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영희 교수 뉴욕주립대 박사 학위받은 사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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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09-05-31 11:58 조회18,680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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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故) 장영희(71 영문, 마리아) 교수 장례미사 때 추모강론을 하고, 투병 중인 장 교수를 곁에서 지킨 류해욱 신부(예수회)가 가톨릭신문에 장 교수 추모 글을 실었습니다. ‘장영희, 그분께로 가다’ 제목의 추모 글에서 류 신부는, 장 교수가 서강대를 졸업하고, 학업을 정진하는 과정에서 장애인이기에 겪은 또 한 차례의 고충을 전했습니다.
“(장 교수는) 서강대 대학원 석사과정을 마친 뒤 모 대학 박사과정에 입학하려다가 갈 수 없었지요. 면접관들은 그가 엉거주춤 자리에 앉기도 전에 “우리는 학부 학생도 장애인은 받지 않는다”고 했답니다. 장 교수는 어느 글에서 ‘오히려 마음이 하얗게 정화되는 느낌이었고, 미소까지 띠며 차분하게 인사한 후 면접실을 나왔다’고 썼습니다. 장 교수는 집에서 기다리는 부모님께 낙방 소식을 전하는 것을 조금이나마 늦춰볼 양으로 동생과 무작정 영화관에 들어갔는데, ‘킹콩’을 상영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때 나는 전율처럼 깨달았다. 이 사회에서는 내가 바로 그 킹콩이라는 걸. 사람들은 단지 내가 그들과 다르게 생겼다는 이유만으로 나를 미워하고 짓밟고 죽이려고 한다. 기괴하고 흉측한 킹콩이 어떻게 박사과정에 들어갈 수 있겠는가?”
그는 ‘영화 속 킹콩이 고통스럽게 마지막 숨을 몰아쉴 때쯤’ 결단을 내렸다고 합니다. “나는 살고 싶었다. 그래서 편견과 차별에 의해 죽어야 하는 괴물이 아닌 인간으로 존재할 수 있는 곳으로 가기로 결심했다.” 그래서 그는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토플 책을 샀고, 이듬해 8월 전액 장학금을 준 뉴욕주립대학교로 가서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그는 귀국해 모교인 서강대학교로 와서 교수로서, 작가로서 치열한 삶을 살았고, 이제 우리 곁을 떠나 그분께로 갔습니다.”
학문의 세계에서도 장애인을 괴물 킹콩처럼 취급하는 상황이 실제로 횡행한다는 설명에 어처구니가 없을 뿐입니다.
장 교수의 1년 후배인 국민일보 한석동(72 영문) 편집인은 장 교수 추모칼럼에서 장 교수의 서강대 입학 과정을 소개했습니다.
“지난 70년대 무렵까지만 해도 우리 사회는 입학시험에서 장애인이 불합격하는 것을 당연시했다. 장애인은 제아무리 시험을 잘 쳐도 신체검사에서 떨어질 것이 뻔해 응시 자체를 포기했을 정도로 사회의식은 척박했다. 장영희의 아버지는 입학원서를 내기도 전에 서울의 대학들을 찾아다니며 딸이 입학시험을 보게 해달라고 통사정했지만 번번이 거절당했다. (그러다) 1971년 1월, 서울사대부고 3학년 장영희(19)양의 아버지가 서강대를 찾아갔다. 영어영문학과장이던 미국인 신부 제롬 E 브루닉 교수(80년 작고)에게 그는 “딸이 입학시험을 좀 보게 해달라”고 탄원했다. 브루닉 교수는 “무슨 그런 이상한 질문이 있느냐”며 의아해했다. 그리고 “입학시험은 다리가 아닌 머리로 치른다”며 응시를 흔쾌히 허락했다. 영문학 교수, 수필가, 번역가로서 장영희의 기적 같은 삶은 그렇게 새로 시작됐다.”
많은 동문들에게 모교인 서강이 자랑스러운 이유가 됐던 장 교수 입학과정. 그러나 장 교수는 서강대에서 석사과정을 마친 뒤 또 한 번의 고통을 겪었다는 사실이 너무 안쓰럽습니다.
류 신부의 글은 가톨릭신문 5월 31일자에 실렸습니다. 일독을 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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