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으로 보는 50년(10)-서강옛집 1면에 나타난 시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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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0-03-25 13:19 조회17,958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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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4년 창간한 서강옛집은 구독을 원하는 모든 동문에게 보내져 동문과 모교를 하나로 묶는 고리 역할을 해 왔다. 동문과 모교의 중요한 역사가 담긴 서강옛집 1면으로 지난 50년을 돌아봤다.
1960년대
제 1호 (1964년 1월)
서강옛집 창간호다. 정원을 증원한 모교 소식부터 취업 및 입대한 동문 소식 까지 소소한 이야기가 담겼다. 손 글씨와 삽화가 정겹다.
제 4호 (1964년 4월)
당시 최고 수준의 영어 수업을 받은 동문들의 실력을 반영하듯, 존 P. 데일리 신부가 동문에게 보내는 글을 원문으로 실었다.
1970년대
제 73호 (1973년 9월)
해외 생활을 마치고 귀국했음을 알리는 안철(60 물리) 동문의 기고가 1면을 장식했다. 당시 서강옛집이 동문 교류의 터전이었음을 보여준다.
제 85호 (1976년 4월)
고옥(69 경제) 동문이 신입 동문으로서 포부를 밝혔다. 동문과 재학생으로 구성된 상설기구를 설치하고 의견을 나눌 것을 제안했다.
제 87호 (1976년 8월)
87호 1면은 막 완공된 하비에르관(X관)의 전경이 장식했다. 제 86호부터 판형이 타블로이드로 바뀌고, 사진을 적극적으로 게재하기 시작했다.
1980년대
제 137호 (1985년 6월)
서강동문장학회 설립을 위해 동문들의 참여를 촉구했다. 동문장학회는 2009년 기준으로 한 해에 3억 4000만 원을 장학금으로 지급할 정도로 성장했다.
제 144호 (1986년 3월)
서강산악회의 히말라야 등반 계획을 소개했다. 하지만 기상 악화와 대원들의 잇따른 부상으로 당초 목표였던 ‘가네쉬 히말Ⅱ봉’ 정복은 실패했다.
제 173호 (1989년 5월)
개교 30주년 기념 조형물 건립 계획이다. 조각가 윤영석씨의 작품에, 강여규(72 영문) 동문의 제안으로 ‘알바트로스’라는 이름이 붙었다.
1990년대
1. 제 186호 (1990년 10월)
알바트로스에서 펼쳐진 이동근(82 사학) 동문의 결혼식이다. 당시 청년광장 잔디밭에 남아 있던 최루탄 가루가 날리는 바람에 결혼식 내내 애를 먹었다.
2. 제 227호 (1994년 9월)
모교의 상징이였던 본관 굴뚝의 철거 소식이다. 철거 당시 굴뚝은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아 균열이 생기고 점점 기울어지는 등 위험한 상태였다.
3. 제 263호 (1997년 12월)
새롭게 단장된 청년광장 모습이다. 지하에 유료 주차장을 마련함으로써 그동안 심각했던 주차 문제를 어느 정도 해결할 수 있었다.
2000년대
제 316호 (2004년 10월)
모교 설립 주역인 프라이스 신부의 선종 소식이다. 국내 최초의 노동문제 연구소인 ‘산업 문제 연구소’를 열어 노동자들을 가르쳤던 신부님의 생애를 전했다.
제 360호 (2009년 7월)
이종욱(66 사학) 13대 총장의 취임 소식이다. 개교 50주년을 1년 앞두고 취임한 이 총장은 ‘특별한 서강’ 프로젝트 추진을 대내외에 천명했다.
제 364호 (2010년 1월)
개교 50주년을 맞아 20면으로 증면한 신년호다. 1월 4일 개교 50주년을 축복하듯 함박눈이 내려 한층 아름다워진 캠퍼스를 사진에 담아 과감하게 1면에 실었다.
1960년대
제 1호 (1964년 1월)
서강옛집 창간호다. 정원을 증원한 모교 소식부터 취업 및 입대한 동문 소식 까지 소소한 이야기가 담겼다. 손 글씨와 삽화가 정겹다.
제 4호 (1964년 4월)
당시 최고 수준의 영어 수업을 받은 동문들의 실력을 반영하듯, 존 P. 데일리 신부가 동문에게 보내는 글을 원문으로 실었다.
1970년대
제 73호 (1973년 9월)
해외 생활을 마치고 귀국했음을 알리는 안철(60 물리) 동문의 기고가 1면을 장식했다. 당시 서강옛집이 동문 교류의 터전이었음을 보여준다.
제 85호 (1976년 4월)
고옥(69 경제) 동문이 신입 동문으로서 포부를 밝혔다. 동문과 재학생으로 구성된 상설기구를 설치하고 의견을 나눌 것을 제안했다.
제 87호 (1976년 8월)
87호 1면은 막 완공된 하비에르관(X관)의 전경이 장식했다. 제 86호부터 판형이 타블로이드로 바뀌고, 사진을 적극적으로 게재하기 시작했다.
1980년대
제 137호 (1985년 6월)
서강동문장학회 설립을 위해 동문들의 참여를 촉구했다. 동문장학회는 2009년 기준으로 한 해에 3억 4000만 원을 장학금으로 지급할 정도로 성장했다.
제 144호 (1986년 3월)
서강산악회의 히말라야 등반 계획을 소개했다. 하지만 기상 악화와 대원들의 잇따른 부상으로 당초 목표였던 ‘가네쉬 히말Ⅱ봉’ 정복은 실패했다.
제 173호 (1989년 5월)
개교 30주년 기념 조형물 건립 계획이다. 조각가 윤영석씨의 작품에, 강여규(72 영문) 동문의 제안으로 ‘알바트로스’라는 이름이 붙었다.
1990년대
1. 제 186호 (1990년 10월)
알바트로스에서 펼쳐진 이동근(82 사학) 동문의 결혼식이다. 당시 청년광장 잔디밭에 남아 있던 최루탄 가루가 날리는 바람에 결혼식 내내 애를 먹었다.
2. 제 227호 (1994년 9월)
모교의 상징이였던 본관 굴뚝의 철거 소식이다. 철거 당시 굴뚝은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아 균열이 생기고 점점 기울어지는 등 위험한 상태였다.
3. 제 263호 (1997년 12월)
새롭게 단장된 청년광장 모습이다. 지하에 유료 주차장을 마련함으로써 그동안 심각했던 주차 문제를 어느 정도 해결할 수 있었다.
2000년대
제 316호 (2004년 10월)
모교 설립 주역인 프라이스 신부의 선종 소식이다. 국내 최초의 노동문제 연구소인 ‘산업 문제 연구소’를 열어 노동자들을 가르쳤던 신부님의 생애를 전했다.
제 360호 (2009년 7월)
이종욱(66 사학) 13대 총장의 취임 소식이다. 개교 50주년을 1년 앞두고 취임한 이 총장은 ‘특별한 서강’ 프로젝트 추진을 대내외에 천명했다.
제 364호 (2010년 1월)
개교 50주년을 맞아 20면으로 증면한 신년호다. 1월 4일 개교 50주년을 축복하듯 함박눈이 내려 한층 아름다워진 캠퍼스를 사진에 담아 과감하게 1면에 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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