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윤심(75 철학) 글라라 장학금 기탁자
페이지 정보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2-12-14 17:41 조회10,370회 댓글0건관련링크
본문
“형편 어려워 학업중단 있을 수 없는 일”
김윤심(75 철학) 동문을 보면 ‘엄마’가 떠오른다. 먼 훗날 자신이 사라지더라도 세상에 남겨질 자식을 위해 마지막 순간까지 기도하는 엄마 말이다. 엄마 눈으로 바라보고, 엄마 마음으로 후배들의 학업을 돌봐온 ‘글라라 장학금’이 내년이면 10주년을 맞는다. 그 동안 김동문이 기탁한 장학금 2억 4480만원은 장학생 62명에게 소중한 희망으로 피어났다.
맨 처음 김 동문이 장학금을 기부하게 된 계기는 단순했다. 김 동문의 자제가 대학생이 되었을 때 장학금을 받았는데, 이에 대한 보답으로 모교 후배를 위한 장학금을 내자고 마음먹었다.
신청서 읽다 보면 새롭게 각오 다지게 돼
“2003년 당시 총동문회 사무국장이셨던 김미자(64 국문) 선배님께서 기명 장학금으로 운영되던 호상장학금 이야기를 해주셨어요. 장학금을 오래 유지할 겸 명칭을 정하는 게 어떠냐는 제안에 제 가톨릭 세례명인 ‘글라라’로 장학금 이름을 정했죠. 당시 일을 너무 크게 벌이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 망설였지만, 지금 생각하면 아주 잘한 일이었어요.”
김 동문에게 이름을 건 장학금은 책임을 의미했다. ‘글라라 장학금’을 자기 자신과의 약속이라고 여기며, 매달 적게는 80만원에서 많게는 1500만원에 이르기까지 일정 금액을 동문장학회에 기탁했을 정도다.
“기부는 제가 삶을 더 열심히 살게 된 계기가 됐어요. 힘든 상황에서도 치열하게 살아가는 후배들의 장학금 신청서를 읽으면서, 후배를 더 많이 돕기 위해 저도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마음을 먹곤 했죠.”
모교에서 받은 교육이 자신의 철학 및 인격형성에 가장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는 김 동문은 대학교 3학년 때 이한택 신부님이 지도한 신학강의 시간이 기억 남는다고 전했다. 수업시간이 아직 기억 남는다는 김 동문은 “하느님은 절대로 나에게 주어진 부를 나만을 위해 쓰라고 하지 않으셨어요. 분명히 되돌려야 하고, 나눠야 한다고 생각해요”라고 말했다.
자발적 동참 후배들 기특하고 고마워
김 동문이 특별히 동문 후배들에게 애정을 기울이는 까닭이 있다. “가정 형편이 어려운 상황에서도 우리 학교에 들어올 정도면 굉장히 우수한 아이들인 셈이죠. 이렇게 우수한 아이들을 우리 선배들이 조금씩만 도와주면,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에 첫 발을 내딛을 수 있어요. 돈이 없다는 이유로 젊은이들이 학업을 중단해야 한다면 그보다 더 안타까운 일이 어디 있나요.”
장학생들이 무사히 졸업해 사회에 자리 잡았다는 이야기를 전해들을 때 기부자로서 가장 뿌듯하다는 김 동문에게 요즘 가슴 벅찰 일이 새로 생겼다. 김 동문 덕분에 무사히 사회에 진출한 장학생들이 김 동문의 뜻에 동참해 ‘글라라 장학금’ 이름으로 십시일반 모금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자발적으로 장학금 모금에 동참해준 후배들이 기특하고 고맙지요. 나누는 것 이상으로 받는 것이 없어요. 이렇게 제가 도울 수 있는 것 자체가 감사합니다. 인생에서 결국 남는건, 다른 사람과 나누는 것 밖에 없는 것 같아요.”
김 동문은 ‘글라라 장학금’으로 인연 맺은 장학생들과 매년 3월과 11월 정기모임을 두차례 갖는다. 단순히 장학금만 주는 게 아니라 장학생들에게 ‘관계’를 만들어주기 위해서다.
든든한 외조, 남편에게 감사
“우리가 학교 다닐 때는 선후배 동료끼리 서로 알고 친했지만, 요즘 아이들은 그럴 기회 가 별로 없는 것 같아요. 관계가 없으면 외로워져요. 제가 없더라도 후배들끼리 돈독한 관계를 맺고 서로 도움을 주고받을 수 있길 바랍니다.”
후배들에게 엄마 같은 김 동문에게 나눔이란 어떤 의미일까? “어느 종교나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것은 ‘사랑의 실천’이라고 생각해요. 사랑을 실천하는 방법은 배려와 나눔일 것이고요. 인생을 이만큼 살고 보니, 그동안 살아온 과정을 돌아보게 되더라구요. 나만 위하며 살기엔 너무 아까운 인생 아닌가요?”
김 동문은 인터뷰 끝에 감사인사를 꼭 전해야 할 사람이 있다고 신신 당부했다. “긴 세월 동안 장학금이 유지될 수 있도록 힘을 준 남편 안영민(사도 요한)에게 감사인사를 전합니다. 남편이 없었다면 ‘글라라 장학금’의 지금은 없었어요.”
