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한용(77정외) 한겨레기자의 박근혜 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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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정범석 작성일11-08-12 16:05 조회18,734회 댓글1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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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신문 성한용(77 정외) 선임기자(前 편집국장)가 '여권의 유력한 대선주자' 박근혜(70 전자) 동문을 상세하게 다룬 분석기사를 8월 11일자 <한겨레>에 발표했습니다. 정치전문기자로 활약해온 성한용 동문의 양해를 얻어 기사 전문과 사진을 총동문회 홈페이지에 게재합니다. 야당인 민주당의 손학규 대표를 탐구한 성 동문의 기사가 조만간 추가로 <한겨레>에 게재되는 대로 전재하겠습니다.
감정절제된 수직 리더십, 불만땐 ‘레이저 광선’
[한겨레] 성한용 기자 2011년 8월 11일
정치인은 만인의 술안주다. 동시에 만인의 친구다. 사람들은 정치인을 싫어하지만 바로 그 정치인을 통해 자신의 정치적 견해를 표출한다. 대부분의 정치인은 흐릿한 이미지에 둘러싸여 있다. 사람들은 유명 정치인의 외모, 출신 지역, 학력, 경력 정도로 그 정치인에 대한 호불호를 결정한다. 그러다 보면 정치인의 실체는 좀처럼 알기가 어렵다. 2012년이 다가오면서 대선주자급 정치인들에 대한 관심이 높아가고 있다. 그들은 과연 누구일까? 대통령이 될 수 있는 최소한의 자격은 갖춘 것일까? 또 하나의 이미지를 덧씌울지도 모른다는 위험을 무릅쓰고 유력한 대선주자로 거론되는 몇몇 정치인에 대한 관찰을 시도해 보기로 했다.
쿠데타로 집권했던 군 출신 대통령의 딸이 이 시대에 대통령을 할 수 있을까? 그의 리더십은 권위적일까, 민주적일까?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에 대한 세간의 평가에서 가장 기본이 되는 사실은 그가 박정희 전 대통령의 딸이라는 것이다. 그는 22살이던 1974년 어머니가 숨진 뒤 5년 동안 청와대에서 아버지를 보좌하며 ‘퍼스트레이디’ 구실을 했다. 1997년 45살의 나이로 정치에 입문할 때도 ‘박정희의 딸’이라는 덕을 봤다.
그러나 정계 입문 이후 14년 동안 그는 ‘신뢰의 정치인’ ‘원칙의 정치인’으로 거듭났다. 자신만의 정치 스타일과 이미지를 구축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차기 대선후보 여론조사에서 30%대의 안정적인 지지율을 확보한 것이 그 증거다. 박근혜 전 대표는 도대체 누구일까? 어떤 정치인일까?
먼저 공인 의식을 중심으로 살펴보자.
박근혜 전 대표에게는 보통 정치인들과 확실히 다른 면모가 몇 가지 있다. 무엇보다 사고방식이 다르다. 그의 머릿속에는 ‘개인’이나 ‘욕망’은 없고, ‘국가’와 ‘원칙’만 존재하는 것처럼 보인다. 지나쳐서 무서울 정도다.
보통 정치인들은 “이렇게 하면 당신에게 유리하다”거나 “저렇게 하면 우리에게 몇 표가 온다”는 말을 좋아한다. 유권자의 표를 받아야 생존할 수 있는 정치인의 속성상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박근혜 전 대표에게 그런 말을 했다가는 반드시 면박을 당한다. 2007년 대선후보 경선규칙을 정할 때 협상에 나갔던 측근이 “이 안을 받아들이면 불리하고, 이렇게 해야 유리하다”고 보고했다. 박근혜 전 대표는 “유리하다 불리하다고 말하지 말라. 어떤 게 당헌 당규에 맞는 것이냐, 무엇이 옳은 것이냐”고 따졌다. 그의 측근들은 “지금도 박 전 대표를 설득하려면 ‘이렇게 하는 게 유리하다’는 표현보다, ‘이렇게 하는 게 옳다’고 말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개인이나 욕망보다 국가와 원칙을 중시한다.
‘전략’이란 단어는 ‘속임수’와 비슷하게 생각한다.
정치는 ‘쇼’가 아니라는 것이다.
차갑다는 평가엔 “허무개그를 하고 깔깔 웃는다”며
인간적 측면을 강조하는 사람도 있다
심지어 ‘전략’이라는 단어를 싫어한다. 전략을 ‘속임수’와 비슷하게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는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주고 국민들의 심판을 받으면 그만이지 무슨 전략이 필요하냐”는 말을 자주 했다. 가식이나 포장을 싫어하는 것은 물론이다. 언젠가 주변에서 정치인은 ‘18번’(즐겨 부르는 노래)이 있어야 한다며 노래를 하나 정해서 팬카페에 올리자고 건의했다. 하지만 박 전 대표는 “특별히 좋아하는 노래가 없다”고 거절했다. ‘쇼’는 안 하겠다는 것이다.
