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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 알아야 할 50가지] 33.서강학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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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1-04-20 13:17 조회15,95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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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9년 10월 20일 남덕우 서강대 교수의 화곡동 자택을 같은 대학 이승윤 교수가 방문했다. 청와대에서 남 교수를 급히 찾고 있다는 것. 두 교수는 택시를 타고 청와대로 향하던 중 라디오에서 ‘재무장관 남덕우’라는 뉴스를 들었다. 서강학파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남 전 총리에 이어 1971년 이승윤 교수와 김만제 교수가 각각 금융통화운영위원과 한국개발연구원 원장이 됐다. 서강학파 ‘빅3’ 또는 트로이카의 탄생이었다. 재무장관과 총리로 박정희 정권 시절 10년 가까이 경제 정책의 핵심 브레인이자 설계사였던 남 전 총리의 뒤를 이어 김만제, 이승윤 씨도 경제부총리까지 지내며 5, 6공화국 경제 정책을 이끌었다. 남덕우 전 총리는 서강학파를 이렇게 규정했다.

“미국에서 신고전학파 경제학을 배우고 직간접적으로 정부 정책에 영향을 끼친 신진 경제학자들을 대표적으로 지칭하는 말이 아닌가 한다.”


<서강학파의 출현을 알린 남덕우 재무장관 임명소식을 보도한 1969년 10월 27일자 경향신문>

2000년 개교 40주년 기념 심포지엄에서 모교 김경환 교수가 발제한 내용에 따르면, 모교 경제학과는 경제학 전공 미국 유학 1세대 가운데 3분의 1을 교수진으로 끌어들였다. 예컨대 1965년 당시 국내 대학 경제학과교수 가운데 미국 박사학위 취득자는 모교 3명, 연세대 2명뿐이었고, 1971년에도 모교 5명, 연세대 3명, 서울대 2명에 불과했다.

남 전 총리가 1999년 발표한 ‘서강경제학의 의미와 역할’이라는 글은 서강학파의 성격과 지향점 그리고 문제의식을 정확하게 알려준다. 다음은 그 일부다.

‘개방경제 시스템에 중점을 둔 성장전략을 추구했다. 자유경제체제 내지 시장경제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저축과 투자 증대를 통한 성장을 꾀했으며, 수출과 기술도입에 중점을 둔 전략을 택했다. 정부 역할과 시장 원리 사이의 충돌이 신진 정책 담당자들의 고민이었고, 그들이 통제할 수 없는 정치적, 사회적 요인의 제약 아래서 시장경제 원리를 수호하려는 노력을 계속했다.’

서강학파는 1997년 당시 금융개혁위원회 박성용 위원장과 김병주 부위원장으로 사실상 막을 내린 것으로 언급되곤 한다. 우리나라 경제발전사의 한 시대가 IMF 체제와 함께 막을 내리는 시점이기도 했다. 학맥과 학풍 차원이 아닌 국가 거시 경제를 설계하고 정책을 세우는 차원에서는 서강학파란 이제 역사 속 이름이다.

고도 경제성장을 이끈 서강학파의 공과(功過)에 대해 다양한 견해가 있지만, 근대화와 경제성장이라는 시대적 과제이자 소명에 충실했다는 점에 대해서는 이론의 여지가 적다. “성장을 해서 절대 빈곤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절박감을 모르는 사람은 그때 상황을 이해할 수 없다”라는 김병주 모교 명예교수의 말이 많은 것을 함축하고 있다. 21세기의 새로운 시대적 소명을 책임지는 신(新)서강학파의 등장을 기대해본다.

표정훈(88 철학) 편집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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