글=정영미(02 사학) 기자
사진=김성중(01 신방) 기자
<2011년 3월 21일 열린 첫번째 글라라 장학생 모임>
김윤심(75 철학) 동문을 보면 ‘엄마’가 떠오른다. 먼 훗날 자신이 사라지더라도 세상에 남겨질 자식을 위해 마지막 순간까지 기도하는 엄마 말이다. 엄마 눈으로 바라보고, 엄마 마음으로 후배들의 학업을 돌봐온 ‘글라라 장학금’이 내년이면 10주년을 맞는다. 그 동안 김동문이 기탁한 장학금 2억 4480만원은 장학생 62명에게 소중한 희망으로 피어났다.
맨 처음 김 동문이 장학금을 기부하게 된 계기는 단순했다. 김 동문의 자제가 대학생이 되었을 때 장학금을 받았는데, 이에 대한 보답으로 모교 후배를 위한 장학금을 내자고 마음먹었다.
신청서 읽다 보면 새롭게 각오 다지게 돼
“2003년 당시 총동문회 사무국장이셨던 김미자(64 국문) 선배님께서 기명 장학금으로 운영되던 호상장학금 이야기를 해주셨어요. 장학금을 오래 유지할 겸 명칭을 정하는 게 어떠냐는 제안에 제 가톨릭 세례명인 ‘글라라’로 장학금 이름을 정했죠. 당시 일을 너무 크게 벌이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 망설였지만, 지금 생각하면 아주 잘한 일이었어요.”
김 동문에게 이름을 건 장학금은 책임을 의미했다. ‘글라라 장학금’을 자기 자신과의 약속이라고 여기며, 매달 적게는 80만원에서 많게는 1500만원에 이르기까지 일정 금액을 동문장학회에 기탁했을 정도다.
“기부는 제가 삶을 더 열심히 살게 된 계기가 됐어요. 힘든 상황에서도 치열하게 살아가는 후배들의 장학금 신청서를 읽으면서, 후배를 더 많이 돕기 위해 저도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마음을 먹곤 했죠.”
모교에서 받은 교육이 자신의 철학 및 인격형성에 가장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는 김 동문은 대학교 3학년 때 이한택 신부님이 지도한 신학강의 시간이 기억 남는다고 전했다. 수업시간이 아직 기억 남는다는 김 동문은 “하느님은 절대로 나에게 주어진 부를 나만을 위해 쓰라고 하지 않으셨어요. 분명히 되돌려야 하고, 나눠야 한다고 생각해요”라고 말했다.
자발적 동참 후배들 기특하고 고마워
김 동문이 특별히 동문 후배들에게 애정을 기울이는 까닭이 있다. “가정 형편이 어려운 상황에서도 우리 학교에 들어올 정도면 굉장히 우수한 아이들인 셈이죠. 이렇게 우수한 아이들을 우리 선배들이 조금씩만 도와주면,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에 첫 발을 내딛을 수 있어요. 돈이 없다는 이유로 젊은이들이 학업을 중단해야 한다면 그보다 더 안타까운 일이 어디 있나요.”
장학생들이 무사히 졸업해 사회에 자리 잡았다는 이야기를 전해들을 때 기부자로서 가장 뿌듯하다는 김 동문에게 요즘 가슴 벅찰 일이 새로 생겼다. 김 동문 덕분에 무사히 사회에 진출한 장학생들이 김 동문의 뜻에 동참해 ‘글라라 장학금’ 이름으로 십시일반 모금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자발적으로 장학금 모금에 동참해준 후배들이 기특하고 고맙지요. 나누는 것 이상으로 받는 것이 없어요. 이렇게 제가 도울 수 있는 것 자체가 감사합니다. 인생에서 결국 남는건, 다른 사람과 나누는 것 밖에 없는 것 같아요.”
김 동문은 ‘글라라 장학금’으로 인연 맺은 장학생들과 매년 3월과 11월 정기모임을 두차례 갖는다. 단순히 장학금만 주는 게 아니라 장학생들에게 ‘관계’를 만들어주기 위해서다.
든든한 외조, 남편에게 감사
“우리가 학교 다닐 때는 선후배 동료끼리 서로 알고 친했지만, 요즘 아이들은 그럴 기회 가 별로 없는 것 같아요. 관계가 없으면 외로워져요. 제가 없더라도 후배들끼리 돈독한 관계를 맺고 서로 도움을 주고받을 수 있길 바랍니다.”
후배들에게 엄마 같은 김 동문에게 나눔이란 어떤 의미일까? “어느 종교나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것은 ‘사랑의 실천’이라고 생각해요. 사랑을 실천하는 방법은 배려와 나눔일 것이고요. 인생을 이만큼 살고 보니, 그동안 살아온 과정을 돌아보게 되더라구요. 나만 위하며 살기엔 너무 아까운 인생 아닌가요?”
김 동문은 인터뷰 끝에 감사인사를 꼭 전해야 할 사람이 있다고 신신 당부했다. “긴 세월 동안 장학금이 유지될 수 있도록 힘을 준 남편 안영민(사도 요한)에게 감사인사를 전합니다. 남편이 없었다면 ‘글라라 장학금’의 지금은 없었어요.”
글=정영미(02 사학) 기자
사진=김성중(01 신방) 기자
<2011년 3월 21일 열린 첫번째 글라라 장학생 모임>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