개인적인 이해나 욕망, 욕심을 혐오하는 박근혜 전 대표의 특징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그의 한 측근은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선천적인 것으로 본다”고 설명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일본에서 사관학교를 다녔다. 그때는 개인주의가 억제되고 국가주의가 최고조에 이른 시기였다. 미노베 다쓰키치라는 도쿄대 법학자가 천황기관설을 주장했다가 국가주의자들의 압력으로 귀족원 의원직을 사임한 일이 있다. 박정희 전 대통령 시절 만든 국민교육헌장을 읽어보아라.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는 것 아니냐.”
박정희 정권의 국가주의는 그 시대의 통치철학이었다. 박근혜 전 대표는 그 정권의 퍼스트레이디였다. 그의 발언이나 행동에서 개인적이거나 인간적인 것을 찾기가 쉽지 않은 것은 당연한지도 모른다.
국가주의 그 자체는 큰 문제가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박근혜 전 대표의 정치적 리더십이 독선적이라는 비판은 의미심장하다. 그를 보좌한 경험이 있는 한나라당 인사는 이렇게 말했다.
“개인으로서는 그만큼 수련된 사람이 없다. 헌신성, 공인 의식, 감정 통제, 언어 절제는 놀랍다. 그러나 그의 리더십은 지나치게 수직적이다. 지금은 국가 지도자가 톱다운 방식으로 의사를 결정하는 시대가 아니다. 수평적 리더십을 갖추지 못한 사람은 대통령이 되기도 어렵고, 되고 나서도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 폐쇄성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측근들도 박 전 대표의 진의를 잘 모른다. 보스의 말 한마디에 좌우되고 보스의 표정을 지나치게 살핀다는 점에서 동교동(김대중 전 대통령) 문화와 비슷한 데가 있다.”
아랫사람에게 너무 차갑다는 증언도 있다.
“당 대표로 모실 때 결재판을 들고 사무실에 들어갔다. 서류를 몇 장 넘겨보다가 갑자기 의자를 창 쪽으로 돌려 외면한 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자 식은땀이 나고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다. 뭔가 잘못됐다는 생각이 들어 결재판을 들고 나왔다.”
하지만 독선적 리더십과 관련해서는 적극적인 반론도 존재한다. 사실은 박근혜 전 대표의 문제가 아니라 측근들이나 대화 상대방의 문제라는 것이다.
박 전 대표를 가끔 만나는 정책 전문가는 “내용에 대해 충분히 숙지하고 대하면 박 전 대표는 얼마든지 알아듣고 받아들인다”며 “훌륭한 학생”이라고 평가했다. 또 “나는 박 전 대표를 사석에서 가끔 ‘누님’이라고 부를 정도로 격의없이 대화한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다른 주변 인사는 “그를 여자라고 우습게 생각하는 사람은 반드시 당하게 되어 있다. 그는 경륜이 있는 정치 지도자다. 나이가 벌써 60이다”라고 말했다. 쌀쌀맞다는 비판에 대해서도, “인간적으로 차가운 사람이 결코 아니다. ‘허무개그’를 하고 깔깔대는 모습을 기자들도 자주 보지 않았느냐”는 반박이 있다. 비판만큼이나 반박도 일리가 있다.
박근혜 전 대표의 다른 문제점 중 하나는 호가호위형 인물들이 주변에 많다는 것이다. 2007년 경선을 도왔던 인물 중에 돈 문제에 얽혀 수사를 받았던 사람이 있었다. 지금도 박근혜를 팔며 자기 정치를 하는 다수의 사람이 존재한다.
호가호위형 측근이 많지만 그들은 비리로 구속되면
“박 전대표가 살려줄 것”이라고 자신 못한다.
직설법과 반말은 안한다.
사이비 교주 의혹을 받은 최태민 목사와의 관계,
형제들과의 갈등은 어두운 개인사다
박 전 대표와 가까운 한 인사는 “문제를 일으킬 소지가 있는 친박 인사들에 대해 박근혜 전 대표에게 물어본 일이 있는데, ‘저도 들어서 알고 있어요’라고 말하더라”며 “그런 사람들을 중용하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또다른 측근 인사는 “언젠가 친박 정치인들이 모인 자리에서 ‘당신들 비리로 구속되면 박 대표가 살려줄 것 같으냐’고 물어봤더니 아무도 대답을 하지 않고 조용해진 일이 있었다”며 “친박 인사들도 박 전 대표가 어떤 사람인지 잘 알고 있다”고 말했다. 김재원 전 의원은 “박근혜 전 대표가 대통령이 되면 박근혜 정권이 되는 것이지, 친박정권은 되지 않을 것”이라고 자신했다.
