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기억하는 명강의]이한조 철학과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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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3-03-25 16:40 조회16,619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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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조선생님의 강의는 마약과도 같고 새로운 종교와도 같아서 한번 들으면 끊을래야 끊을 수가 없었다. 선생님은 보통 심리철학, 논리학, 인식론, 영미철학, 과학철학 등등을 학부에서 가르치시고 대학원과목도 유사한 과목을 좀 더 심도있게 가르치셨다. 이러한 과목을 다시 개설하더라도 그 내용에는 항상 조금씩 다른 것이 있었다. 교수님께서는 어떤 강의 교재를 보고 읽는 것이 아니라 머릿속에 미리 준비한 내용을 상황에 맞추어 적절하게 운용하시곤 하셨다.
뭐가 그렇게 부끄러우셨는지 강의시간에는 항상 칠판을 보시면서 진행하시고 또 칠판 위에다 부지런히 써가시면서 강의를 하셨다. 물론 학생들의 질문은 언제라도 환영하였다. 그럴 참이면 가만히 그리고 천천히 뒤를 돌아서서 학생을 자세히 보시고는 차근차근 대답을 하여 주셨다. 항상 조용하고 나즈막한 목소리로 강의를 하셨다. 이러한 모습은 학생들 서너명이 경청하는 가운데 자신의 혁신적인 논리학을 수줍게 강의하였던 독일의 저 유명한 고틀로프 프레게를 연상시킨다.
그러나 교수님은 또한 항상 성실함의 전형을 보여주시기도 하셨다. 강의는 항상 정시에 시작하고 정시에 끝났으며 그 가운데 언제나 최선을 다하셨다. 한번은 존 듀우이가 90세가 넘어서까지 고군분투하며 작업하는 자세를 구구절절이 칭찬하시곤 하셨다. 또 하루는 최루탄이 자욱하여 수업에 지장이 갈 정도로 어려운 경우도 있었다. 그러면 선생님께서는 손수건을 꺼내어 코와 입을 틀어막으면서 강의를 계속 하시곤 하셨다. 그리고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여러분 힘드시지만 집중하시면 어느 정도의 고통은 이겨내실 수 있습니다. 집중해 주세요”라고. 수업은 물론 계속 진행되었다.
선생님의 업적과 역량은 서강철학의 현금 지위와 상황에서 평가되어서는 아니되며 먼 훗날을 바라보는 안목에서 평가되고 기약되어야 될 것이다. 80년대 초에 참으로 암울하고 어두웠던 정치적 상황하에서 선생님의 강의는 크나큰 위로가 되었다. 우리들은 선생님의 강의실에서 행복할 수 있었다. 시지프스의 서강 언덕은 이제 우주의 중심이 되었던 것이다. 적어도 그 당시 우리들에게는. 가끔 선생님 사무실을 방문하거나 또 연초에 세배를 드리러 댁을 방문하면 때때로 손과 손목이 아프다고 하셨다. 쓰고 계시는 논문의 양이 많고 또 교정할 부분이 많기 때문이란다. 물론 이러한 논문은 한번도 발표된 적이 없었던 것으로 안다. 그것은 어떠한 내용이었을까? 어디엔가 이 육필 원고는 있을 것이다. 아니, 없어도 상관없겠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 마음에 남아 있을테니까.
이 당시 나는 또 길희성 교수님이나 김승혜 교수님과 같은 동양종교학 대가들의 강의에 매료되어 열심히 진력하고 있기도 했었다. 그러나 이한조 선생님의 강의는 결코 내가 철학을 배반하도록 놓아두지 않았다. 선생님께서는 영미철학의 분석적 사고를 중시하시면서도 독일출신 칸트의 세계관과 안목을 높이 평가하는 철학자이셨다. 그러나 또한 자신의 철학을 스스로 살려는 철인이기도 하셨다. 이런 의미에서 선생님의 학문은 저 고대 그리스의 ‘삶의 철학’을 여실히 보여주기도 한다. 지금도 나즈막한 목소리로 그러나 전광석화와도 같고 우뢰와도 같은 통찰로 가득한 선생님의 강의가 눈에 선하다.
오늘날 많은 철학도들이 모임중 취기가 돌면 동서고금의 태두들이나 기라성같은 저작들을 읍조리기도 하지만 이런 것들이 다 무슨 소용일까? 히말라야 산중의 험곡준령과도 같은 선생님 강의의 뒷발꿈치보다도 못한 것들을...
