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나고 싶었습니다> 정일우 신부-“내가 묻힐 한국이 나의 조국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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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08-06-04 23:22 조회12,910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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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나고 싶었습니다> 빈민의 아버지 정일우 신부
“내가 묻힐 한국이 나의 조국입니다”
빈민운동의 대부로 더 잘 알려진 정일우(73세ㆍ본명 John V. Daly) 신부가 3년 전 중풍으로 쓰러져 투병 중인 사실이 알려져 주위를 안타깝게 하고 있다. 필자는 5월 4일 정 신부가 요양을 하고 있는 서울 강서구 화곡동 알로이시오 공동체에서 30분 동안 정 신부를 만났다. 정 신부는 보행기 없이는 움직일 수 없을 정도로 거동이 불편한 상태였다. 정 신부는 숨이 차서 말을 이어가기가 힘겨운 듯 더듬더듬 자신의 지난 날들을 회상했다.
故프라이스 신부와 각별한 인연
정 신부는 1960년 9월 예수회 신학생 신분으로 처음 한국땅을 밟았다. 1963년 실습이 끝난 뒤 일단 미국으로 돌아갔다 4년 뒤 고등학교 은사인 故베이즐 M. 프라이스 신부(Basil M. Price, 2004년 선종)의 영향으로 다시 한국을 찾았다. 모교 설립 주역인 프라이스 신부는 1966년 국내 최초로 모교의 산업문제연구소를 열어 34년 동안 노동법과 노조 활동 및 단체교섭 방법 등을 노동자들에게 가르친 노동 운동의 선구자다.
정 신부는 프라이스 신부가 돌아가신 2004년 10월 조사를 통해“1949년 8월 말 저는 고등학교에 입학해 이 학교 선생님이었던 프라이스(당시 27세) 신부님을 처음 만났다”며“신부님 수업을 들었고 수업 시간 이후에는 신부님 방을 찾아가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고 말했다. 정 신부는 이어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예수회에 입회했다”며“예수회를 잘 몰랐기 때문에 예수회가 좋아서라기보다는 신부님의 매력 때문에 예수회에 입회했다”고 덧붙였다.
정 신부는 1966년 한국에 온 뒤 예수회 수련원에서 7년 동안 한국 예수회 신학생들을 교육했다. 1968년부터는 6년 동안 모교에서 신학을 가르치며 학생들과 끈끈한 정을 나눴다. 정 신부는1972년 학생들이 유신반대 운동을 하다 당시 중앙정보부에 잡혀 들어간 것을 계기로 사회운동에 눈을 떴다고 한다. 당시 정 신부는 학생들을 풀어줄 것을 요구하며 8일 동안 단식했다. 이후 개발 논리에 밀려 비참하게 살고 있는 빈민들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접하게 됐다. 학교까지 그만두고 청계천과 양평동 판자촌 빈민들과 함께 생활하며 빈민운동에 본격적으로 뛰어든 계기였다.
다큐멘터리‘상계동 올림픽’의 주인공 정 신부는 빈민들이 자신들의 권리를 스스로 찾을 수 있도록 의식 교육을 하고 판자촌 철거 반대 시위를 주도하면서 빈민의‘정신적 아버지’로 자리매김해 왔다. 서울올림픽을 앞둔 1980년대. 시내 곳곳에서 철거작업이 진행되자 상계동과 목동 등지에서 철거민을 도왔고 이들의 자립을 위해‘복음자리 딸기잼’을 만들어 팔기도 했다.
정 신부 곁에는 항상 故제정구 전 의원이라는 든든한 동지가 있었다. 이들은 빈민운동에 대한 공로를 인정받아 1986년 아시아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막사이사이상을 공동 수상했다. 당시 이들의 활동상과 철거민의 아픔을 그린 김동원 감독의 다큐멘터리 영화‘상계동 올림픽(1988)’은 사회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켰다. 정 신부는“판자촌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은 개발 논리에 밀려 정부로부터 버림받은 사람들”이라며“신앙인으로서 어떻게 그들을 외면할 수 있나”라고 빈민운동을 해온 까닭을 설명했다.
1998년 귀화한 정 신부는 충북 괴산에 농촌 청년의 자립을 돕기 위한 누룩공동체를 만들어 농촌 운동에도 힘을 쏟아 왔다. 그러던 정 신부는 2004년 말 단식을 하다가 처음으로 쓰러졌다. 이후 2005년 7월 중풍으로 다시 쓰러진 뒤에는 모든 활동을 접고 요양하고 있다. 정 신부는“처음에는 빈민을 돕기 위해 운동을 시작했지만 활동을 하다 보니 그들과 함께 지내는 게 정말 좋았다”며“내가 묻힐 한국은 내게 소중한 것을 가르쳐 주었기에 조국이다”라고 말했다.
글=이한승(98ㆍ영문) 연합뉴스 사회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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