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학번 30주년 홈커밍]보고 싶다, 친구야! 김명진(81불문) 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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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1-07-14 10:02 조회27,570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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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학번 불문과 동문회장인 홍준기한테서 전화가 왔다. ‘서강대 81학번 30주년 홈커밍데이 준비모임’에 대신 참석해 달라는 것이다.
“준기씨, 내 나이의 중년여자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 남자동창들을 만나는 것이야. 한때 자체 발광하던 여신(?)의 외모를 기억하고 있을 그들에게 아줌마로 변한 지금의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은 거지. 남녀공학 동창회에 여학생들이 안 모이는 이유가 다 거기에 있어.”
준기는 말했다. “너희들이 언제 우리를 남자로 생각했니? 시동생 벌로 여겼지.”
홈커밍데이 준비모임 당일, 나는 학교에 조금 일찍 도착했다. 새로운 건축물들과 울창한 숲으로 덮인 캠퍼스는 조금 두꺼워지긴 했어도 우리 시대 서강언덕의 이미지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오래간만에 교정을 걸어 보기로 했다. 날씬한 몸매, 말총같이 긴 생머리, 하얀 얼굴에 크고 맑은 눈을 가졌던 81학번 명진이를 만나기 위해. 아, 내 인생에서 가장 빛났던 시절이여! 낭만의 청춘이여! 아직도 기억에 생생한 1981년 봄, 뜨겁게 젊음을 발산했던 대학축제가 떠올랐다.
처음 맞은 대학축제, 나는 스케줄을 치밀하게 짜서 모든 행사를 하나도 빠짐없이 쫓아 다녔다. 신나는 일이었다. 어느 팀에서 만들어 팔았는지 기억이 안 나지만 그때 먹어본 아카시아꽃 튀김은 아직도 군침이 돈다. 본관까지의 중앙 녹지대는 2단의 작은 운동장이었는데 디스코장으로 변했었다. 대학가요제에서 은상을 받은 킨젝스의 연주와 함께 캠프파이어는 광란의 도가니였다. 불꽃놀이까지 동원된 축제의 마지막 밤, 81학번 신입생들은 마지막 불꽃이 다 타 없어질 때까지 정신 줄 놓고 춤을 추어댔다. 우리는 이 언덕을 ‘코파카바나’라고 불렀다. 당시 신촌로타리에 있던 ‘우산속’과 더불어 명동에서 성업 중이던 복층 구조의 디스코텍이 ‘코파카바나’였기 때문이다. 정원이 두 배로 늘어난 81학번 신입생들 때문에 학구적인 교정이 놀자판(?)으로 변했단다. 하하!
‘메리홀’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그 언덕 위에서 재잘거리는 소녀들의 영상이 보였다. 곽인아, 김부용, 안혜란, 박태광, 그리고 김명진. ‘81학번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에서 연극반 선배들이 목숨을 걸고 주도했던 여학생 모셔오기 섭외에 넘어간 새내기들이었다.
서강대는 전통적으로 여학생 수가 적었던 까닭에 연극반에서는 항상 여자배우 가뭄에 시달렸다. 남자 81학번 신입생들은 걸레질하고 물주전자 들고 다녔는데, 우리 여학생들은 모두 서강연극반 정기공연 무대에 올랐다. 여주인공을 맡았던 인아는 외모면 외모, 운동이면 운동, 공부면 공부, 못하는 게 없어서 남학생들의 인기를 한 몸에 받았다. 특히 그 애의 눈빛이 남자들을 뇌사시킨다나? 하지만 우리 4명의 동네처녀들이 무대에서 워낙 설쳐대는 통에 여주인공이 밀렸다는 후문도 있다. 아마도 우리 5명의 여자들은 그때가 인생에서 가장 대우받고 살던 시절이었나 보다. 호호!
‘왕자다방’과 학교 앞 생맥주 집은 우리 연극반의 아지트였다. 나는 연극보다 솔직히 뒤풀이 자리에 더 관심이 많았다. 연극반 선배들은 기인들이 많았는데 회식자리에서 처음부터 끝날 때까지 좌중을 휘어잡았다. 나는 너무 신기하고 재미있어서 허파에 바람 들어간 사람처럼 연실 까르르 웃어대며 회식자리를 쫓아 다녔다. 그런 나를 선배들은 안주빨이 너무 세다며 구박했다. 부용이와 나는 마음도 통하고 주량도 비슷해 둘이서 생맥주집에 가서 자주 잔을 부딪쳤다. 그러고 있으면 지나가던 동기나 선배들이 합류했다. 술값이 떨어지면 부용이는 과감히 자기 시계를 풀었다. 정말 못 말리는 여학생이었다.