‘수첩공주’라는 별명은 박근혜 전 대표의 지식과 경륜이 짧다는 비판을 할 때 자주 사용되는 표현이다. 이 별명을 본인은 어떻게 생각할까? 한 측근 인사는 이렇게 설명했다.
“박근혜 전 대표가 수첩에 뭔가를 적을 때는 나중에 반드시 챙긴다는 의미다. 기자들의 취재수첩과 마찬가지다. 수첩만 보고 읽는 정치인으로 비판하는 것은 부당하다. 박 전 대표에게 해명하자고 건의했다. ‘그냥 두세요. 아니면 됐지요’라고 대답하더라.”
박근혜 전 대표의 화법은 어떨까? 그는 좀처럼 직설법을 사용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누가 사람에 대해 보고를 했을 때, 박 전 대표가 “그 사람 잘 아시잖아요?”라고 말하면 긍정이다. 반대로 “그 사람 잘 모르시잖아요?”라고 말하면 부정이다. 박 전 대표는 측근들에게 “이렇게 하라”고 지시하는 경우가 없다. 대신 “이렇게 하면 어떠냐”고 의견을 내는 게 고작이다.
반말은 절대 하지 않는다. 집에서 기르는 강아지와 조카에게만 반말을 한다는 우스개가 있을 정도다. 언어에서는 타인에 대한 배려가 매우 발달해 있는 셈이다. 동시에 마음에 들지 않는 말을 하는 사람들에게 특유의 ‘레이저 광선’을 쏘는 것도 사실이다.
박근혜 전 대표는 어린 시절부터 공인이었다. 아버지가 대통령이 된 뒤 ‘큰 영애’로 불렸다. 그리고 20대부터 국정에 개입했다. 어느 정치인도 이런 이력을 갖고 있지 않다.
그의 과거에 대한 증언을 확보하기 위해 정치권에 떠도는 이야기를 추적해 보았다. 그의 대학 시절 동기, 청와대 담당 비서관 등 몇 사람을 만났다. 이들은 적극적인 증언을 거부했다. 박근혜 전 대표에게 혹시라도 누가 될 수 있다는 것이 이유였다. 그러나 기자가 알고 물어보는 부분에 대해서는 사실 관계를 바로잡고 보충해 주었다.
박근혜 전 대표가 1979년 10·26 직전 부마항쟁(당시는 부마사태) 공수특전단 철수에 개입했다는 얘기는 사실이었다. 이 이야기는 박근혜 전 대표가 2002년 대선을 앞두고 미래연합을 창당했을 때 운영위원들의 입을 통해 처음 흘러나왔다.
1979년 부마항쟁때 공수특전단 철수를
아버지에 건의했다는 얘기도 있지만, 국가주의정권의
퍼스트레이디 경험 탓에 독선적이란 비판을 받는다.
“수평적 리더십을 갖추지 못한 국가지도자는 문제가 될 수 있다”
1970년대 말 청와대 출입기자단은 1주일에 한두 차례 박근혜 전 대표와 테니스를 쳤다. 테니스를 친 뒤에는 저녁식사를 하곤 했다. 이 자리에는 박정희 당시 대통령도 한 달에 한 번꼴로 참석했다. 기자들로서는 매우 중요한 취재 현장이었다. ‘큰 영애 보좌’를 주임무로 하던 최필립 공보비서관(현 정수장학회 이사장)도 참석했다.
1979년 10월15일 부산대를 시작으로 시위가 터져 온통 나라가 어수선했다. <뉴스위크>에 군인들이 시위대의 귀를 잘랐다는 보도가 나왔다. 박근혜 전 대표는 테니스를 치는 대신 기자들에게 ‘부마사태’에 대한 민심을 들었다. 민심이 뒤집혀 ‘혁명’이 일어날 수도 있다는 말이 나왔고, <뉴스위크> 보도는 사실이라는 말도 나왔다. 하필이면 특전단을 투입해 대학생들과 충돌이 커졌다는 얘기도 나왔다. 당시 간담회에 <중앙일보> 기자로 참석했던 성병욱 인터넷신문 심의위원장은 “학생데모에 시민들이 호응하고 있는데, 부가가치세 때문이라는 의견이 많이 나왔다”고 회고했다.
박근혜 전 대표는 최필립 비서관에게 기자들의 얘기를 타자로 치라고 한 뒤, 아버지(박정희 대통령)에게 공수특전단 철수를 건의했다. 박정희 당시 대통령은 불쾌한 듯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박근혜 전 대표가 최필립 비서관에게 “비서관님, 경호실장(차지철)에게 지시하세요. 특전단 당장 철수시키라고 하세요”라고 말했다. 그래도 박정희 대통령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최필립 비서관은 박근혜 전 대표의 입에서 나온 공수특전단 철수 지시를 차지철 경호실장에게 전달했고, 차지철 실장은 정병주 특전단 사령관에게 철수를 지시했다.
