원사 가람배치 자체가 북향인 것입니다. 

 

더욱이 석불입상 주변을, 경주 석굴암처럼 석굴식(石窟式) 법당으로 빙둘러 쌓은 것이 특이했습니다. 그러다 언젠가 화재로 석불을 실내에 둔 거대한 목조 건축물이 불에 타고 석불과 석축만 남아 밖으로 드러난 것입니다. 해외여행을 다녀본 사람은 인도차이나 앙코르와트를 연상할 만하고, 어린이라면 놀이동산의 어드벤처 코너를 떠올릴 외양을 띠었습니다.

 

답사팀의 마지막 코스는 역시 페사지(廢寺址)였습니다. 2년 전 경기도 고달사지(高達寺址)를 답사하면서 느낀 폐사지 문화유적의 진면목을 이번에도 어김없이 맛볼 수 있었습니다. 이름하여 사자빈신사지(獅子頻迅寺址)와 그 절터에 남아 있는 사사자(四獅子) 구층석탑입니다. 사자빈신은 화엄경에 등장하는 인물로 '깨달음을 얻은 사람'을 뜻합니다. 이 절터는 아직까지 풀리지 않는 의문점이 많지만, 연구를 거듭할수록 화엄경에 근거해서 세운 절임이 분명해지고 있습니다.

 

높이 4.5m의 화강암 석탑은, 고려시대 것으로 원래 9층이었으나 현재 옥신(屋身)은 5층까지, 옥개석(屋蓋石)은 4층까지만 남아 있었습니다. 가장 큰 특색은, 탑의 상층기단부에 사자 4마리를 배치해 탑신(塔身)을 받치고 있는 특이한 모습과 한 가운데에 불상을 모셔 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불상이, 머리에 두건을 썼고 뒷머리에 나비매듭까지 묶었습니다.

 

박찬희 동문은 “지금까지 알려진 불상 중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모습이었기에, 지장보살, 비로자나불, 승가대사상 또는 부처가 아닌 나한 등 여러 가지로 추청됐지만 속시원하게 밝혀진 바는 없다”고 설명했습니다. 그러면서 최신 연구논문을 인용해 “화엄경에는 선재동자(善財童子, 求道하는 보살)가 깨달음을 얻고자 사자빈신 비구니를 만난 이야기가 나오는데, 이 승려일 가능성이 높다는 분석이 있다”면서 “고려시대에는 사자빈신 비구니가 두건을 썼기 때문”이라고 덧붙였습니다.

선재동자는 고려시대 불화(佛畵) '수월관음도'에도 나옵니다. 관음보살을 그린 수월관음도 왼쪽 아래에는 무릎을 꿇은 채 합장한 선재동자가 그러져 있습니다. 이것을 보면, 선재동자가 깨달음을 얻고자 사자빈신 뿐만 아니라 수월관음과도 조우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박 동문은 또 “이 절터는 도자기 역사를 연구하는 데 중요한 유적”이라며 “이유는 도자기를 구웠던 폐요(廢窯) 위에 탑을 세웠기 때문”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청자 파편이 간혹 발굴된다는 설명을 덧붙이자, 일행은 갑자기 유적공부를 멈추고 탑 주변을 샅샅이 살피기 시작했습니다. ‘고려시대 청자 파편이라도 손아귀에’ 하는 욕심이 생동했습니다.

 

탑 설명을 보충하자면, 하층기단 정면에 79자의 해서체 글자가 새겨있어 1022년 고려 현종 13년에 건립된 것을 정확히 알 수 있습니다. ‘몹쓸 적들이 아주 물러갈 것을 기원하면서 월악산 사자빈신사에 구층석탑을 세운다’는 내용이 적혀 있는 것으로 보아, 불력(佛力)으로 거란족 침탈을 막아 태평안민을 기원한 것으로 보입니다.

 

답사를 마친 일행은 절터 앞 계곡의 너럭바위에 모여 앉아 계곡물에 발을 담그며 도란도란 얘기를 나눴습니다. 아이들은 고여 있는 계곡물 양지 바른 곳에 모여 꼬물꼬물 대는 올챙이를 잡으며 함박웃음을 지었습니다.

 

남은 술을 마저 비우다보니 어느덧 해가 서쪽 수안보 고개마루로 기울어 가고 있었습니다. 아쉽지만 ‘특별한 추억’을 공유했다는 기쁨을 간직한 채 서둘러 상경 채비에 들어갔습니다. 귀경버스에는 고단한 숨소리가 가득했습니다. 애주가 정조임금이 ‘무취불귀(無醉不歸, 취하지 않으면 귀가하지 않겠다)’라 했거늘, 서강대 사학도답게 역사에 충실했습니다.


<부석사 안양루 밑의 돌축대, 대석단>


<안양루 현판 글씨>


<무량수전 앞에서 해설에 열중인 박찬희(88 사학) 동문>


<물에 뜨인 돌, 부석(浮石) 글자가 새겨진 전설의 바위>


<자인당(慈忍堂) 안에 모신 불상>


<취한대(翠寒臺) 구경을 마치고 징검다리를 이용해 죽계천(竹溪川) 건너 소수서원 정문 쪽으로 이동하는 일행>




<학자수림(學者樹林)에서 수백년 넘은 적송(赤松)을 밑동에서 지켜 찍은 모습>


<월악산 동쪽자락 신륵사의 극락전 모습>


<미륵대원 초입에 있는 거북조각상을 보는 일행>


<북쪽을 향해 우뚝 서 있는 거대한 미륵석불>


<미륵대원지 석등과 오층석탑>




<이번 답사의 피날레, 사자빈신사지 구층석탑>


<석탑 한 가운데 머리에 두건을 쓰고 뒷머리에 나비매듭까지 묶은, 특이한 불상>


<멀리서 찍은 사자빈산사지와 석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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