국악반 MT에 가서는 동기 남학생과 술내기를 해서 내가 이겼다. 하지만 다음날 업혀 나오면서 주당 명진이의 시대도 막을 내렸다. 춤과 연극 그리고 술로 객기를 부리며 낭만을 노래했던 81학번 신입생 시절, 그 때가 바로 내 인생의 디오니소스 축제였다.
1981년 봄을 뜨겁게 달구었던 질풍노도의 시간은 여름방학이 되어서 한차례 폭우가 내리며 지나갔다. 폭풍우는 벼락도 동반하는 법. 학교에서 날아온 성적표에 찍혀있는 ‘학사경고’! 공부는 뒷전, 각종 서클에 가입하고 술자리에 쫓아다닌 결과였다.
다음 학기에 누적학점으로 2포인트를 못 넘기면 그대로 아웃이었다. 그 당시 학사경고를 받은 학생들은 부모님을 대동하고 한날한시에 ‘메리홀’에 모여 훈계를 들었다. 우리는 ‘서강고등학교(?)’에 다녔으니까. 어머니와 나는 누가 볼까 양산으로 얼굴을 가리고 종종걸음으로 캠퍼스에서 다녔다. 아, 이게 무슨 망신이람! 유혹은 달콤했으나 대가는 썼다. 그 때 우리 어머니 하시는 말씀, ‘꼴찌라도 좋으니 졸업만 해다오.’ 그 후로 내 무대는 ‘메리홀’에서 ‘로욜라도서관’으로 바뀌었다. 첫 번째 장학금 통지서에 눈물 흘리시던 어머니, 나중에 장학금은 당연히 받아 오는 것으로 여기시더라. 하하!
우리 81학번 여학생들이 캠퍼스를 접수하기 전에 서강대의 우상이었던 여자선배들이 있었다. 일명 서강대 트로이카. 빼어난 외모에 수석졸업을 놓고 경쟁하던 수학과 79학번 언니들이었다. 남학생들에게 이 언니들과의 교제는 꿈도 못 꾸는 일이었다. 도서관에서 공부만 하니까. 그래서 앞에서는 트로이카라고 치켜세우면서도 뒤에서는 ‘공부환자’라고 부르며 투덜댔다. 호호.
‘로욜라도서관’의 여학생 화장실에는 소파가 있었다. 화장실은 여학생들의 휴게실이고 사교장이었다. 게다가 지금 말하기에 좀 민망한 일이지만 그 당시 서강대는 전국의 대학 중에서 화장실에 화장지가 비치되어 있던 유일한 학교였다. 우리는 이렇게 세련된 학교를 다녔다.
해가 질 무렵 커피자판기에서 커피를 뽑아 가지고 밖으로 나와 도서관에 기대어 노을을 즐기는 일은 하루의 일과였다. 이제 ‘로욜라도서관’에 더 이상 커피자판기도 여자화장실의 소파도 없다는 것이 아쉽다.
도서관 바로 아래 ‘X관’은 우리 문과대학생들의 공간이었다. 문과대에는 전교에서 여학생이 가장 많은 곳이었다. 81학번 학생수가 1000명이 조금 넘었는데 여학생 숫자는 100여명 정도였다. 그 중 우리 불문과 여학생들은 예나 지금이나 남학생들의 로망. 우리는 여왕자리를 놓고 눈에 보이지 않는 경쟁을 했다. 나도 한 때 퀸카였다고 말하면 지금 아무도 안 믿는다. 호호!
서강대 출신치고 ‘영컴(English Communication)’ 덕을 안 본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영컴’ 시간에 배운 짧은 영어회화가 평생 밥벌이에 도움이 될 줄 몰랐다. 81학번 불문과는 우리가 1기였기에 각종 특혜를 누렸다. 이 점을 82학번 후배들이 가장 억울해한다.
‘X관’에서 각종 교양과목과 불문학 전공 수업을 통해 배운 것은 한마디로 ‘자유의지’다. 자기 인생을 주도하며 사는 힘. 자기를 귀히 여기는 자긍심. 그 덕에 나는 서강인으로 부끄럽지 않게 살 수 있었다.
대운동장에는 킨젝스 연습실, 야구반 그리고 탈춤반 등이 있었다. 킨젝스 선배 중에 친구의 오빠가 있었다. 그 덕에 때 아닌 오디션도 받을 수 있었다. 노래만 잘했으면 대학가요제에 나가 볼 수 있었는데 아쉽다.
