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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만불 쾌척한 전후자(64 영문) 동문 '서강가젯'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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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22-04-08 09:40 조회9,41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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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강이란 창을 통해 더 넓은 세상을 바라본, 전후자 동문(영문 64)을 만나다 

 

미주서강동문회에 기부금 50만 달러를 쾌척하고 계속 기부를 이어나갈 결심을 한 계기, 미국에서의 삷과 서강에 전하는 메시지를 들어 보았습니다.

 

안녕하세요! 먼저 간단한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1964년 서강대학교 영문학과에 입학하여 1968년에 졸업한 전후자라고 합니다. 영어 이름은 스텔라 후자 김이며 1975년 12월 미국으로 이주해 현재 미국 워싱턴 주에 거주하고 있습니다. 2008년부터 2020년까지 치과 기구 제조회사인 ContacEZ의 회장으로 일했으며 2020년부터 현재까지는 Pacific One Assets Development & Management의 회장 겸 CEO직을 맡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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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부를 결심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무엇인가요?

재학 중에 7학기 동안 장학금을 받았습니다. 졸업하고 여유가 생길 때 서강에서 받은 도움을 되돌려 주기로 남편과 동의했습니다. 그동안 저와 남편 그리고 우리 아이들이 즐겁고 보람 있는 생활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우리 모교의 뛰어난 교육 덕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 기부금은 시작에 불과하며, 앞으로도 계속해서 서강에 기부할 계획입니다.

 

 

이한택 신부님의 이름을 딴 장학 기금과 Bernbrock 신부님의 이름을 딴 고전현〮대 영문학 도서 기금을 건립하기를 바란다고 하셨는데요, 두 신부님으로부터 어떤 영향을 받으셨는지 궁금합니다.

제가 학교에 다닐 때, 성공적인 삶을 영위하던 아버지께서 사업에 어려움을 겪으시고 몸이 편찮아 지기 시작하셔 온 가족이 힘든 시간을 보냈습니다. 아버지께서 돌아가신 후 감사하게도 천주교와 예수회 신부님들의 도움을 많이 받았습니다. 이한택 신부님은 대학 시절뿐만 아니라 졸업 이후에도 꾸준히 저의 멘토가 되어 주셨습니다.

또, 가톨릭 신자인 제 가족과 신실한 장로교 교인이신 남편의 가족이 결혼식장을 놓고 시련을 겪은 적이 있습니다. 그때 이한택 신부님께서는 가톨릭교회에서 결혼식 전날 밤에 혼인성사를 드리고 다음날에 교회에서 결혼식 예배를 드리면 어떠냐며 도움이 되는 조언을 해주셨습니다. 사제로서 진보적인 종교관을 지니셨으며 사려 깊고, 유연하고, 인정 있는 시각을 가지셨던 이한택 신부님으로부터 세계와 현명하게 상호 작용하는 태도와 지혜를 배울 수 있었습니다.

번 -불럭 신부님은 영문학과 영시에 대한 깊은 지식을 가진 훌륭한 교수였습니다. 학구에 대한 열정은 나이, 지역, 그리고 공간을 초월하는 것이라고 하시며 가지고 있는 지식 전부를 우리에게 강의하고 싶어 하신 것은 아직도 생생하게 머리에 남아 있습니다. 존 키츠, TS 엘리엇, 엘리자베스 브라우닝, 셰익스피어와 워즈워스 등의 시구절이 아직도 기억에 남아 있네요. 그 분은 제가 문학을 이해하는데 큰 영향을 준 교수님이십니다.

 

  

 

힘든 시기에 예배당에서 위안을 얻으셨고 현재와 미래의 학생들도 동문님이 그러셨듯 예배당에서 위안과 안정을 얻기를 바란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동문님과 같은 시기를 겪고 있는 학생들에게 전하고자 하는 말씀이 있다면 부탁드립니다.

위에 말씀드린 대로 제가 학교를 다니던 시기에 아버지가 편찮으셔서 힘든 시간을 겪었어요. 다행히도 가톨릭 교회와 예수회 신부님들은 힘든 시기를 겪는 저에게 뜻깊은 지원을 아끼지 않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복도의 학생 예배실은 저에게 위안을 제공해주는 마음과 정신의 쉼터였으며 신성한 공간이었고 제 자신을 두려움과 스트레스로부터 지켜주곤 했습니다. 이 공간에서 저는 기도를 통한 평화로움을 느꼈으며 앞으로 나아갈 힘과 긍정적인 에너지를 얻었습니다.

서강 학생들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앞으로 여러분은 인생을 살아가며 고난을 마주할 것이고 그 중 어떤 고난은 너무나 강력해서, 헤어 나오기 힘들 것입니다. 그러나 고통스럽고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언제나 앞으로 나아갈 방법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시고 성당에서 위안과 지혜와 힘을 얻기를 바랍니다.

