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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시대의 장인-교육연극 개척자 박주영(85·철학) 동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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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유진아 작성일05-09-09 22:47 조회22,99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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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곧 연극무대, ‘행동화 교육’의 선구자 되겠다”

박주영(85.철학) 달라에듀테인먼트대표/경희대 연영과 교수

 

서강연극회 최다 연속 출연한 살아있는 전설…

개량한복에 실험극 대본끼고 뉴욕무대서도 주연 맡아

귀국 후 교육연극기업 시작 연극 통한 ‘행동화교육’ 은 대기업 사내연수 단골메뉴 

연극이 심어주는 자신감은 자폐아 말문도 터지게 해 

 

처음엔 무대용 메이크업을 한 줄 알았다. 또렷한 눈매와 진한 눈썹, 오똑한 콧날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연극배우에게 입체적 이목구비는 필수요건인 걸까. “분장하셨나요?” 하고 묻는 필자의 엉뚱한 첫인사에 그는 유쾌한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그런 이야기 많이 듣습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맨 얼굴인 걸요. 1990년대 초반 극단 무대에 설 때마다 분장사들이 제 얼굴을 보고 ‘무대용’이라고 감탄하곤 했죠. 따로 메이크업이 필요 없다고. 그러고 보면 저와 연극은 정말 운명인가 봐요.”

 

‘교육연극 전문가’ 박주영(85·철학) 동문은 ‘삶은 곧 연극’이라고 믿는 사람이다. 모든 인간은 결국 삶이란 무대에서 롤플레이(역할극)를 하며 살아가고 있다는 것. 1985년 ‘서강연극회’와 처음 인연을 맺은 후, 그에게 연극은 신념이요 인생의 목표가 됐다. 소나기가 한차례 퍼붓던 8월19일 오후, 서울 역삼동 달라 에듀테인먼트 사무실에서 만난 박주영 동문은 청명한 음색으로 연극에 얽힌 자신의 인생사를 재미나게 들려주었다. 기승전결이 뚜렷하고, 낭만과 모험으로 가득 찬 그의 이야기는 시간의 흐름마저 잊게 할 만큼 강력한 마력을 지니고 있었다.


어디서부터 이야길 풀어나가야 할까. 아직 우리에겐 생소한 교육연극의 개념부터 짚고 넘어가는 것이 순서겠다. 교육연극이란 연극이란 수단을 통해 교육적 목표를 달성하는 것을 의미한다. 관객이 연극을 관람하고 그 내용에 적극적으로 반응함으로써, 질문에 대한 정확한 답을 찾아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1990년대 초반, 극단 작은신화와 연우무대에서 배우와 연출자로 이름을 날리던 그는 우연히 한 아동극단의 지도를 맡게 되면서 교육연극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1992년 어느 날, 불지사(불교단체가 운영하던 문화사업체)의 사장님께서 아동극 ‘손오공’의 연출을 맡지 않겠냐고 제안해왔어요. 하지만 저의 처음 대답은 ‘노(no)’였습니다. 단지 연극을 한번 무대에 올리기 위해 아이들에게 의미도 모르는 대사를 억지로 외우도록 강요한다는 건 비교육적인 일이기 때문이죠. 일회성에 그치지 않고 아이들의 성장과 발달에 지속적인 영향을 줄 프로그램을 만든다면 ‘손오공’ 연출을 생각해보겠노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다행히 사장님이 고심 끝에 제 부탁을 받아들였습니다. 극단 프로그램 운영은 제게 전적으로 일임하셨고요.”


사람들은 ‘잘 나가던 배우가 갑자기 무슨 아동극을 하냐’며 수근대기도 했지만, 박 동문은 자신의 선택에 흔들림이 없었다. 자신이 손수 만들어온 연기 워크숍 매뉴얼을 토대로, 아이들에게 발성연습을 시키고 무대에 당당히 설 수 있는 자신감을 심어주었다. 이렇게 탄생한 것이 바로 어린이극단 ‘굴렁쇠 어린이’다.


극단에 들어온 아이들은 연극 연습에 참여하며 서서히 변해갔다. 한번도 친구들 모임에 끼지 못했던 한 자폐아는 어느 날 “선생님이 틀렸어요!” 하며 입을 열었다. 꾀꼬리 같은 목소리로 노래를 불러 사람들을 놀라게 할 정도였다. 절에서 자라 말을 잃었던 고아 정호는 “내가 형이니까 너희 괴롭히지 마!” 하며, 자신의 의사를 표시하게 됐다. 이렇듯 연극이 사람의 인생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깨달음은, 그가 교육연극에 인생을 걸기로 결심한 중요한 계기가 됐다.

 

“교육연극에 대한 이론적 배경을 탄탄히 하기 위해 미국 유학을 결심했습니다. 당시 제 연기 워크숍 프로그램에 대한 한 유학파 인사의 터무니없는 비난도 유학을 결정하는데 영향을 미쳤고요. 그는 당시 제가 운영하던 프로그램을 보고, ‘외국 것을 그대로 베낀 게 아니냐’는 의혹을 제기했습니다. 그러나 외국서적은 거의 읽지도 않았고, 주로 창작 희곡을 써왔던 제가 어떻게 표절을 할 수 있겠습니까.  


