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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미자 동문 ‘나의 서강대 동문회 2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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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04-01-05 15:01 조회22,83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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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문회 사무국장으로 재직하다 지난 7월 31일자로 퇴임한 김미자(64.국문) 동문으로부터 동문회 재직 22년간의 회고와 동문회 활동이야기를 들어보았다.<편집자주>

 

희망과 설레임으로 받아들었던 2003년의 하아얀 달력도 이제 며칠 후면 2004로 그 숫자가 바뀌게 되겠지요? 무릇 들고 남에 있어 흔적 없음이 최상의 삶이라고들하던데, 아직은 그 단계에 이름은 요원하고, 저를 기억하는 모든 동문들께 지면으로나마 인사를 대신합니다. 만 21년, 햇수로 하면 22년간, 내 온 마음과 정성을 바쳤던 일에서 손을 떼려고 하니 마음이 쉽지는 않았지만 후배들에게 새로운 활력을 갖게 하고 길을 터 준다고 생각하니 홀가분 하기도 했습니다. 돌이켜 보면 강산이 두 번 변한다는 참 긴 세월이었습니다. 

 

처음 일을 시작한 82년도에 2천만원 기금과 6천7백의 동문이, 지금은 50여억원이 넘는 동문회관과 8억 5천만원의 장학금, 동문 수 4만이 훌쩍 넘었으니 20여년이라는 세월의 위력을 새삼 느낄 수 있었습니다. 돌이켜 생각하노라면 그 세월이 어찌 그리도 빨랐던지. 시간이 물체일 수 있다면 손을 뻗어 금방이라도 잡아 오고 싶기만 합니다. C관작은 방에서 직원 한 명과 동문회 일을 시작했던게 1982년 6월, 홍익찬 동문회장의 취임 2개월 후 였습니다. 동문록을 뒤지며 종신회비를 납부하지 않은 동문들 방문하여 회비 걷기로 일이 시작됐었지요. 82년 가을 동문회 역사 18 년 만에 처음으로 홈커밍 행사를 대대적으로 치뤘습니다. 

 

서강옛집은 학보 기자들을 데리고 격월간을 만들었습니다. 타블로이드 4면인 아주 작은 신문이었지만 다른 일들과 함께 꾸려가야하는 그 일도 쉽지는 않았습니다. 동문회를 키우는 일은 기금을 늘리는 일이란 홍익찬 회장님의 말씀대로 유일한 수익 사업이었던 동문록 제작에 들어갔습니다. 제작비는 광고로 충당하자는 의결대로 저는 광고를 얻기 위해 참 많이도 돌아다녔습니다. 

 

동문단합 기폭제 '개교 30주년 행사'

동문록을 만드는 것은 동문들에게는 정확한 데이터를 입수하는 것이었고, 동문회로서는 기금을 늘리는 방편이됐겠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동문회 회원 관리를 위해 몇 년에 한번 그 작업은 꼭 필요한 작업이었습니다. 서강대학교 동문회가 대한민국의 그 어떤 동문회보다도 회원 관리에 기초를 단단히 잡을 수 있었던 이유가 있었다면 타대학 동문회보다 빨리 회원 전산화 작업을 할 수 있었다는 것과, 남의 손을 빌리지 않고 사무실 직원들 손에 의해 동문록이 제작됐었다는 것과, 꾸준히 발간되는 회보의 반송시 즉각적으로 업데이트를 시키는 작업을 게을리 하지 않은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현황파악 전화를 받는 동문들 중에 “서강대학교동문회는 중앙정보부 출신이 모여 있는 곳이냐?”는 소리를 들어가며. 1985년 서강은 개교 25주년을 맞는 대대적 행사로 들어갔고, 이에 발맞추어 동문회는 개교 25주년 기념 특별 사업의 일환으로 장학기금을 모으기 시작했고, 1986년 양호 동문이 회장으로 취임하며 동문회는 85년 특별기념 사업으로 시작한 장학기금으로 모아놓은 5천만 원과, 동문회에서 5천만 원의 기금을 출연하여, 1억 자본금으로 장학재단의 설립으로 들어갔습니다. 재단 설립 과정에서의 양호 회장의 강력한 추진력과 리더십은 많은 동문들의 자발적인 봉사를 끌어내는데 아주 중요한 역할을 했었지요. 과정에서 수많은 서류와 회계상의 부딪치는 문제들을 기술적으로 풀어 갈 수 있도록 몇 개월에 걸쳐 봉사해 줬던 윤낙기 동문의 희생은 아직도 잊을 수 없습니다. 