 

  

인권 강의 개설 및 장학금 유치를 바라신다고 하시며, 어머니로부터 자유라는 가치의 중요성을 깨달으셨다는 부분이 매우 인상 깊었습니다. 어머니로부터 어떤 영향을 받으셨는지 궁금합니다.

저희 어머니는 1930년대 말과 1940년대에 걸쳐 억압과 편견에 맞서 자유를 지키기 위해 노력하던 여성운동의 선구자이십니다. 1940년에 KBS 역사상 두 번째 여성 아나운서가 되셨지만 1943년 같은 방송국의 프로듀서였던 아버지와 결혼하셨고 기혼 여성이 직업을 갖는 경우가 거의 없었던 당시 사회적 분위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방송일을 그만두셔야 했죠. 어머니는 성공한 사업가의 아내이자 Parents-Teachers-Association (학부모 교사 연합회)의 회장을 지내셨으며 재능 있는 동양화 화가이셨어요. 그분께서 현대에 태어나셨다면 방송일을 계속 이어 나가셨을 것이고 그보다 훨씬 더 넓은 분야에서 활약하셨을 것입니다. 아버지 역시 여성은 남성보다 유능하지 못하다는 당시의 사회적, 문화적 편견에 맞섰던 분이십니다.

부모님께서 저에게 그러셨듯 저 역시도 제 아이들에게 인간평등의 가치를 중요하게 가르쳤습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제 딸 실라 김이 인권 변호사가 된 것은 우연이 아닐 것입니다. 실라는 워싱턴 주 밴쿠버에서 변호사 비용을 감당하기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변호사 일을 시작했고 국재 변호사 자격증을 취득한 후 아프리카, 아시아, 동유럽 등지에서 인권 침해 사태를 조사 파악하기도 했으며 UN을 비롯한 여러 국제 기구에서 인권 보호를 위해 일했습니다.

저는 오래전부터 인권 문제에 관심을 가져왔는데, 이것은 아마 부모님과 한국 전쟁의 기억에서 싹텄을 겁니다. 오늘날 우크라이나를 비롯해 아프가니스탄, 이라크, 예멘, 그리고 남수단 같은 여러 나라에서 일어나는 일처럼 당시 우리도 전쟁으로 인해 우리 삶의 터전을 잃어버렸거든요. 서강은 우리 모두는 동등한 존재로 태어났으며 평등이라는 가치를 존중해야 하고 잘 보전해야 한다는 가치관을 갖게 했습니다. 이것이 제가 서강의 인권 교육에 기여하고 싶은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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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문적 역량이 뛰어난 동시에 재정적 보조가 필요한 여학생을 위한 장학금을 개설하시며 성평등을 중요한 가치로 생각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1960년대 당시 여성으로서 대학에 진학하는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을 것 같은데 대학교에서의 경험이 동문님의 가치관 형성에 있어 영향을 미친 부분이 있는지 여쭈어도 될까요?

1960년대에 젊은 여성이 대학에 진학하는 것은 그리 흔하진 않았지만 점점 더 많은 여성들이 대학 교육을 추구하는 추세였습니다. 1930년대에 대학에 진학하셨을 정도로 풍부한 교육의 기회를 누리셨던 제 부모님께서는 언제나 교육의 가치와 지식의 힘을 강조하셨어요. 서강대학은 젊은 여성이었던 저에게 제 역량을 발휘하고 꿈을 이룰 수 있도록 지원과 격려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예수회 신부님들과 교수님들은 제 능력에 대한 진실한 믿음이 내적에서 자라날 수 있도록 인도해 주셨지요. 항상 더 강하고, 자신 있으며 용기 있는 사람이 되고 싶던 수줍은 소녀에게 서강에서의 경험은 스스로를 믿을 수 있게 했습니다. 그래서 저도 예전의 저와 같은 상황에 놓여있는 젊은 여성들을 돕고 싶은 마음입니다.

 

 

동문님께서는 1960년 문을 연 서강대에 64년도에 입학하셨는데, 이제는 개교한지 60년이 넘은 서강대를 바라보면 감회가 남다르실 것 같습니다. 초기의 서강대 구성원으로서 현재의 서강대를 보았을 때 느끼시는 점이 있을까요?

서강의 작고 아늑한 캠퍼스에서 예수회 신부님들을 비롯하여 혁신적이고 열심이셨던 교수님들로부터 강의를 듣고 함께 지낼 수 있었던 대학 시절을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동료 학생들과 교수님들과 친밀하게 교제하고 함께 배우면서 제가 꿈꾼 목표는 어떤 것이든 해낼 수 있겠다는 자신감을 얻었습니다.

