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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 쉽터 '삶이보이는 창' 운영하는 김정대(81물리)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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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06-05-17 16:10 조회14,54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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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2006-05-17]

 지난 13일 인천시 부평구 십정동 396의6 2층.

“여기여, 아저씨! 호프 2000이요.”

“예~. 곧 가겠습니다.”

밤 8시가 넘자 손님들이 한둘씩 들어오기 시작한다. 지하철 1호선 동암역에서 5분 거리여서 부평과 주안공단, 남동공단에서 퇴근하는 노동자들이 쉬어가기엔 안성맞춤인 곳. 노동자들 뿐 아니라 인천지역 엔지오 활동가들이나 봉사자들이 주로 찾는 이곳 ‘삶이 보이는 창’을 단골들은 ‘삶창’이라고 부른다.

삶창에 가면 가톨릭 신부와 수사가 서빙을 한다. 사람 대접 못 받는 이들을 귀한 손님으로 모시며, 함께 어울리기 위해 김정대(81.물리) 신부가 삶창을 연지 벌써 2년. 이제 술집 아저씨가 다 된 듯 김 신부는 거품 하나 없이 생맥주를 뽑아낸다. 솜씨가 일품이다. 그러나 주방장인 김성자 마리아 씨가 보기엔 여전히 요령 없긴 마찬가지다. 거품도 조금 포함시켜야지, 저렇게 따라줘서 뭐가 남겠냐는 것이다. 생맥주야 그렇다 치자. 노동자들이 와서 소주만 시켜놓고 술을 마시고 있으면, “저렇게 깡술 마시면 속 다 버린다”면서 시키지도 않은 안주를 가져다준다.

“신부님이 저렇게 주책 없이 서비스만 갖다 주니, 어떻게 장사가 되겠어요?”

마리아씨의 면박 아닌 면박에 김 신부는 머리만 긁적인다.

“그래도 신부님은 오뎅탕도 끓일 줄 알고, 두부탕도 할 줄 알지. 범생이 수사님은 라면 밖에 끓일 줄 아는 게 없으면서 공부나 하실 것이지, 뭘 한다고 술집엔 와서 고생인가 몰라.”

“마리아님, 저 한치도 잘 굽잖아요.”

이진현(91.사학) 수사가 마리아씨에게 항변하려다 말고 주문을 하기 위해 쳐다보는 손님에게 날래게 달려갔다.

“지금은 웨이터 다 됐어요. 처음엔 눈치 코치가 하나도 없더니.”

앞에선 면박도 서슴지 않던 마리아씨는 김 신부와 이 수사가 안주를 들고 손님 테이블로 들고 가자 “그래도 우리 신부님, 수사님 얼마나 정이 많은데요”라고 자랑한다.

그런 마리아씨는 소아마비로 오른손을 쓰지 못한다. 그런데도 한 손만으로 하는 손놀림이 두 손 가진 사람 못지 않다. 로만칼라를 감춘 신부와 수사가 웨이터 못지않게 서빙을 하는 것처럼.

안주를 들고 간 김 신부와 이 수사는 아예 손님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온종일 삶터에서 목구멍에 단내가 나게 일하고 온 손님들에게 김 신부는 술을 권하고, 이 수사는 손님의 추임새까지 넣으며 흥을 돋운다.

“브라보.”

성당의 높은 제단에 계셔야 할 신부님과 고상하신 수사님이 술 시중을 들고 말상대를 해주자 활기가 돌아온 손님이 김 신부와 이 수사에게 건배를 제안한다. 오늘도 삶창의 밤이 심상치 않을 모양이다.

“술 되고 안주 되어 ‘사람’ 대접합니다”

김정대 신부가 ‘삶창’ 차린 이유

‘먹물들’에겐 신앙과 지식도 관념적으로 흐르기 쉽다. 좀 더 나은 위치에 서서 베푸는 것엔 익숙하지만, 계급장 떼고 하나가 되는 것엔 아연 실색하기 마련이다. 더구나 어떤 성직보다도 ‘권위 있는’사제에게 그것은 더욱더 어려운 시험으로 보인다. 삶창의 김정대 신부가 이 더위를 식혀주는 시원한 호프처럼 다가오는 것도 그 때문이다.

김 신부의 그런 도전은 삶창이 처음은 아니다. 예수회에 입회해 수도원에서 수련을 마친 다음 가톨릭노동청년회에서 간사로 활동하던 그는 1994년 10월 ‘특별한 체험’을 시작한다. 서울 영등포 문래동의 한 공장에서 일한 것이다. 스테인리스 원판에 광을 내는 노동은 일이라곤 해본 적이 없는 그에게 감당하기 쉽지 않았다. 그래서 공장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 안에서 피곤으로 곯아떨어지곤 했다. 그러나 그는 함께 일하던 공장노동자 8명과 함께 때론 술잔을 기울이고, 노래방에서 <남행열차>를 부르며 어울렸다. 그가 6개월 뒤 회사를 그만둘 때까지 아무에게도 그의 신분을 말하지 않은 위장 취업이었다. 하지만 이 체험이야말로 계급장이란 위장에서 벗어나 그가 진정으로 사람들과 어울릴 용기를 갖는 계기가 되었다.

김 신부가 노동자들과 첫 인연을 맺은 것은 서강대 물리학과를 졸업하고 1988~89년 2년 간 인천 부평공단의 반도체부품회사의 엔지니어로 일할 때였다. 그는 노조에 가입할 수 없었던 관리직급이었지만, 공장에서 노조가 파업할 때 구사대가 되어 주리라던 사용주의 기대와 달리 노조원들의 동조 파업에 나섰다. 그로 인해 한 달간 출근 정지를 당했고, 결국 회사를 그만두었다. 그 일을 계기로 삶에 대해 고뇌하다 1990년 2월 예수회 수도원에 들어가게 됐다.

그런데 어쩌다 술집아저씨가 될 생각까지 할 수 있었을까. 그가 1996년부터 5년간 호주에서 예수회 신학원을 다닐 때였다. 멜버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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