 

87년 겨울 동문회는 처음으로 힐튼호텔에 거대한 현수막을 붙이며 송년회를 해냈습니다. 이미 숱한 대학이 호텔이라는 공간을 빌려 했던 행사이긴 했지만 그 겨울 학번별, 과별로 동원시킨 동문은 1천여 명, 생전처음 치루는 그 대대적인 행사에 흘렸던 진땀은 그 이후 크고 작은 행사를 치루는데 여유와 자신감을 갖게 했던 아주 좋은 경험이었습니다. 당시 KBS의 예능 담당 총책인 곽명세 동문은 프로그램을 성공적으로 진행하기 위해 연결되는 연예인을 총 출연시키는 열성을 보여 주기도 했습니다. 홍익찬 회장의 4년이 동문회 초석을 다지는 시간이었다면 양호 회장 2년은 동문회가 일보 도약할 수 있었던 시기였었습니다. 

 

"서강대 동문회는 중앙정보부냐"

1988년 3회 동문에서 다시 1회 동문인 이우진 동문이 회장으로 취임하게 되며 재임 10년간 동문회는 엄청난 발전과 비전을 가지며 내실을 다질 수 있었던 시기였습니다. 90년개교 30주년을 맞으며 이우진 회장은 후배들에게 서강을 상징하는 무엇인가를 남겨야 한다는 의지로 알바트로스탑을 제작, 모교에 헌납했습니다. 89년 동문록 제작후 1년 여간 참 열심히도 책장사(?)를 했고, 탑을 제작하기 위해 필요한 2억 원의 돈을 마련할 수 있었습니다. 개교 30주년 행사일인 4월 18일, 하문자 동문은 딸을 입학시킨 기쁨과 축하로 홈커밍 행사장의 몇 백 명 동문들의 음식을 맡아서 봉사해줬고, 동문회는 "자랑스런 서강인"상을 제장하여 동문들에게 사표가 되었던 서강학파의 남덕우 전 교수, 빈민사목으로 막사이사이상을 수상한 정일우 예수회 신부, 번역가로 서강의 이름을 높여준 안정효 동문, 그리고 혼신의 힘으로 서강을 사랑했던 김규원 동문이 제1회 수상자로 시상이 됐으며 2001년 제8회 까지 자랑스런 서강인상은 이어져 오고 있습니다.

 

모교 교문 앞 알바트로스 탑 제막식장에서 당시 총장 박홍 신부와 총학생회장 최정봉 동문, 그리고 이우진 회장이 테이프를 끊으며 폭죽이 터지고, 불꽃이 피어오르던 순간은 아직도 꿈처럼 선명합니다. 꽃처럼 피어나던 불꽃과 탑을 비춰주던 조명과 울려 퍼지던 교가는 학교와 동문회와 후배인 재학생이 하나 될 수 있었던 아름다운 장면이었습니다. 그것은 학교와 동문회가 서강의 양대 축이 되고 있음을 가시적으로 보여주던 역사적인 순간이기도 했습니다.

 

역대 회장단 강한 리더십 원동력

행사가 끝난 후 이 회장은 70여 명의 유력 동문들의 기업체 및 개별 방문으로 30주년 행사를 마무리 했습니다. 30주년은 서강과 서강 동문회 화합의 한 기폭제가 됐었습니다. 비록 당시 동문 수 1만 5천여 명이었지만 우리의 힘도 모이면 거대한 힘이 될 수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됐습니다. 

