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릴레이 편지 - 번역가의 길을 이끌어 준 고마운 선배에게 - 곽영미(89.영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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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06-10-30 00:34 조회25,39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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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같은 선배 석봉이 형(87.철학)에게

 

 "너는 마르크스가 옳다고 생각하냐?" 어느 환한 술집에서 12시가 다 되어 가는 늦은 시각에 나를 불러낸 형이 대뜸 한 질문이었어요. "네? 갑자기 웬 마르크스 타령이에요?"라고 묻자 형은 "마르크스가 양질전화의 법칙을 말했잖아. 그걸 믿느냐구?"라고 말했어요. 내가 믿는 것 같다고 대답하자, 형은 아니라고, 마르크스가 틀렸다고 하더군요. 소주를 두 병이나 마셨는데도 술이 안 취한다고, 집에 들어가기 싫다고 한밤중에 사람을 불러내더니 마르크스는 뭐고, 양질전화의 법칙은 뭐람? 난 그렇게 속으로 투덜댔죠. 형의 화법은 늘 그런 식이었어요. 뚱딴지같은 말을 해대는 것. 그러나 사실 따지고 보면 그 안에 뼈가 있는 말이었죠. 그날의 마르크스 타령도 연애에 있어 양질전화가 가능한가, 친구 사이가 애인으로 발전할 수 있는가를 형답게(누가 철학도 아니랄까봐) 던진 화법이었어요.   


 형을 떠올릴 때면 이런 식의 대화 때문에 난 늘 배시시 웃음이 나요. 처음 만났을 때 자그마한 체구에 가무잡잡하고 눈도 약간 푹 꺼진 것이 동남아에서 건너온 외국인 같고, 더구나 말수까지 적어 도저히 친해지기 힘든 사람이겠거니 생각했죠. 그랬던 사람이 언제 보았다고 '차나 한 잔, 술이나 한 잔' 하며 내게 연락을 해왔을 때 한동안은 형이 내게 흑심을 품고 있는 게 아닌가 착각도 했답니다. 나중에 보니 형은 그런 사람이더군요. 스스로는 결단코 사교성이 없다고 주장하지만, 주변 사람 모두가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이 '가장 사교적이다, 맘에 들면 언제든 연락하고 챙기고 찾아가는 이가 석봉이다'라고 말이죠.  


 지금에야 얘기하면 형이 그렇게 연락을 해오던 무렵 나는 사는 게 몹시 힘들었어요. 사랑도 떠나고 오래도록 바라던 꿈도 깨지고, 사람들도 싫고 뭘 하며 살아야 하나 막막하여 갈팡질팡, 우왕좌왕 허덕대고 있었죠. 그러던 어느 날 형은 나에게 한여름의 소낙비 같은 제안을 해왔어요. "번역 한 번 해볼래?" 그렇게 해서 시작한 번역 일은 어둡기만 한 내 삶에 한줄기 빛이 되어 주었어요. 정말 열심히, 정말 신나게 일했죠. 그때의 그 열정이, 초심이 지금은 솟질 않는 걸 보면 내가 제법 살만해졌나 봐요.^^

 
어쨌거나 번역을 계기로 형과의 만남이 더 
잦아지면서 난 형의 묘한 매력을 알게 됐어요. 사람을 긴장시키지 않는 편안함, 잘난 척하지 않는 겸손, 선배나 남자로서의 권위를 내세우지 않는 수수함, 아무리 다녀도 길을 못 찾는 아둔함, 무엇보다 희한한 질문을 해대는 엉뚱함 같은 것들을 말이죠. 형을통해 이른바 출판업계 종사하는 사람들을 만나면서 안 사실도 있죠. 형이 정말 많은 사람들에게 책과 관계된 일거리를 제공하고 서로를 연결시켜 주었다는 것을. 놀랍게도 형은 그런 사실에 대해조금도 으스대지 않더군요. 사람들이 고마워하면 형은 늘 “내가 뭘 했다고... 나야 소개만 시켰지. 그 다음은 자기네들이 다 알아서 한 거지.” 물론 형의 말이 틀리지는 않아요. 하지만 형의 손길이 없었다면 그들은 지금하는 일을 훨씬 더 늦게 시작했을지도몰라요. 사람들의 적성과 능력을 파악하여 (거의 무의식적으로) 그들 스스로 그것을 더 잘 키울 수 있게 돕는 형을 두고 형과 형제처럼이름이 닮은 석훈이 형이 한 말이 있죠. “너야말로 진정한 매니저야.” 요즈음 형은 나이 들어 그런 일도 못한다고 말하죠. 그러나 예전 같진 않다 해도 형은 언제까지나 그렇게 살 거예요. 왜냐, 형은 좋은 사람들을 곁에 두고 싶어하는 은근한 욕심쟁이거든요.


 몇 달 전 형은 결혼을 했지요. 아는 사람 모두에게 ‘생각 없이 똑똑한 여자’가 내 배필감이라고 노래를 부르고 다녔던 형은 뒤늦게야 그런 배필(물론 절대 아니라고 우기지만)을 만나 한 가정을 꾸렸어요. ‘여러분이 흐뭇하시도록 잘 살겠습니다’라고 했지요. 내년이면 한 아이의 아빠가 되는 형, 이젠 셋이서 늘 흐뭇하게 살아가소서. 허나, 나와 약속한 것은 잊으면 안 돼요. 결혼해도 언제까지나 나랑 놀아준다는것. 하하하.


곽영미(89·영문) 동문은 동대학원 영문학과를 졸업 후 현재 전문 번역가로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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