박근혜 전 대표는 당시 정부에서 하는 일 가운데 잘못된 것을 주로 아버지에게 건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심지어 부가가치세 도입에 대한 부정적 여론, 김영삼 신민당 총재 직무집행정지 가처분 및 의원직 제명이 잘못된 것이라는 의견도 아버지에게 전달했다고 한다. 그의 이런 ‘임무’는 어머니(육영수)로부터 물려받은 것이라는 게 당시 청와대 관계자의 증언이다. 청와대 안의 ‘야당’이었다는 것이다. 박근혜 전 대표는 언론인들의 견해를 꽤 존중했다고 한다. 구국여성봉사단 명칭을 한마음봉사단으로 바꾼 것도 언론인들의 건의에 따른 것이었다.
대학 시절에도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몇 가지 일화가 있다. 박 전 대표는 서강대 전자공학과 70학번이다. 그의 입학 동기들은 청와대에 가서 다과회를 했던 추억이 있다. 누군가 박 전 대표의 어머니에게 “친구끼리 야자해도 괜찮으냐”고 묻자, 육영수씨는 “서로 존댓말을 썼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 뒤로 지금까지 박 전 대표와 그의 전자공학과 동기들은 서로 존댓말을 쓴다.
박근혜 전 대표는 등교할 때 반드시 신촌로터리에서 차에서 내려 학교를 걸어서 들어갔다. 학생들은 그에게 말을 쉽게 붙이지 못했는데, 대통령 딸이어서가 아니라 워낙 단정한 모범생이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개구쟁이 남학생 후배가 그에게 “누나 빵 사줘”라고 자주 조른 일이 있는데, 경호원이 이 남학생을 빵집으로 데려가 큰 봉지에 한가득 빵을 사주고 “다시는 큰 영애님에게 빵 사달라고 하지 말라”고 경고한 일이 있었다. 박 전 대표는 다음날 그 남학생에게 “그건 내 뜻이 아니다”라고 사과했다.
일탈도 있었다. 어느 날 박 전 대표가 사라져 학교가 발칵 뒤집혔다. 나중에 알고 보니 수녀들 숙소 뒤편 쪽문을 통해 학교를 몰래 빠져나가 명동 중앙극장까지 가서 영화 <천일의 앤>을 보고 온 것이었다. 박 전 대표는 동기 남학생이 박정희 정권에 반대하는 시위를 하다가 제적되자 어머니에게 얘기해서 그 학생을 취업시켜 준 일도 있다.
물론 박근혜 전 대표에게는 어두운 과거가 있다. 최태민 목사와의 관계가 대표적이다. 그의 주변 인사들은 “젊은 시절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영적인 위안을 받은 것 같다”고 한다. 그러나 최태민 목사는 사이비종교 교주 출신이라는 의혹을 비롯해 여러가지 문제가 많은 사람이었다.
1975~1979년 신문을 보면 박근혜 전 대표와 최태민 목사가 행사에 함께 참여한 사진과 기사가 실려 있다. 지금 인터넷에서도 관련 의혹을 제기한 블로그나 기사를 쉽게 찾을 수 있다.
2007년 대선후보 경선 과정에서 의혹이 잠시 제기된 적이 있지만, 내년 대선을 앞두고 본격적인 검증이 이뤄질 것으로 보인다.
또 한 가지. 가족과의 관계도 박근혜 전 대표의 약점이다. 그는 부모가 다 돌아가신 뒤에 동생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지 못했다. 여동생 박근령씨와는 육영재단을 둘러싸고 갈등을 빚었다. 지금도 관련 소송이 진행중이다. 박근혜 전 대표 앞에서 근령씨 얘기를 꺼내면 목소리 톤이 달라진다고 한다. 한때 마약의 구렁텅이에 빠졌던 남동생 지만씨도 박근혜 전 대표의 취약점이다. 그와 관련된 몇 가지 잡음도 역시 내년 대선을 앞두고 박근혜 전 대표 본인이 설명해야 할 대목이다.
shy99@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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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연표
1952 대구 출생
1970 서강대 전자공학과 입학
1974 모친(육영수) 사망
1979 부친(박정희) 사망
1997 한나라당 입당
1998 대구 달성 재보선 당선
2004 한나라당 대표 취임
2007 한나라당 대선 경선 패배
자서전에 담긴 1972년의 모습
1979년 리콴유 전 싱가포르 수상과 함께
2009년 5월 미국 방문 뒤 인천공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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