 

이우진 회장은 곧 동문회관 건립에 대한 안을 회장단에 제시했고, 1992년 1월 동문들의 신년하례식을 겸하며 회관 건립 발대식에 들어갔습니다. 그 이후 5~6년 동안 책임을 맡은 전금홍, 나재순, 김기춘 동문의 활약은 눈물겨운 것이었습니다. 당시 일년을 결산하는 결산표를 보노라면 연간 몇 백 회를 웃도는 회의 일정을 볼 수 있습니다. 조찬으로 오찬으로 만찬으로, 직장 단위별로 학번별로, 그리고 지역별로 직종별로 모금을 위한 모임은 물론, 활성화를 위해 송년회, 4회에 걸친 대대적인 홈커밍과, 기금 마련을 위한 동문록 제작 등으로 지금 돌이켜 보노라면 어떻게 그것을 동시다발적으로 할 수 있었을까 신기하기도 하지만, 그 일을 감당할 수 있도록 얼마나 많은 동문들이 옆에서 도와줬었던 지, 그 이름을 지면에 다 열거할 수 없음이 안타까울 뿐입니다.

 

초창기 모금시 박홍 총장은 대대적인 지지를 보내며 동문회 회장단과 함께 동참하여 동문들을 격려해 주는 큰 역할을 맡아 주셨습니다. 첫 새벽 조찬에서 밤늦은 만찬까지. 하지만 학교 일이 바빠지며 그 분은 중도에서 그 역할을 중단할 수 밖에 없었지만, 일부 임원들은 당신들의 업무를 수행하랴, 동문회 돌아 다니랴 지쳐서 슬그머니 중도 탈락하시는 동문들도 있기는 했었습니다. 98년 이상일 총장의 동문회관 교내건립 불가 결정, 이우진 회장의 사임과 함께 동문회관의 건립이 불투명해졌습니다. 열성적으로 활동하던 동문 일부도 사업의 문제, 건강상의 문제 등으로 서서히 교체되어 가며 잠시 소강상태로 접어들게 됐습니다.

 

98년 4월 이우진 회장은 활력과 재도약을 위해 후배인 68학번의 김경해 동문을 회장으로 추대했으며, 위기관리 전문가로서의 김경해 회장은 당시 소강상태로 들어가던 동문회에 새 바람을 일으키는 큰 역할을 맡았습니다(김 회장은 오랫동안 서강옛집 담당 부회장으로 그 활성화의 일익을 담당해오던 터였다). 회장으로 취임 후, 99년 학교의 총장 교체로 취임한 신임 이한택 총장과 동문회관 건립에 대한 재협상의 테이블을 만들어 나갔습니다. 그 사이 생긴 이런저런 불협화음과 난관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2000년 3월 동문회관을 교내에 건립할 수 있다는 확약서에 사인하는 조인식을 갖게 됐습니다. 오랜 동안 염원하던 동문회관의 기공식은 2000년 10월 색색의 아름다운 풍선들이 어두운 밤하늘에 환상적인 그림을 그리고 불꽃이 피어오르는 축제로 그 기쁨을 더했습니다.

