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주년특집기획] 서강인의 단골집 -왕자다방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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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선비 작성일10-04-27 16:24 조회16,093회 댓글1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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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교10주년 전자공학과 가장행렬 뒤 건물 2층 간판에 왕자 다방이 보인다>
1960년 개교한 모교는 당시 신촌 주변에 위치한 연세대, 이화여대, 홍익대 등에 비해 가장 나중에 생긴 학교였고 학생 수도 가장 적었다.
필자가 입학한 1967년도의 모교는 아직 단과대학이었고 존 P 데일리 신부님이 길로련 초대학장님에 이어 2대 학장이셨다. 캠퍼스는 A관과 C관 건물이 고작이었으나, 입학과 동시에 운동장 건너편에 R관(리찌관)이 완공돼 이공계 학과에서 사용했다. 그 1층에 도서관이 있었고 당시 이름도 생소하던 컴퓨터실에는 국내에 단 몇 대만 있었다는 집채만 한 대형 컴퓨터가 들어왔던 기억이 새롭다. 지금의 메리홀 자리에는 나무벤치가 한가하게 놓여있었는데, 그곳에 앉으면 볼품없는 상수동 일대 주택가 너머로 멀리 마포 샛강과 여의도 모래섬이 환히 내다보였다. 벤치를 지나 지금의 경영대학 건물 뒤쪽으로 내려가면 농구 코트와 탁구대가 있던 콘세트(철제 터널식 가설 건축물)로 지은 체육관이 있었다.
1960년대 후반의 서강대학 풍경은 지금과 비교해보면 건물들이 단출해 정말 썰렁했지만 전교생이 800여 명에 불과한 학생 수에 비하면 꽤나 넉넉한 공간이었다. 67학번 입학 당시 식당과 카페테리아에 사람이 많아지니까 선배들이 매우 귀찮다는 말투로 “뭐 애들을 이렇게 많이 뽑아?”라며 투덜대던 생각이 난다. 겨우 286명이었는데 말이다. 우리들이 합세했어도 C관 1층 식당에서 전교생이 편안히 점심을 먹을 수 있을 만큼 여유가 있었다. 당시에는 어려운 시절이기에 대부분 도시락을 싸가지고 다녔다. C관 식당은 당시에는 왼쪽만 식당이었고 오른쪽은 편안한 소파가 넉넉하게 놓인 카페테리아여서 학생들의 쉼터 역할을 했다. 그 앞쪽에 여자화장실이 있었는데 여학생들이 들어가면 쉽게 나오지 않아 남학생들이 무척 궁금해 했다. 나중에 들은 얘기로 그 안에 휴게시설이 있었다 한다.
신촌로터리에서 학교까지의 언덕길은 비포장도로여서 비가 오면 진흙탕에 구두를 더럽히지 않으려고 요리조리 골라 밟고 다니던 생각이 난다. 그래서 ‘진촌’이라고 불렀다. 60년대 내내 진촌으로 있다가 1970년 봄학기 초에 ‘청지회(서강여학생회)’ 주최로 바자회를 열 때에 당시 신입생이던 국회의원 박근혜(70 전자) 동문의 모친이신 고 육영수 여사께서 참석하신다는 바람에 바자회 개최 하루 전날 밤 마포구청에서 꼬박 전등불 밝히면서 아스팔트로 포장한 덕분에 아쉽게도(?) 진촌은 그날 이후로 사라졌다.
그 시절 대학마다 유명한 다방이 있었다. 신촌은 연대 쪽에 ‘독수리다방’과 서강대 쪽의 ‘왕자다방’이 명물이었다. 각각 연대생들과 서강대생들의 아지트로 당시 인기 있었는데, 서강대생들은 왕자다방 외에 따로 출입할 만한 장소가 없었기에 더욱 더 만남의 장소로 애용했다.
왕자다방은 신촌로터리에서 서강대 쪽으로 들어서면서 오른쪽 첫 번째 골목에 있던 흰색타일 3층 건물의 2층에 있었다. 대부분의 재학생들이 제2의 카페테리아로 애용하던 추억의 장소 왕자다방은 겨울이면 굴뚝난로를 피워놓고 둘러앉을 만큼 아담한 공간에 불과했는데, 1968년쯤 겨울방학이 끝나고 가보니 뒤편으로 공간이 확장돼 제법 널찍한 만남의 장소가 되었다.
왕자다방 풍경은 당시 다른 대학가 다방과 다를 바 없었다. 체격 좋고 눈이 컸던 한복 차림의 중년 마담과 젊은 레지들이 있었고, LP판 재킷이 빽빽한 DJ박스에서 디스크자키가 신청곡을 받아 주로 팝송을 틀어주었다. 레지란 lady의 일본식 발음으로 당시에는 다방에서 차나르는 여자들을 그렇게 불렀다. 우리들은 ‘왕자다방’이라 수놓은 하얀 카버가 씌워진 등받이 높은 푹신한 의자에 앉아 담배연기로 도넛을 만들고, 아침이면 커피에 달걀 노른자위를 넣어주는 모닝커피나 쌍화차를 마시곤 했다. 또는 ‘위티’라고 홍차에 국산 도라지위스키나 쌍마위스키 한 방울을 넣어 만든 차를 멋으로 마셨다. 달걀 반숙도 메뉴에 있었는데 어떤 친구는 꼭 완숙으로 달라고 우기기도 했다. 못살던 60년대라 그랬는지 달걀이 참 귀한 음식이었다. 그때 커피 한 잔 값이 30원인지 40원인지 했다. 버스 값이 25원, 막걸리 한 되 값이 50원, 귀한 ‘청자’ 담배가 90원 정도 할 시절이었으니 돈 없는 대학생 수준으로는 쉽게 들락거릴 수 없었을 텐데도 거의 매일 친구들과 강의가 없는 시간이나 수업 후에 들르곤 했다.
3층은 왕자당구장으로 역시 우리 학교 학생들의 놀이터였다. 입구가 계단으로 되어 있어 2층 다방에서 3층으로, 3층에서 2층으로 수시로 오갈 수 있었다. 지금 생각하니 그 건물 1층은 무엇하던 곳인지 모르겠다. 당시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던 것을 지금에서야 궁금해지는 이유가 궁금하다. 이젠 당시 건물조차 없어진지 오래인데 말이다. 그러고 보니 우리 애송이 학생들한테 한 번도 얼굴 찡그리지 않았던 마담언니도 보고 싶고, 지금쯤 뉘 손자의 할매 정도는 되었을 우리보다 어린 레지도 보고 싶다. 마담보다 더 보고 싶다. 하하하!
사십 여 년 전의 일들을 들추다보니 세월의 틈새가 너무 깊다. 당시의 일들에 대해 메모도 없이 쓰려니 그만큼 정확성이 떨어진다. 언급한 것들에 대해 혹시 정확치 않은 부분이 있다면 널리 양해를 구한다.
곽명세(67 국문)
평택대학교 방송연예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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