김한라(83 철학) 미국 네브라스카대학교 철학&종교학과 교수
이한조 교수는 누구인가
이한조(89세) 철학과 명예교수는 서울대학교에서 철학을 전공하고 미국 미네소타대학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1968년 서강에 부임해 1989년 퇴임하기까지 21년 동안 모교에서 후학을 양성했다. 철학과 학과장과 철학연구소장을 역임했다.
뭐가 그렇게 부끄러우셨는지 강의시간에는 항상 칠판을 보시면서 진행하시고 또 칠판 위에다 부지런히 써가시면서 강의를 하셨다. 물론 학생들의 질문은 언제라도 환영하였다. 그럴 참이면 가만히 그리고 천천히 뒤를 돌아서서 학생을 자세히 보시고는 차근차근 대답을 하여 주셨다. 항상 조용하고 나즈막한 목소리로 강의를 하셨다. 이러한 모습은 학생들 서너명이 경청하는 가운데 자신의 혁신적인 논리학을 수줍게 강의하였던 독일의 저 유명한 고틀로프 프레게를 연상시킨다.
그러나 교수님은 또한 항상 성실함의 전형을 보여주시기도 하셨다. 강의는 항상 정시에 시작하고 정시에 끝났으며 그 가운데 언제나 최선을 다하셨다. 한번은 존 듀우이가 90세가 넘어서까지 고군분투하며 작업하는 자세를 구구절절이 칭찬하시곤 하셨다. 또 하루는 최루탄이 자욱하여 수업에 지장이 갈 정도로 어려운 경우도 있었다. 그러면 선생님께서는 손수건을 꺼내어 코와 입을 틀어막으면서 강의를 계속 하시곤 하셨다. 그리고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여러분 힘드시지만 집중하시면 어느 정도의 고통은 이겨내실 수 있습니다. 집중해 주세요”라고. 수업은 물론 계속 진행되었다.
선생님의 업적과 역량은 서강철학의 현금 지위와 상황에서 평가되어서는 아니되며 먼 훗날을 바라보는 안목에서 평가되고 기약되어야 될 것이다. 80년대 초에 참으로 암울하고 어두웠던 정치적 상황하에서 선생님의 강의는 크나큰 위로가 되었다. 우리들은 선생님의 강의실에서 행복할 수 있었다. 시지프스의 서강 언덕은 이제 우주의 중심이 되었던 것이다. 적어도 그 당시 우리들에게는. 가끔 선생님 사무실을 방문하거나 또 연초에 세배를 드리러 댁을 방문하면 때때로 손과 손목이 아프다고 하셨다. 쓰고 계시는 논문의 양이 많고 또 교정할 부분이 많기 때문이란다. 물론 이러한 논문은 한번도 발표된 적이 없었던 것으로 안다. 그것은 어떠한 내용이었을까? 어디엔가 이 육필 원고는 있을 것이다. 아니, 없어도 상관없겠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 마음에 남아 있을테니까.
이 당시 나는 또 길희성 교수님이나 김승혜 교수님과 같은 동양종교학 대가들의 강의에 매료되어 열심히 진력하고 있기도 했었다. 그러나 이한조 선생님의 강의는 결코 내가 철학을 배반하도록 놓아두지 않았다. 선생님께서는 영미철학의 분석적 사고를 중시하시면서도 독일출신 칸트의 세계관과 안목을 높이 평가하는 철학자이셨다. 그러나 또한 자신의 철학을 스스로 살려는 철인이기도 하셨다. 이런 의미에서 선생님의 학문은 저 고대 그리스의 ‘삶의 철학’을 여실히 보여주기도 한다. 지금도 나즈막한 목소리로 그러나 전광석화와도 같고 우뢰와도 같은 통찰로 가득한 선생님의 강의가 눈에 선하다.
오늘날 많은 철학도들이 모임중 취기가 돌면 동서고금의 태두들이나 기라성같은 저작들을 읍조리기도 하지만 이런 것들이 다 무슨 소용일까? 히말라야 산중의 험곡준령과도 같은 선생님 강의의 뒷발꿈치보다도 못한 것들을...
김한라(83 철학) 미국 네브라스카대학교 철학&종교학과 교수
이한조 교수는 누구인가
이한조(89세) 철학과 명예교수는 서울대학교에서 철학을 전공하고 미국 미네소타대학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1968년 서강에 부임해 1989년 퇴임하기까지 21년 동안 모교에서 후학을 양성했다. 철학과 학과장과 철학연구소장을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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