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년 전 청사진보다 3배나 커진 교정, Unbelievable!” - 서강 설립자 아서 F. 데슬렙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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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0-06-07 00:23 조회13,171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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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슬렙스 전 수사가 개교 50주년 기념식에 참석코자 방한한 뒤, 미국으로 떠나기 전 총동문회 사무실을 방문했다. 본인의 얼굴이 담긴 사진으로 라벨이 장식된 50주년 기념와인 ‘세븐힐 셀러스 쉬라즈 2006’을 들고 포즈를 취했다. 총동문회는 이 와인을 선물했다.
50주년 기념식 축포가 터지던 4월 17일, 키가 외국인 한 명이 철거된 구R관 흔적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쓸쓸하다 못해 처연한 파란 눈동자였다. 눈썰미가 있는 고학번 동문들은 그를 보면서 “오 수사님!” 하면서 살갑게 달려들었다. 서강 설립자 가운데 유일하게 생존해 계신 아서 E. 데슬렙스 전 예수회 수사였다. R관을 직접 지은 당사자이기에 서강 교정의 변화상에 감회가 새로울 수밖에 없을 터였다.
새로 생긴 곤자가 국제학사며 신R관 건물을 보면서 연신 ‘Unbelievable’을 읊조리던 데슬렙스 전 수사는 “서강의 현재 규모가 설립 당시 예상했던 것보다 3배는 커져 있어서 놀랍다”고 말했다. 그도 그럴 것이 모교 설립 이전 단계에서 향후 50년을 전망하던 1950년대 후반에는 본관, 학생회관, 사제관, 체육관, 과학관, 도서관 등을 세우는 게 원대한 목표였기 때문이다. 이는 개교 50주년 2차 기념와인 라벨에 쓰인 설립자 6인의 사진을 찍던 즈음 논의한 청사진이었다.
“그 사진 찍은 게 1957년이었을 겁니다. 남대문 근처 서소문동에 마련된 ‘성모의 집’이었는데, 예수회 회원들이 서강대 구내로 옮기기 전까지 7년 동안 머물렀던 곳이죠. 서강대를 설계 하던 때였습니다. 서강대 설립 예정지가 정해 졌을 때 학교 부지로 예정된 지역의 땅값이 오르는 것을 막기 위해 복덕방을 통해 땅을 조금씩 몰래 사들였던 기억이 납니다.”
올해 86세를 맞이한 데슬렙스 전 수사는 초기 서강의 하드웨어를 구축한 분이다. 1955년 10월 미국 위스콘신 관구에서 길로련 신부님과 함께 한국에 파견된 이후, 게페르트, 진성만, 프라이스, 헙스트 신부 등과 더불어 모교 설립에 나섰다. 다른 예수회 사제들이 교육과 영성 사목 등 소프트웨어를 담당할 때, 본인은 건축과 환경 정비를 맡았다.
그래서 건축 감독을 맡기 시작한 데슬렙스 전 수사는 건물을 지을 때마다 철판과 콘크리트 등 자재를 사고 목수를 고용했다. 방이 몇 개나 필요한지를 확인하고, 화장실은 어디에 있어야 맞는지 검토하면서 건물 하나하나를 지어 나갔다. 덕분에 경비도 줄이고 세금도 줄일수 있었다. 그렇게 본관, 사제관, 학생회관, 하조대 별장, R관, 메리홀, 로욜라도서관, 하비에르관, 체육관, 김대건관 등이 차례로 지어졌다. 특히, 본관에 수세식 화장실을 설치한 것에 대해 데슬렙스 전 수사는 “그 당시에는 대단한 일이었다”고 자랑스러워 했다.