운동장 한켠에는 야구를 하거나 탈춤 연습을 하는 학생들이 항상 있었다. 잔디가 어디 있었겠나. 비가 오면 질척한 땅에서 안개가 솔솔 피어올랐다. 그런 날엔 R관에서 직접 끓여 먹던 라면이 제격이다. R관 식당 주인부부는 참 인심이 좋은 분들이었다.
그 때는 가난한 학생들이 참 많았다. 김이나 스팸을 도시락 반찬으로 싸 올 정도면 대한민국 상류 1%에 들었으니까. 아들 하나 공부시키겠다고 시골에서 논 팔고 밭 팔아 올려 보낸 농가들이 얼마나 많았나. 그런 친구들은 영락없이 옷 한 벌 가지고 한 철을 보냈다. 여학생이라도 마주칠라 치면 얼른 고개를 숙이고 도서관으로 내 빼던 새까맣고 깡마른 남학생들. 지금은 말쑥한 중년신사가 되어 있겠지. 한번 보고 싶다.
한동안 소식이 뜸했던 내 술친구 부용이가 홈커밍데이 준비모임에 나왔다. 카페에서 먼저 만난 우리는 자리에 앉자마자 약속이나 한 것처럼 가방에서 책 한 권씩을 꺼냈다. 부용이는 올해 초에 통과했다며 서울대 철학과 박사학위 논문을 내게 내밀었다. 박사과정 입학 후 10년 만에 거둔 결실이다. 나는 올해 초에 출간한 ‘Why Opera 오페라 속 여심’을 건넸다. 오페라 이야기를 엮어 쓴 자전적 에세이다. 누가 서강대 여자 아니랄까 봐 열심히들 살았다. 서강언덕에서 처음 만난 지도 30년, 우리는 바로 그 시절 그 여학생들로 돌아갔다. 나는 부용이에게 말했다.
“이 책 한 꼭지에 내가 고무신 거꾸로 신은 이야기가 나오거든. 너도 알다시피 내가 남성편력이 좀 있었잖니. 여기의 등장인물은 특정인이 아니고 여러 명을 조합해서 쓴 것이라는 점을 감안해서 읽어주기 바란다. 호호!”
내 대학시절의 모든 비밀을 알고 있는 부용이는 알아들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서강대에 들어왔기에 인생이 업그레이드 된 사람이다. 한때 디오니소스 축제에 열광했던 데도 이유가 있었다. 가정형편은 어려웠고 중고등학교에서도 상위권 학생이 아니었기에 주목 받으며 자라지 못했지만 재수를 하면서 인생의 도약을 꿈꾸었다. 여대생이 된 이후에야 사랑과 관심을 한 몸에 받을 수 있었다. 사랑받는다는 것은 참 행복한 경험이었다.
서강대와의 만남이 필연인 것처럼 내 안에는 서강대 여학생 특유의 강한 생명력이 있다. 그랬던 까닭에 학사경고 따위로 밀릴 내가 아니었으리라. 아, 그리운 시절이여, 보고 싶은 친구들이여! ‘서강대 81학번 입학 30주년 기념 홈커밍데이 행사’가 10월에 있다. 질풍노도의 시대를 같이 보냈던 그 친구들을 다시 만나면 잠시라도 그 시절로 돌아갈 수 있을까. 적어도 그 애들은 나를 퀸카로 기억해 주겠지. 킨젝스의 노래처럼 ‘나비가 되어’ 훨훨 날아 보고 싶다. 많은 얼굴들이 하나 둘씩 떠오른다. 보고 싶다, 친구야!
김명진(81 불문)
[덧붙이며-----------------]
김명진(81 불문) 동문이 미국 뉴욕에서 국제금융인으로 활동하던 6년 동안 즐겨 관람했던 오페라에 대해 책으로 펴냈다. 이탈리아, 독일, 프랑스, 러시아 등 다양한 나라의 오페라에 대해 설명한 다음, 등장하는 여자주인공들의 이야기에다 김 동문 자신의 이야기를 함께 다뤘다.
김명진 동문의 저서 ‘Why Opera 오페라 속 여심’ 중 제2막 이기적인 여자, 프랑스 편(사랑할 자유와 안 할 자유) 소제목: ‘나는 유죄인가 무죄인가’ 에서...
이 ‘카르멘’을 보는 내내 마음이 불편했다. 까마득히 잊고 있었던 과거가 생각났기 때문이다.
