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기억하는 명강의 -1. 故이근삼 신문방송학과 명예교수 극작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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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2-05-01 14:35 조회10,272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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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강옛집이 새로운 고정란 ‘내가 기억하는 명강의’를 선보입니다. 학문의 질적 탁월성을 추구해 온 모교는 우수한 교수진 덕분에 창의적인 인재를 배출해올 수 있었습니다. 탁월한 자질을 갖춘 은사를 기리고 학문적으로 뛰어난 서강을 되새기기 위한 신규 고정란에 동문 여러분들의 많은 참여 바랍니다. <편집자>
어느 덧 40년을 훌쩍 넘겨버린 故이근삼 교수님과의 첫 만남은 ‘극작법’ 강의 시간이었다. 졸업 이후 영화나 TV 분야에 진출할 때 혹시라도 도움이 될까 하여 신청한 과목이었다. 첫 수업은 아주 짧게 끝났다. 매 시간 과제를 내줄테니 각자 발표 준비를 해 올 것, 학기말 고사는 단막극 1편으로 대신한다는 것, 첫 번째 과제는 신문에서 관심 있는 기사를 찾아내어 간단한 이야기를 구성해올 것 등을 주문하셨다. 고등학교 시절까지 받아왔던 수업과는 전혀 색다른 출발이었다.
며칠 동안 머리를 굴린 끝에 고른 것은 일반 사건기사가 아니라 광고였다. 당시 폼(?) 좀 잡는 애들이나 마시던 술이었던 애플와인 ‘파라다이스’ 광고였다. ‘포도’와인이 아니라 ‘사과’와인이었다. 내가 준비한 이야기는 고민도, 걱정도 없는 파라다이스는 분명 지루할 것이므로 행복에 겨운 주민들이 지루함을 벗어나기 위한 방편으로 슬슬 싸움을 시작한다는 내용이었다. 암울했던 70년대 초반 시절이었기에 나도 모르게 파라다이스를 부정하는 이야기를 하게된 모양이다. 덕분에 그 이야기로 교수님의 호의적인 눈길을 받는 영광을 누리기 시작했다. 물론 교수님 눈길의 성격에 대한 구체적인 물증은 없다, 오직 내 심증만이 있을 뿐이다.
학기 중반이 되니 단막극 등장인물들에 대해 간략히 발표하라셨다. 머리를 쥐어짜다가 상상력이 빈곤함을 깨닫고 내 눈에 모순투성이 인물로 보였던 외할머니를 죄송스럽지만 극중 주인공으로 모셨다. 오래 전에 세상을 떠나신 분이지만 당시 버젓이 생존해계셨던 독실한 불교 신자셨다. 나무관세음 보살. 이윽고 발표 시간이 되어 인물 설명을 다 들으신 교수님이 한마디 하셨다. “이 분 실존 인물이지?”
학기말이 지나고 여름방학도 지났을 때 교수님께서 부르시더니 그 단막극을 손 봐서 신춘문예에 내보라고 하셨다. 내 귀를 의심했지만 결국 내지는 않았었다. 앞으로도 계속 드라마틱한 실존 인물들을 찾아 헤매는 피곤한 삶을 살기가 싫어서였다. 만에 하나 내가 당선이라도 되었다면 어떻게 됐을까? 그러지 않았던 건 한국 극작계를 위해서는 물론 내 자신을 위해서도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다음 시간에는 내가 아플 예정이야”라며 휴강을 예고하시던 교수님이 떠오른다. 정초에 동기들과 세배 드리러 갔을 때 “내 취미는 재떨이 수집이야”하시며 어린 우리들 앞에 재떨이 1개씩 놓아주시고 사용해 보라시던, 그러면서 어른 대접을 해주시던 교수님이 그립다. 이 ‘금연의 시대’에 호랑이 담배피던 ‘흡연의 시대’를 기억해본다.