1979년 예수회를 떠난 데슬렙스 전 수사는 1985년까지 서강에서 다양한 행정 일을 하며 지냈다. 정년인 60세에 도달한 그해, 필리핀 마닐라로 한국인 아내와 함께 떠나 1987년까지 고아들을 돌봤다. 그 뒤부터는 고향인 오마하로 돌아와 2000년까지 ‘보이스 타운’이라는 청소년 시설에서 봉사하며 지냈다. 고아들이 장성할 때까지 돕는 단체였다. 부모님도 돌봐야 했기에 고향으로 돌아와야 했다. 75세 이후부터인 지난 10년 동안은 은퇴 생활을 하고 있다. 부총장을 역임한 서정호 모교 법학과 명예교수는 데슬렙스 전 수사가 퇴직할 때, 업적에 비해 적은 퇴직금을 받은 게 늘 마음에 걸린다고 책 ‘에피소드-서강대학교 초창기 이야기들’에서 밝혔다.
데슬렙스 전 수사는 키가 얼마나 되냐는 질문에 ‘6척’이라고 답할 정도로 뼛속 깊이 한국인이 됐다. ‘183㎝’라는 표현보다 한국인의 옛 표현이 익숙해져 있을 정도기 때문이다. 이런 데슬렙스 전 수사를 기억하는 동문들은 모두 그를 ‘오 수사’라고 지칭한다. 한국 이름이 오기덕(吳基德)인 까닭이다.
“김태옥 영문과 교수가 지어준 이름입니다. 고향이 오마하인 까닭에 성이 ‘오마하 오’ 씨가 됐고, 누가 어떤 부탁을 하더라도 ‘OK’라고 대답한다며 ‘기덕’이라 이름 지어졌어요. ‘OK’를 빠르게 발음하면 ‘오키, 오키덕, 오기덕’이라 들린다나요? 남에게 도움이 되는 존재인 것 같다며 ‘Base of Virtue’라는 뜻의 한자가 정해졌습니다.”
모교가 50주년을 맞은 소감에 대해 “서강이 좋은 평판을 계속 유지하고 있는 것 같아 기쁘다”고 말한 데슬렙스 전 수사는 앞으로의 인생 목표가 아내와 올해 서른이 된 아들과 함께 행복하게 사는 것이라 했다. 그러면서 서강 동문들에게 “항상 열심히 노력해서 남을 위해 봉사하길 바란다. 그대 서강의 자랑이듯 서강 그대의 자랑이어라”라고 인사말을 남겼다.
와인 라벨에 사용된 사진. 윗줄 맨 왼쪽이 데슬렙스 전 수사다.
글·사진=정범석(96 국문) 기자
50주년 기념식 축포가 터지던 4월 17일, 키가 외국인 한 명이 철거된 구R관 흔적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쓸쓸하다 못해 처연한 파란 눈동자였다. 눈썰미가 있는 고학번 동문들은 그를 보면서 “오 수사님!” 하면서 살갑게 달려들었다. 서강 설립자 가운데 유일하게 생존해 계신 아서 E. 데슬렙스 전 예수회 수사였다. R관을 직접 지은 당사자이기에 서강 교정의 변화상에 감회가 새로울 수밖에 없을 터였다.
새로 생긴 곤자가 국제학사며 신R관 건물을 보면서 연신 ‘Unbelievable’을 읊조리던 데슬렙스 전 수사는 “서강의 현재 규모가 설립 당시 예상했던 것보다 3배는 커져 있어서 놀랍다”고 말했다. 그도 그럴 것이 모교 설립 이전 단계에서 향후 50년을 전망하던 1950년대 후반에는 본관, 학생회관, 사제관, 체육관, 과학관, 도서관 등을 세우는 게 원대한 목표였기 때문이다. 이는 개교 50주년 2차 기념와인 라벨에 쓰인 설립자 6인의 사진을 찍던 즈음 논의한 청사진이었다.
“그 사진 찍은 게 1957년이었을 겁니다. 남대문 근처 서소문동에 마련된 ‘성모의 집’이었는데, 예수회 회원들이 서강대 구내로 옮기기 전까지 7년 동안 머물렀던 곳이죠. 서강대를 설계 하던 때였습니다. 서강대 설립 예정지가 정해 졌을 때 학교 부지로 예정된 지역의 땅값이 오르는 것을 막기 위해 복덕방을 통해 땅을 조금씩 몰래 사들였던 기억이 납니다.”