미국으로 이주하고 난 뒤 네 번 한국과 서강대학교에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워싱턴 주 지사, Clark College 교환학생의 책임자로서 공식방문한 것이었기 때문에 자세히 견학은 못했지만 명문 대학 교육 기관으로 성장한 서강대학교의 높은 건물과 큰 캠퍼스를 보고 매우 반가웠습니다. 동시에 서강만의 유일한 장점을 잃지 않기를 바라면서 따뜻한 캠퍼스 분위기와 학생들에게 친밀한 교육을 이어 가기를 소망했습니다. 새로운 아이디어를 포용하고 믿음과 규율을 통해 한계를 뛰어 넘으려는 서강의 정신이 대대로 계승되기를 바랬습니다.

 

  

서강에서의 시간이 동문님께 전환점이 되었으며 특히 세상을 국제적으로 바라보는 시각을 갖게 되었다고 하셨는데 이러한 시각이 미국으로 이주하고 정착하시는 과정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지 궁금합니다.

재학 시절 예수회 신부님들과 새로 임용된 교수님들이 가르치는 수업을 들으며 세계 여러 나라의 생활과 문화를 배울 수 있었습니다. 영어 문학, 미국 현대 소설과 시, 유럽사와 미국사, 한국 문학, 신학, 그리고 철학 등의 수업을 들으며 당시의 한국에서의 삶을 중요시함과 동시에 한국을 넘어 더 넓은 세계를 꿈꿨습니다. 서강은 세계를 한국에 도입했고 그 결과 한국은 세계로 나아갈 수 있었다고 봅니다. 여러 지역에서 학위를 취득하고 세계적인 시각을 지니셨던 신부님들과 교수님들과 함께 자유롭게 교류할 수 있는 환경은 제 생애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여러 삶에 관한 다양한 이야기들을 접하면서, 우리가 부딪히는 인간평등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특히 여성들이 겪는 불평등에 대해 생각해보곤 했습니다. 가족, 사회, 그리고 세계 속에서 여성들의 기여와 헌신에 깊은 관심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세상을 더 국제적인 시각에서 바라보게 되었고 매일 새로운 지식을 습득하는 것을 즐거운 과제로 삼게 되었습니다.

 

 

영문학을 전공하셨던 경험이 졸업 후 직업활동이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쳤나요?

영문학을 공부한 덕분에 비행기에 오르기 전부터 책을 통해 세계의 여러 지역을 여행할 수 있었고 그곳의 삶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서강의 엄밀한 영어교육과 당시 새로 개설된 어학실 덕분에 영어회화를 불편없이 할 수 있게 되었고, 서울에서 정부고위 관리와 그분들의 가족들에게 영어 회화를 가르치면서 알게 된 인맥을 통해 지금의 제 남편을 만나게 되었죠. 치의학을 전공한 남편은 치과학계의 진보적인 발전을 위해 연구하길 원했고 저는 더 나은 삶을 꿈꾸며 1975년 미국으로 떠나기로 결심했습니다.

미국에서는 영문학 학위와 유창한 영어회화 덕분에 낯선 상황에 빠르게 적응할 수 있었습니다. 워싱턴 주 공무원 시험을 높은 점수로 통과하여 즉시 교통부 사무원으로 채용되었고 3년 후에는 Clark College의 ESL(외국어로서의 영어) 강사로 일하게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영어로 쓴 책, 소설, 시, 그리고 작가들에 대한 공통 화제를 통해 이웃들과 직장 동료들과 쉽게 가까워질 수 있었어요.

그러나 더 중요한 점은 서강대 재학시절 미국문학과 미국역사 수업시간에 배운 미국적 가치관과 정신입니다. 자유, 개인주의, 언론의 자유, 종교의 자유, 실용주의, 봉사 정신, 정당한 법의 절차, 진보성, 그리고 ‘아메리칸 드림’을 이해하고 실천에 옮기려고 시도했던 것은 미국생활에 적응하는 데에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아직까지도 미국적 가치관과 정신을 생활에 실천하려고 노력하고 있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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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강의 기부자로서, 서강의 선배로서, 혹은 인생 선배로서 서강 학생들에게 전하고자 하는 말씀이 있으시다면 부탁드립니다.

저는 학생들에게 내적 자기신뢰를 가지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우리는 모두 독특한 존재입니다. 자신의 목표를 이룰 수 있도록 꿈을 갖고, 친밀한 계획, 그리고 비전을 가지고 원칙에 의해 품위 있게 밀고 나가세요.

“하늘에 끝이 없고 네가 가능한 만큼 넓게 날개를 펴고 하늘 높이 날 수 있단다.” 이것은 제 아이들의 생일 카드에 적어주곤 했던 말입니다. 먼저 스스로 자기를 사랑하고 존중하며 우리가 이 세상을 살면서 매일 행복하고 건강할 권리를 하나님께서 주셨다는 것을 기억하세요. 행운을 빕니다.

 

글 : 장수빈 서강가젯 학생기자(20 영문)

 

서강가젯에서 전문 읽기(전후자 동문 이력 포함)

https://bit.ly/3r9Hzw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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