글= 김철리(73 신방) 서울시극단 단장
故이근삼 교수는 누구인가
故이근삼(1929년~2003년) 신문방송학과 명예교수는 1969년 모교 부임 이후 1994년 정년퇴직할 때까지 25년 동안 서강에서 후학을 양성했다. 부조리연극의 대표적인 작가로서 100여 편의 희곡을 남겼다. 사실주의극이 중심이던 당시 우리나라 극문학에 풍자성을 강조함으로써 주목 받았다. 메리홀 개관을 주도했고, 국민훈장 모란장과 대한민국예술원상을 받았다.
어느 덧 40년을 훌쩍 넘겨버린 故이근삼 교수님과의 첫 만남은 ‘극작법’ 강의 시간이었다. 졸업 이후 영화나 TV 분야에 진출할 때 혹시라도 도움이 될까 하여 신청한 과목이었다. 첫 수업은 아주 짧게 끝났다. 매 시간 과제를 내줄테니 각자 발표 준비를 해 올 것, 학기말 고사는 단막극 1편으로 대신한다는 것, 첫 번째 과제는 신문에서 관심 있는 기사를 찾아내어 간단한 이야기를 구성해올 것 등을 주문하셨다. 고등학교 시절까지 받아왔던 수업과는 전혀 색다른 출발이었다.
며칠 동안 머리를 굴린 끝에 고른 것은 일반 사건기사가 아니라 광고였다. 당시 폼(?) 좀 잡는 애들이나 마시던 술이었던 애플와인 ‘파라다이스’ 광고였다. ‘포도’와인이 아니라 ‘사과’와인이었다. 내가 준비한 이야기는 고민도, 걱정도 없는 파라다이스는 분명 지루할 것이므로 행복에 겨운 주민들이 지루함을 벗어나기 위한 방편으로 슬슬 싸움을 시작한다는 내용이었다. 암울했던 70년대 초반 시절이었기에 나도 모르게 파라다이스를 부정하는 이야기를 하게된 모양이다. 덕분에 그 이야기로 교수님의 호의적인 눈길을 받는 영광을 누리기 시작했다. 물론 교수님 눈길의 성격에 대한 구체적인 물증은 없다, 오직 내 심증만이 있을 뿐이다.
학기 중반이 되니 단막극 등장인물들에 대해 간략히 발표하라셨다. 머리를 쥐어짜다가 상상력이 빈곤함을 깨닫고 내 눈에 모순투성이 인물로 보였던 외할머니를 죄송스럽지만 극중 주인공으로 모셨다. 오래 전에 세상을 떠나신 분이지만 당시 버젓이 생존해계셨던 독실한 불교 신자셨다. 나무관세음 보살. 이윽고 발표 시간이 되어 인물 설명을 다 들으신 교수님이 한마디 하셨다. “이 분 실존 인물이지?”
학기말이 지나고 여름방학도 지났을 때 교수님께서 부르시더니 그 단막극을 손 봐서 신춘문예에 내보라고 하셨다. 내 귀를 의심했지만 결국 내지는 않았었다. 앞으로도 계속 드라마틱한 실존 인물들을 찾아 헤매는 피곤한 삶을 살기가 싫어서였다. 만에 하나 내가 당선이라도 되었다면 어떻게 됐을까? 그러지 않았던 건 한국 극작계를 위해서는 물론 내 자신을 위해서도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다음 시간에는 내가 아플 예정이야”라며 휴강을 예고하시던 교수님이 떠오른다. 정초에 동기들과 세배 드리러 갔을 때 “내 취미는 재떨이 수집이야”하시며 어린 우리들 앞에 재떨이 1개씩 놓아주시고 사용해 보라시던, 그러면서 어른 대접을 해주시던 교수님이 그립다. 이 ‘금연의 시대’에 호랑이 담배피던 ‘흡연의 시대’를 기억해본다.
글= 김철리(73 신방) 서울시극단 단장
故이근삼 교수는 누구인가
故이근삼(1929년~2003년) 신문방송학과 명예교수는 1969년 모교 부임 이후 1994년 정년퇴직할 때까지 25년 동안 서강에서 후학을 양성했다. 부조리연극의 대표적인 작가로서 100여 편의 희곡을 남겼다. 사실주의극이 중심이던 당시 우리나라 극문학에 풍자성을 강조함으로써 주목 받았다. 메리홀 개관을 주도했고, 국민훈장 모란장과 대한민국예술원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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