 

"최고의 인재 부리는 재주 가졌다"

문제는 건물을 짓기 위해 마련해야 하는 기금이었습니다. 가장 확실한 수입원, 또 다시 동문록 제작에 들어갔습니다. 아웃소싱을 하면 4천~5천만 원을 우리에게 주겠다는 업자들이 문턱이 닳게 쫓아왔지만 수고한 만큼 수익을 낼 수 있다는 걸 알고 있는 우리로서는 동문회 단독 제작 작업에 들어갔습니다. 1차 텔레마케터를 통해, 2차 교내 아르바이트생을 통해, 최종 동문회 직원들을 동원한 현황 파악 작업 1년여 만에 수익 5억 원을 기금화할 수 있었습니다(물론 제작비는 전액 광고비로 충당). 김경해 회장은 1천만 원 클럽을 만들어, 여력이 있는 동문들을 그룹핑하여 1천만 원 이상의 고액 기금의 협조를 받게 됩니다. 마침 부상한 벤처시대에 벤처사업가로 활약이 뛰어났던 동문들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희망으로 기금 모금은 별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기대했었지만 벤처의 거품은 곧 사라졌고, 또다시 모금은 난관에 부딪치게 됐습니다. 

 

하지만 이 어려운 상황에 만났던 감동적인 동문들의 이야기들을 잊을 수 없을 것입니다. 먼저 벤처의 신화를 이루어낸 재미교포 김윤종 동문. 후배들을 위한 장학사업엔 관심이 있지만 건물을 짓는 것에는 별 관심이 없다던 김 동문에게서, 두 번에 걸쳐 LA 사무실을 방문하여 5억의 기금납부를 약속받았을 때의 기쁨. 회사가 그 힘든 상황임에도, 동문회장 일행을 맞으며 준비한 1억 원을 건네주던 김덕용 동문, 익명을 요구하며 기꺼이 1억 원 이라는 돈을 희사해준 어느 여자 동문, 그리고 단 한번도 동문회에 이름이 거론 된 적이 없이 묵묵히 홀로 일하며 번 돈 1억을 희사해준 동문, 60에서 69학번까지의 전 여자 동문을 동원하여 1억 원 이라는 거금을 모금해줬던 황혜자 동문, 바톤을 이어받아 모금담당 타이틀을 달고 고군분투하던 염정순 동문, 그리고 장명식 동문 등.

 

모금에 얽힌 크고 작은 그 이야기들은 또 얼마나 아름답고, 기쁘고, 슬픈 애환이 얽혀 있었던지. 많은 우여곡절과 사연을 간직한 채 동문회관의 준공식을 맞았을 때의 그 벅찬 감동과 감회를 어떻게 글로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사무국에서 일했던 제가 이랬을진대, 건립을 위해 노심초사하셨던 전임 이우진 회장과, 마지막 학교의 허락을 받기까지 숨죽이며 협상을 벌였던 김경해 회장 이하 당시 책임 부회장으로 깊이 관여했던 이윤선, 정훈, 염정순 부회장, 취임 후 8개월 만에 맞는 준공이었지만 그 8개월 동안 마무리되지 않은 산재한 행정적, 외교적 문제들과 부딪치며 해결해 내신 정재관 회장, 강대원 부회장, 그 분들의 감회는 또 어땠을까요? 다들 나름대로의 사연을 가슴에 안은 채 준공식을 무사히 마칠 수 있었습니다. 붉은 샌드스톤으로 지어진 11층 건물의 무게가 처음에는 너무 무거워 보였지만 요즈음 지나다 보노라면 참 품위있게 잘 지어졌구나 싶습니다. 저 한 건물 안에도 그 숱한 말로 다할 수 없는 사연이 있는데, 살아 숨쉬는 한사람 한사람의 그 가슴에는 얼마나 숱한 다하지 못한 사연들이 쌓여 있을까 싶습니다. 문득 "내 산 이야기 소설로 써 봐라. 몇 십 권이라도 다 못 쓸거다" 나이어린 그 옛날 어른들의 얘기를 듣노라면 "아무거나 다 소설이 되나"라고 건방떨던 그 오만이 새삼 부끄러워지곤 합니다.

