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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듣는 은사님 명강의 3 - 김형효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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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04-03-03 16:03 조회17,64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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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한 15년 전쯤 일이다. 정월이었을 것이다. 철학과 합격통지서를 받은 필자는, 자유로운 대학생활과 대학공부에 대한 궁금증이 너무 컸던 나머지 입학도 하기 전에 로욜라 도서관을 찾곤 했다. 그 많은 책들이 꽂혀있는 서가를 바라보기만 해도 황홀해지는 ‘도서관 물신숭배’에 급속도로 빠져들었던 것이다(학생증도 발급되기 이전인데, 어떻게그 책의 정원에 스며들어가는 것이 허락되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당시는 새로운 조류의 매우 낯선 프랑스 철학이 언론 등을 통해 조금씩 대중에게 알려지기 시작하던 시기였으며, 대학 철학과에서도 쉽게 접근하지 못하던 시기였다. 그런데그 겨울의 어느 아침 필자는, 그 낯설고도 새로운 철학을 이미 오래 전부터 숙고하고 있었다는 듯 방대한 문헌을 능숙하게 이용해가며 찬찬히 서술한 625쪽 짜리 저작을 서가에서 발견했다. 그리고는 감탄을 하며 읽어 내려갔는데, 그 책이 바로 "구조주의의사유체계와 사상" 이라는 김형효 선생님의 저작이었다. 이후 이런 묵직한 연구물이 이 저자의 전체 학문에서 하나의 작은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칠십 년대 중반부터 팔십 년대 초반까지 서강대 철학과에 재직하신 김형효 선생님(현 한국정신문화연구원 교수)을 찾아뵈었다. 선생님께서는 칠십 년대 초에벨기에 루뱅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으신 후 잠시 공군사관학교를 거쳐 서강대에서 철학을 가르치셨다. 젊은 시절, 루뱅에서의 철학 훈련을 마치고, 사유가 더욱 원숙함으로 빛을 내던 시절을 서강대와 함께 하신 셈이다. 이미 꽤 세월이 지났지만, 아직도 철학과에선 많은 사람들이 김형효 선생님께서 강의하시던 시절을 기억하고있다. 통찰력으로 가득 찬, 서강대의 가장 뛰어난 강의 가운데 하나였다고 사람들은 입을 모은다. 선생님 기억 속에는 서강대가 어떤 모습으로 자리잡고 있을까? 

 

“학생들이 이해력도 뛰어났고 아주 공부를 열심히 했습니다. 그렇게 열심히 하니까 나도 기쁜 마음으로 열심히 가르쳤지요. 또 당시엔 서강대 하면, 모두 다 영어를 아주 잘 하는 것으로 유명했어요.”  서강대 제자들을 각별히 생각하시는 선생님의 마음은 단지 훌륭했던 강의를 통해서만 표현되었던 것은 아니다. 성실히 노력하는 제자들이 학문에 매진하고 또 성취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시기 위해 선생님께서는늘 고심하셨다. 선생님의 염려와 배려로 오늘날 대학에 자리를 잡고서 계속 학문의 길을 걷고 있는 철학과 동문들은 상당수이다. 

 

선생님께서는 요즘 어떻게 지내실까? 근황을 여쭈어 보았다. 맥없는 질문이다. 선생님 같은 학자에겐 모험가나 여행가 또는 정치가와 달리 새로운 근황이라는 것이 있을 수 없고 귀가 솔깃해 질만한 재미있는 체험도 없기 때문이다. 십 년이고 이십 년이고, 삶과몸이 공부에 적합한 형태가되도록 아주 단순하고 간소한 모습으로 훈련받아 왔을 뿐이다. 따라서 집과 연구실을 오가는 오랜 세월을 두고 반복되어온 하나의 규칙 외에는 다른 근황이 있을 수 없는 것이다. “한동안 건강을 위해 헬스클럽에 다녔는데, 공부할시간을 너무 많이 빼앗겨서 그만두었습니다. 대신 저녁 때 집 주위를 한시간 반 가량 속보로 걷습니다. 머리가 맑지 않으면 공부를 할 수가 없어서 잠은 충분히 자는데, 한 열 두시나 한 시 쯤 잠자리에 들어 일곱시쯤 일어납니다.”

