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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듣는 은사님 명강의 4. 금경축 맞은 프라이스(Basil M. Price)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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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04-06-09 16:06 조회13,81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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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제.교수.노동 운동가로 반세기 '한국의 삶' 

50년대 말 발로 뛰며 모교 설립 궂은일 도맡아

 

1966년 한국 최초 노동문제 전문연구소 개설

 

“1957년, 11월 14일, 오전 10시 반, 인천항에 도착했습니다.” 프라이스 신부는 한국 땅에 상륙하던 순간을 스타카토의 음성으로 회상했다. 이미 팔순에 접어든 노신부께서 어떻게 그렇게 똑똑히 기억하시냐는 반문은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었다. “기억하고 있으니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인데 그런 건 왜 묻느냐”고 면박을 주셔도 할 말이 없다. 연월일시와 장소만을 들었을 뿐인데, 50년 가까운 과거의 장면이 생생하게 펼쳐질 것만 같다. 프라이스 신부의 기억 창고 속에는 생애의 대부분을 보낸 한국과 서강에서의 일들로 가득한 듯했다. 

 

프라이스 신부는 1923년 미국 네브라스카주의 독실한 가톨릭 집안에서 태어나 46년 세인트루이스대학을 졸업했다. 이후 세인트루이스대학 대학원에서 수학하며 철학석사, 문학석사를 취득했고, 이어 세인트메리칼리지에서 신학석사를 마친 1957년 곧장 한국으로 부임했다. 1954년부터 신부복을 입기 시작해 올해로 꼭 50년이 됐다. 한국 땅에 도착한 서른 넷의 젊디젊은 프라이스 신부가 제일 하고 싶었던 일은 교육이었다. 하여 서강대학 설립이라는 임무를 부여받은 것이었고, 게페르트 신부, 길로렌 신부, 김태관 신부, 헙스트 신부 등과 함께 벽돌 하나 없던 노고산에 그야말로 학교를 짓기 시작한 것이다. 인천세관에서 수입한 물품들을 인수하는 일이며 학교 설립 요건을 갖추기 위해 뛰어다니는 온갖 일들이 프라이스 신부의 몫이었다. 교육에 생애를 걸기로 마음먹었다는 점에서 프라이스 신부가 서강대학과 인연을 맺은 것은 어쩌면 축복 같은 일이었다. 현대 한국의 대학사를 풍요롭게 하는 데에 서강대학의 역사는 큰 몫을 차지했고, 그 대부분의 순간에 프라이스 신부는 현장의 일꾼으로 땀흘렸기 때문이다. 그러한 노력 속에 서강대학교는 1960년에 개교할 수 있었고, 프라이스 신부는 사학과 교수로 부임하여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을 맡게 됐다. 

 

고적답사 즐거운 추억거리 

 

프라이스 신부는 사학과에서 미국사, 교회사, 러시아사 등을 강의했다. 그와 함께 영어와 라틴어 강의도 개설했다. 사학과에서 고적답사를 하며 학생들과 어울린 일은 지금도 즐거운 추억으로 남아 있다. 사학과의 교수진이 완전히 갖춰진 1969년부터 프라이스 신부는 더 이상 역사 과목을 가르치지 않았다. 이 시기에 프라이스 신부에게는 따로 막중한 사명이 있었다. 그것은 한국 사회의 기초를 바꾸는 작업이었다. 프라이스 신부는 1962년부터 한국의 노동 문제를 심각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당시 노동자들이 처한 조건은 매우 열악했지만 이를 거론할 수 있는 노사관계도, 개선을 요구할 수 있는 노동운동도 제 모습을 갖추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문제를 풀어내기 위하여 프라이스 신부는 1966년 6월 한국 최초의 노동문제 전문연구소인 ‘산업문제연구소’를 서강대학교 내에 세우게 된 것이다. 

 

평소 민주주의적인 공동선을 추구하는 데에 깊은 관심을 기울여 온 프라이스 신부로서는 어쩌면 당연한 선택을 했는지도 모른다. 스스로 베푸는 교육이 민주주의의 실천이라고 여겼고, 대학에서의 교육이 대중에게까지 전파되어야 한다는 지론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프라이스 신부의 교육 이념은 결국 힘없는 이들을 바로 세우는 데에 미치게 됐다.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에게 관심과 도움을 주는 데에 그치지 않고 그들을 자립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 프라이스 신부가 가진 이상이었다.

 

군사정권 시절 요주의 인물 

 

“사회에는 기초라고 할 수 있는 것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가족제도, 법체제, 교육, 종교 노사문제 등이 그것이지요. 이 밖에 사회의 기초가 되는 것으로 고아원 같은 것을 들 수가 있지요. 이는 아주 좋은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아무리 잘 해도 사회를 바꾸지는 않습니다. 기초를 바꾸는 일이 필요했는데, 그 중 하나인 노사관계에 저는 주목했습니다.” 