올해 86세를 맞이한 데슬렙스 전 수사는 초기 서강의 하드웨어를 구축한 분이다. 1955년 10월 미국 위스콘신 관구에서 길로련 신부님과 함께 한국에 파견된 이후, 게페르트, 진성만, 프라이스, 헙스트 신부 등과 더불어 모교 설립에 나섰다. 다른 예수회 사제들이 교육과 영성 사목 등 소프트웨어를 담당할 때, 본인은 건축과 환경 정비를 맡았다.
그래서 건축 감독을 맡기 시작한 데슬렙스 전 수사는 건물을 지을 때마다 철판과 콘크리트 등 자재를 사고 목수를 고용했다. 방이 몇 개나 필요한지를 확인하고, 화장실은 어디에 있어야 맞는지 검토하면서 건물 하나하나를 지어 나갔다. 덕분에 경비도 줄이고 세금도 줄일수 있었다. 그렇게 본관, 사제관, 학생회관, 하조대 별장, R관, 메리홀, 로욜라도서관, 하비에르관, 체육관, 김대건관 등이 차례로 지어졌다. 특히, 본관에 수세식 화장실을 설치한 것에 대해 데슬렙스 전 수사는 “그 당시에는 대단한 일이었다”고 자랑스러워 했다.
1979년 예수회를 떠난 데슬렙스 전 수사는 1985년까지 서강에서 다양한 행정 일을 하며 지냈다. 정년인 60세에 도달한 그해, 필리핀 마닐라로 한국인 아내와 함께 떠나 1987년까지 고아들을 돌봤다. 그 뒤부터는 고향인 오마하로 돌아와 2000년까지 ‘보이스 타운’이라는 청소년 시설에서 봉사하며 지냈다. 고아들이 장성할 때까지 돕는 단체였다. 부모님도 돌봐야 했기에 고향으로 돌아와야 했다. 75세 이후부터인 지난 10년 동안은 은퇴 생활을 하고 있다. 부총장을 역임한 서정호 모교 법학과 명예교수는 데슬렙스 전 수사가 퇴직할 때, 업적에 비해 적은 퇴직금을 받은 게 늘 마음에 걸린다고 책 ‘에피소드-서강대학교 초창기 이야기들’에서 밝혔다.
데슬렙스 전 수사는 키가 얼마나 되냐는 질문에 ‘6척’이라고 답할 정도로 뼛속 깊이 한국인이 됐다. ‘183㎝’라는 표현보다 한국인의 옛 표현이 익숙해져 있을 정도기 때문이다. 이런 데슬렙스 전 수사를 기억하는 동문들은 모두 그를 ‘오 수사’라고 지칭한다. 한국 이름이 오기덕(吳基德)인 까닭이다.
“김태옥 영문과 교수가 지어준 이름입니다. 고향이 오마하인 까닭에 성이 ‘오마하 오’ 씨가 됐고, 누가 어떤 부탁을 하더라도 ‘OK’라고 대답한다며 ‘기덕’이라 이름 지어졌어요. ‘OK’를 빠르게 발음하면 ‘오키, 오키덕, 오기덕’이라 들린다나요? 남에게 도움이 되는 존재인 것 같다며 ‘Base of Virtue’라는 뜻의 한자가 정해졌습니다.”
모교가 50주년을 맞은 소감에 대해 “서강이 좋은 평판을 계속 유지하고 있는 것 같아 기쁘다”고 말한 데슬렙스 전 수사는 앞으로의 인생 목표가 아내와 올해 서른이 된 아들과 함께 행복하게 사는 것이라 했다. 그러면서 서강 동문들에게 “항상 열심히 노력해서 남을 위해 봉사하길 바란다. 그대 서강의 자랑이듯 서강 그대의 자랑이어라”라고 인사말을 남겼다.
와인 라벨에 사용된 사진. 윗줄 맨 왼쪽이 데슬렙스 전 수사다.
글·사진=정범석(96 국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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