 

그리고 선생님께서는 공부하는 사람은 무엇보다 생각과 생활이 단순해야 한다고 덧붙이셨다. 아마도 이런 간소화된 삶이, 깊이와 양모두 나무랄 것이 없는 선생님의 다작(多作)의 비밀일 것이다. “누구나 다 할 수있는 일입니다”라고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지나쳐 버리시지만, 계속해서 칠 팔백 쪽 짜리 대작으로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선생님의 학문적 성취는 사뭇 놀랍다. 선생님의 학문의 가장 특징적인 면모라면,동서양에 막힘이 없는 넓은 사유 지평 위에서 전개된다는 점일 것이다. 실존주의,구조주의, 해체주의, 하이데거 철학 등으로 전개된 서양 철학 연구와, 원시유학,주자학, 퇴계, 율곡, 노자, 원효, 지눌등으로 전개된 동양 철학 연구가 서로 반성·보완되며 선생님의 공부를 짜나가고 있다. "노장사상의 해체적 독법"같은 노작(勞作)은 바로 이렇게 동서양 모두를 아우를수 있는 학자만이 펴낼 수 있는 책이다(선생님께서는 동서양이 서로를 비추며 상호 이해의 폭을 넓혀나가는 독특한 방식의 연구라는 점에서, 이 책을 당신의 수많은 연구물 가운데 가장 애착이 가는 작품으로 꼽으셨다). 사실 이렇게 동서양의 다양한 분야를 소화해내는 학자를 만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정신문화연구원교수로 재직 중인 최진덕(74·철학) 동문은 “아마 유럽에 태어나셨다면, 유럽 철학사에도 큰 족적을 남기셨을 것”이라고 김형효 선생님의 학문을 평한다. 

 

“요즘은 불교에 심취해 있어요”라고 말씀하시면서, 선생님께서는 은퇴 후에는 더 이상 책상 앞에서 머리로 하는 공부가 아니라, '수행'을 통해 하는 공ㄱ부, 즉 '참선'을 해 보실 계획이라 말씀하신다. 의식 위로 떠오르지 않는 가장 깊은 층위의 지혜, 철학보다 더 심층적인 지혜에 참선을 통해 접근해 보려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나 '참선'이라는, 철학을 넘어서는 출구로 나서기 전에 마지막으로 철학의 영역에서 선생님의 연구활동을 정리하는 저작들이 준비되고 있다. 그 가운데 하나가 '철학적 사유와 진리'라는 책이다. "지금까지 인간의 삶은 너무 이상적인 당위성만을 강조하거나, 아니면 이기적 욕심 같은, 인간이라면 피할 수 없는 현실적인 원리들만 따랐습니다. 이 두 가지를 극복하는 철학을 모색해 보려고 합니다." 그 철학은 노장 철학의 '무위'와도 같은, 마음을 닦는 철학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인문학에 한평생을 바쳐오신 선생님께서는 오늘날 대학에서 인문학이 처한 상황을 어떻게 바라보고 계실까? "국가가 인문학을 배려해야 합니다. 인문학을 지망하는 사람들이 밥걱정 때문에 공부를 포기하느 일이 일어나서는 안되지요. 인문학이 죽으면 모든 문화가 죽어버립니다." 아울러 인문학의 길로 나가는 문턱에 서서 망설이며 오만가지 걱정과 회의에 휩싸여 있는 학생들에게도 "행복한 사람은, 죽을지언정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하는 사람이다"라는 말씀을 주셨다.

 

인터뷰 내내 당신의 좋은 점에 대해서는 말을 아끼시고, 오히려 말씀 중에 나오는 다른 사람들의 장점에 대해 많은 말씀을 하시는 선생님의 몸에 익은 겸손은 참 인상적이었다. 그리고 어떤 유쾌한 재담꾼도, 공부 이야기가 아니라면 선생님과의 대화를 마른 샘처럼 사라져 버리게 만들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인간과 세계의 원리에 대해 대화가 시작되면, 누구와 마주 앉아 있건 간에 어느 젊은 학자보다도 선생님의 얼굴은 밝아지고 말은 밤을 넘기며 불어난 강물처럼 끊임 없으리라.

 

서동욱(90 철학) 시인/문학평론가, 모교 철학과 강사, 본지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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