 

당시에도 노조는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정부와 경영자가 만든 것일 뿐, 프라이스 신부가 생각하는 노조는 아니었다. 프라이스 신부는 당시, “노동자들에게 자주적이고 책임있는 조합이 없고, 이는 곧 노동자의 자유가 없는 것이다”라고 진단했다. 처방은 사회를 바꿔야 한다는 쪽으로 내려졌고, 따라서 “노동자가 자기 생활을 보호하고 개선하기 위해서는 노동자 스스로 조합을 만들어야 한다”는 목적 아래 연구소를 설립하기에 이른 것이다. 

 

프라이스 신부의 주도로 산업문제연구소는 노동관계 연구와 노동자 사업주들을 대상으로 하는 노동 교육을 꾸준히 해왔다. 노동법 및 노동조합 조직과 활동에 대한 강의는 물론 단체교섭하는 법 등을 알려주는 산업문제연구소는 노동운동의 개념조차 뚜렷하지 않았던 당시로서는 거의 유일무이한 존재였다. 그로부터 지난 2000년 연구소가 문닫을 때까지 35년 간 산업문제연구소는 269기에 걸쳐 수만 명이 거쳐간 한국 노동운동의 산실이었다. 물론 한국사회에서자주적인 노동조합 건설을 돕겠다는 프라이스 신부의 이상이 쉽게 구현된 것은 아니었다. 설립부터 운영까지 모든 재정을 독일정부의 보조에 의해 충당한 산업문제연구소는 이사장을 맡은 프라이스 신부의 역할 없이는 유지될 수 없는 것이었다. 정부당국과 경영자들이 보내는 눈에 보이지 않는 압력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프라이스 신부로선 이 일이 결코 포기할 수 없는“정의를 위한 일"이었다. 산업문제연구소는말하자면 프라이스 신부의 교육자로서의 삶과 사제로서의 삶이 한 곳에 모인 지점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프라이스 신부는, 역시 서강의 스승이었던 정일우(John V. Daly) 신부와 함께 1970 - 80년대의 대표적인 '운동권' 신부로 알려졌다. 정일우 신부가 빈민운동의 투사라면, 프라이스 신부는 노동운동의 대부라 할 만하다. 1970년 가톨릭정의평화위원회를 설립하여 20년 가까이 간사 역할을 했던 프라이스 신부는 당국으로부터 감시 받는 요주의 외국인 리스트에 오르기도 했다.

 

정의와 정의를 실천하기 위한 교육의 열정에 사로잡힌 프라이스 신부이지만, 서강에 재직한 44년 간 가까이서 보여준 모습은 묵묵히 일하는 신부님일 뿐이었다. 그동안 맡은 보직이라곤 산업문제연구소 이사장과 1985년 부터 맡은 총장보가 전부였다. 1988년 8월에 정년퇴임한 프라이스 신부는 그 뒤로도 쉼 없이 교양영어 강의를 맡아 학생들을 기르고 있다. 학교의 국제협력실 업무가 실질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었던 것도 프라이스 신부의 노력에 힘입은 것이었다. 이제는 자리를 잡은 교환학생 프로그램이나, 동문회의 해외연수 장학생 프로그램도 프라이스 신부의 손을 거쳐야 일이 성사됐다.

 

요즘도 프라이스 신부의 일과는 한결같다. 마태오관 501호 연구실로 아침 일찍 나와서 일하다가 저녁 무렵 사제관으로 돌아간다. 점심을 먹지 않는 것이 습관이 됐으니 점심시간도 따로 없다. 평생동안 낮잠 한 번 잔 적이 없다. 생활도 씀씀이도 간소하다. 평생을 청빈한 수도자로 살아온 프라이스 신부를 ‘청자 담배를 피는 신부님'으로 기억하는 이들도 있다. 서류봉투가 다 해질 때까지 몇번이고 다시 쓰는 모습이며 수십 년을 함께 한 낡고 빛바랜 사무실 집기들은 프라이스 신부의 성격을 그대로 보여준다.

 

오는 6월 16일 금경축 맞아 

 

프라이스 신부는 올해 금경축을 맞았다. 이 때문에 6월 16일 미국길에 오를 예정이라는데, 금경축을 기념하는 축하연은 극구 사양이시란다. 평소의 성품이 갑자기 변할리가 없다. 잔치상이야 어떻든, 결혼 50주년을 가리키는 금혼식이 가족들 모두에게 드물고 귀한 일인 것처럼, 사제 서품 50주년을 맞는 프라이스 신부의 오늘은 서강인 모두에게 돌아가는 축복일 것이다. 프라이스 신부님의 그 큰 키만큼이나 길게 드리워진 편안한 그늘에서 서강인들은 마음껏 배우고 바로 설수 있었으니까.

 

장영권(91·사학, 광운대 중국학과 강사·본지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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