이 참에 선진국의 교육연극 연구가 얼마나 이뤄졌는지 제 눈으로 확인해봐야겠단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1994년 NYU(뉴욕대)에서 교육연극을 본격적으로 공부하기 시작했죠.”


그가 학위를 마치는 데는 자그마치 6년의 시간이 걸렸다. 3년 반 동안은 학비를 버는데 전력투구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6년의 시간은 결코 헛되지 않았다. 그는 한국인 유학생 최초로 NYU 대외공연 무대에서 주연으로 등장했다. 철제 비행기를 최초로 띄운 중국인의 일대기를 다룬 연극 ‘드래곤 윙즈(Dragon Wings)’에서 당당히 주인공을 거머쥔 것. 생활한복을 입고 캠퍼스를 누비며, 늘 실험적인 연극 대본을 내놓던 그는 미국인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2000년 한국으로 돌아온 그는 교육연극을 한국에 뿌리내리기 위한 본격적인 작업에 착수했다. 2002년 경희대 연극영화과 전임교수가 되었고, 올해 경희대에 국내 최초로 교육연극 과정을 신설했다. 그의 행보는 비단 학문적 연구에 머물지 않았다. 교육극단 달팽이로 시작해 지난해‘달라 에듀테인먼트’로 거듭난 교육연극 기업을 이끌며, 그는 의사소통의 방법을 가르치는‘날으는 신발끈’, 독도의 야생화 이야기를 다룬‘꽃. 섬. 왕자’등 다양한 연극을 무대에 올렸다.

 

박 동문이 최근 주력하고 있는 것은 ‘행동화 교육’이다. 머리로 생각하는 것에서 벗어나, 연극을통해 문제점을 찾고 행동의 변화를 이끌어내는 것. 2002년이 프로그램이 처음 도입되면서 국내외 기업들이 앞 다퉈 행동화 교육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삼성건설, 푸르덴셜, 삼성화재 등의 기업에서 교육연극 프로그램을 통한 사내연수를 실시해 폭발적 반응을 얻기도 했다.

 

“삼성건설에서 진행한 연극이 기억에 남네요. 저희는 여러 가지 에피소드를 만들기 위해서 다섯 달 가까이 기밀자료까지 검토하며 기업의 업무를 파악하고, 사원들의 애로사항에 귀 기울였습니다. 여러 상황에서 발생하는 공사 하자를 어떻게 없애느냐가 에피소드의 공통된 주제였죠. 사원들과 연기자들이 합동으로 상황극을 무대에 올렸고, 연극을 통해 사원들은 궁극적으로 하자의 원인을 밝혀낼 수 있었습니다. 처음엔쭈뼛쭈뼛 하며 발표를 주저하던 사원들도, 일단 토론의 물꼬가 터지자 자신의 의견을 마음껏 개진하기 시작했어요. 이것이 바로 TIE(Theatre In Education)의 힘입니다.”

 

사실 연극과의 만남을 통해 가장 드라마틱한 변화를 겪은 이는 박주영 동문 자신이다. 서울의 부유한 사업가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조용히 책을 파던 책상물림에 불과했다. 고교시절에는 문예반 활동을 하며 시와 소설, 희곡을 쓰던 문학청년이었다. 이렇듯 조용한 성품의 모범생은 비로소 무대를 장악하며 카리스마를 떨치는 배우로 거듭난 것이다.

 

“캠퍼스를 지나다 우연히 ‘서강연극회’ 신입부원 선발 공고를 보게 됐죠. 무슨 힘에 이끌렸는지 동아리방으로 찾아가 시험에 응했어요. 며칠 후 합격자 대자보가 붙었는데, 제 이름만 어중간하게 써 있어 대체 합격 여부를 알 수가 없는 거예요. 근데 차마 용기가 없어 동아리 선배에게 합격 여부도 묻지 못했습니다”

 

후일담에 따르면, 그는 원래 불합격 처리될 예정이었단다. 오디션 당시 무척 긴장한 그가 코미디 대본을 비극적으로 낭독해버렸기 때문. 그러나 이정향(83·불문) 동문의 생각은 달랐다. 박 후배가 성실해 보이니 한 번 합격시켜 보자고 제안한 것이다. 그는 선배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최다 연속 출연자 및 무대 감독’이란 그의 타이틀은 연극회의 어느 후배도 넘보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그가 연극을 업으로 삼겠다고 나서자, 집안의 반대가 만만치 않았다. 어린시절부터 1등을 도맡아 하던 그에게 쏟아지던 집안의 기대는 컸다. 법관이나 의사가 되길 바라던 집안 어른들의 바람을 뒤로 하고, 그는 ‘고민하는 인간’이 되길 자처했다. 굳은 심지야말로 ‘교육연극 개척자’ 박주영을 만든 가장 큰 원동력인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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