대학시절 잠시 사귀다 절교한 남자선배가 있었다. 물론 남편을 만나기 전이다. 그는 부잣집 막내아들에 영화배우 뺨치는 외모를 가진 훈남이었다. 공부도 잘하고 운동도 못하는 게 없어서 여학생들에게서 무척 인기가 있었다. 나 또한 캠퍼스에서 한 인물하던 퀸카였다. 하루는 운동장을 지나가는데 그 선배가 농구를 하고 있었다. 한쪽에서 여학생들이 모여 재잘거리며 그에게 찬사를 보내는 게 아닌가.
나는 걸음을 멈추고 서서 그를 잠시 쳐다봤다. 그 때 내 가슴속에서 작은 통증 같은 것이 느껴졌다. 그건 사랑이라기보다 갖고 싶은 욕망 같은 거였다. 다른 여자에게 뺏기고 싶지 않은 경쟁심이랄까? 나의 못된 습관에 발동이 걸렸다. 큐피드의 화살, 그 시위를 당겼다. ‘너는 내 거야.’
학생 식당에서 그를 보면 나는 식판을 들고 그와 같은 테이블에 앉아 식사했다. 교양과목 수업시간에는 그가 잘 볼 수 있는 위치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도서관에서는 책을 고르다 우연히 지나친 거처럼 그의 주위를 맴돌았다. 하지만 한번도 눈을 마주치지는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도서관에서 숙제하고 있는데 그가 다가와 말을 걸었다. ‘저, 불문과시죠?’ 그 때 나는 그의 눈을 처음으로 쳐다봐 주었다. 그는 잠시 멍한 표정을 짓더니 얼른 쪽지를 내밀며 말했다. ‘이것 좀 번역해 주실래요?’ 쪽지엔 이렇게 쓰여 있었다. Je t’aime(사랑해).
나는 표정관리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이런 쪽지를 한두 번 받아 본건 아니지만 접수해 본적이 없어서 말이다.
우리가 처음 사귀기 시작할 때는 아무것도 모르고 좋아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서로 이상이 다르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자유분방했고 그는 보수적이었다. 나는 튀는 것을 좋아했고 그는 묻어가는 것을 선호했다. 나는 모험과 도전을, 그는 안정과 평화를 추구했다. 나는 원대한 미래를 설계하며 꿈을 키웠다. 그는 나를 남자의 보호를 받는 여자 이상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나는 나 자신이 주도하는 삶을 원했다. 그는 럭비공처럼 어디로 튈지 모르는 나를 새장에 가둬두려 했다. 그의 보호가 숨 막히는 구속으로 느껴졌을 때, 결국 나는 자유를 찾아 그를 떠났다. 그 시점이 그 선배가 군대 갈 때였다. 나는 유죄인가, 무죄인가.
돈 호세의 아리아 구절구절에서 터져 나오는 절규는 나를 심한 죄의식에 빠지게 했다. 이유야 어찌 되었든 나는 고무신을 거꾸로 신을 여자가 아니었나. 비록 카르멘처럼 그를 악의 소굴에 밀어 넣지 않았어도, 데릴라처럼 민족을 배신하게 하지 않았어도, 마농처럼 자신의 사치를 위해 노름판에 보내지 않았어도, 나는 가해자고 그는 피해자였다. 가만 놔두었으면 돈 호세는 고향의 처녀와 결혼해 어머니를 모시고 잘 살았을 거다. 가만 놔두었으면 그도 자기 이상에 맞는 여학생을 만났을 거다. 그러면 여자친구도 없는 군대생활을 하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는 수호천사 같은 존재였다. 험한 세상에서 나를 곱게 지켜주었다. 그때는 어려서 몰랐는데 서로의 이상이 달랐던 건 자란 환경 때문이었던 것 같다. 나는 형편이 어려운 가정에서 자라 스스로 앞날을 개척해야 하는 처지였지만 그는 부유한 집에서 자라 그런 치열함이 없었다. 나는 그를 남성권위적인 사람이라고 간주했다.
왜 먼저 유혹해 놓고 자유를 찾아 떠났는지…. 나는 오페라를 보는 내내 경솔하고 무모했던 내 어린 날의 행실을 참회했다. 돈 호세가 카르멘을 죽인 바로 그 자리에 카르멘으로 분한 나도 있었다. 나는 혼자 말했다.
‘죽어 줘서 고맙다, 카르멘. 미안하다, 선배. 나를 결코 용서하지 마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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