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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04-09-21 11:09 조회14,88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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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대여 시스템에 냉가슴 앓는 출판계 

 

“3000원짜리 만화책 한권을 팔면 만화가에겐 인세 300원이 돌아옵니다.” 

 

한 권의 책을 백 명의 독자가 빌려본들 결국 1권 분량의 인세밖에 벌지 못하는 만화가들이 즐겨 외치는 ‘300원 타령’이다. 그리고 거미줄 쳐진 화실에서 보일러가 들어오지 않아 입김을 내뿜으며 라면을 먹는 만화가의 그림이 이어진다. 언제부턴가 책은 사서 보는 것이 아니라 빌려서 보는 것이 되어버린 우리나라의 독자들에게 왜 책을 사보아야 하는지를 설득하기 위해 가장 많이 써먹는 방법이다. 책을 빌려보면 만화가는 돈을 못 벌어서 가난합니다, 라는 식의 자극적인 표현으로 문제를 이슈화한 것이다. 

 

언제부턴가 불기 시작한 책 대여점의 열기는 IMF의 여파로 일터를 잃은 가장들에겐 새 사업의 희망을, 책을 읽지 않는 국민들에겐 교양을 쌓을 기회를, 이라는 허울 아래 전국 방방곡곡으로 퍼져나갔다. 경제사정이 어려워지면서 문화활동에 돈 쓸 여유가 없어진 독자들은 ‘책 한권에 단돈 몇 백원’이란 공식에 재빨리 적응했다. 당시 막 만화가로서의 경력을 시작한 나도 초등학교 만화방 시절 이후 손을 떼었던 책 빌려보기에 동참했을 정도니 말이다. 

 

부끄러운 사실이지만 잠시나마 대여점을 들락거리던 그때 나는 몰랐다. 심지어 국가적으로 장려하고 있던 책 대여 시스템이 ‘소비자의 소비가 생산자에게 수익으로 돌아간다’는 기초적인 시장원리를 송두리째 무시한 것이었음을. 

 

내가 책을 위해 지불한 돈은 책을 생산한 작가와 출판사, 인쇄소가 아닌 대여점 주인의 통장에 쌓인다는 것을. 이 비정상적인 소비가 출판시장의 존재에 하나의 위협이 되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해 보면 너무나 당연한 오류였다. 필요한 물건이 있으면 돈을 주고 구입을 하는 것이 정상적인 자본주의 시장의 룰이다. 한번만 신고 말건데, 라며 운동화를 반의 반의 반의 반 값에 빌리진 않는다. 책도 별 다를 것 없다. 보고 싶으면 제값을 내고 구입하는 것이 당연한 상품 중 하나인 것이다. 돈이 없을 땐? 안사면 된다. 돈이 없는 사람은 새 운동화를 포기하는 수밖에! 

 

책을 만드는 1차 생산자도 이토록 무지했는데 일반 독자들은 어떨까. 조금이라도 많은 독자들에게 실태를 알려야겠다는 경각심으로 시작한 것이 바로 ‘300원 타령’이다. 돈이 없으면 책을 읽을 수 없는 독자 자신의 불행보다 가난한 만화가의 불행이 더 인정하기 쉬울 테니 말이다. 덕분에 많은 독자들로부터 모르던 사실을 알아 놀랐다, 앞으로는 책을 사보도록 노력하겠다, 라는 긍정적 반응을 얻었다. 이것이 책 구매로 이어지기까지엔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하겠지만 사실을 알린다는 애초의 목표는 제대로 이루어지고 있는 듯 보인다. 단 한가지의 사실을 빼고. 

 

“당신들이 굶는다길래 '아까운' 돈 써가며 만화책을 ‘사주었건만’ 잘 먹고 잘살고 있잖아!” 

 

심심치 않게 들리는 이런 항의에 나는 지하철에서 헤진 옷을 입고 구걸 하다가 그랜저 타고 퇴근한다는 거지가 된 기분이다. 사실 만화가라고 반드시 가난할 리 없다. 작업량에 따라 극도의 생활고에 시달리는 작가가 있는가 하면 보일러 팡팡 틀면서 내킬 땐 언제든 탕수육을 시켜먹을 수 있을 정도의 작가도 많다.  

 

책 대여의 일반화로 전체적인 수입이 하양평준화 된 것은 사실이지만 끝도 없이 가속이 붙는 출판계의 추락을 멈추기 위해 모든 만화가는 탕수육을 구경도 못해본 생활고 작가임을 자처한다. 만화가의 손에 300원을 ‘쥐어주는’ 심정으로 책을 사는 독자들에게 감사하며 오늘도 만화 속 만화가들은 누더기 옷을 차려입고 ‘300원 타령’으로 ‘소비’가 아닌 ‘자비’를 부탁한다. 정상적인 문화소비국의 길은 어째 비정상적인 일의 축제가 되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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