 

서강옛집, 동문회에서 일하며 정말 열심히 챙겼던 회원관리도, 한사람이라도 더 서강옛집을 받게 하기 위한 기초 작업이었을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동문들의 마음을 한 걸음 더 모교로 이끄는 기사를 만들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더 아름다운 얘기들을 전할 수 있을까? 나의 모교가 최고라는 긍지를 주기 위해 어떤 기사를 발굴해야 할까? 관계되는 몇 사람이 만드는 신문이었기 때문에 때로는 매너리즘에 빠질 수도 있겠고, 때로는 진부한 모습이 될 수 있을텐데, 어떻게 하면 신선하고 다양하고 내용이 형식적이지 않고 진심이 읽혀지는 신문이 될 수 있을까?그것은 20여 년 일하며 제 곁에서 떠나지 않았던 화두였습니다.흔들리느 버스 안에서 번개처럼 스치던 기획들, 동문들과 웃고 떠들다가도 건져냈던 아이디어들, 기발난 편집위원들의 반짝이던 특집들, 그 회보를 만들기 위해 얼마나 많은 동문들이 봉사해 줬던지요? 학보 출신의 학생들의 도움, 언론ㅇ 일선에서 활동하는 동문들의 자원 봉사, 하지만 해도 해도 뭔가 부족한 듯했던 그 미흡합이 최근 아주 탄탄한 편집위원 동문들의 노고로 최고의 동문회보로 자리해 가고 있습니다. 가장 적은 비용으로, 최고의 애교심이 만들어 가는 동문회, 그 곳이 바로 서강의 동문회가 아닌가 싶습니다.

 

몇 년 전이던가요? 어느 동문이 한 말씀은 두고두고 제 뇌리에 남아 있답니다. "동문회는 최고의 인력을 돈 안 쓰고 부려먹는 재주를 가지셨군요. 저를 한 시간 쓰기 위해 필요한 돈이 얼만지 아십니까?" 물론 그 동문은 웃음반 진담반 한 얘기였지만 그 말은 사실이었고, 방송인이든 금융이든 언론이든, 아니면 출판이든 법조인이든, 동문회는 필요하면 그 동문들을 다 동원하는 데 일체의 주저함이 없었습니다. 해서 제 가슴에 서강의 졸업생이면 누구나 최고로 '선'하고, '성실'하고, '희생과 봉사'를 할 줄 아는 정말 '고맙고 감사한 사람들' 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동문들은 동문회에서 필요로 할 때 언제나 '네, 도와 드려야죠'라고 답했었으니까요. 제가 일을 접어야 할 때 슬펐던 이유라면, 신뢰하고 사랑하고 가슴 따뜻한 그 많은 사람들과 이제는 헤어져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동문회 김미잔데요"라고 시작하는 그 말을 할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동문들의 신뢰와 사랑 가슴깊이 간직

하지만 1만여 동문들의 사랑으로 올라간 동문회관의 그 당당한 위용, 학교와 예수회와 재단과 동문회의 4개 축이 합심하여 제작한 설립자 게페르트 신부의 동상, 이제는 후배들이 가장 사랑하는 장소가 된 알바트로스탑 등 그곳 어느 작은 한 귀퉁이에 스며있을 나의 작은 땀방울이 가슴 뿌듯합니다. 그 모든 것들을 위해 어떤 역할인가를 할 수 있었음에 감사합니다.

 

오랫동안 부족한 저를, 큰 대과없이 일을 마칠 수 있도록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신 동문들에게 진심으로 감사륻 드립니다. 동문들의 신뢰와 사랑은 제 가슴에 넘치고 있어, 아마도 제 남은 여생에 두고두고 꺼내봐도 마르지 않을 샘이 될 것 같습니다. 자칫 나태해지기 쉬운 업무에 항상 새로운 채찍과 활력을 부어주셧던, 홍익찬 회장님, 양호 회장님, 아우진 회장님, 김경해 회장님, 정재관 회장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항상 그 자리에서 묵묵히 쏟아지던 업무에 최선을 다 해줬던 동문회 사무국의 후배들, 정명숙, 한남희, 조경자, 유진아에게도 감사를 드립니다.

 

성탄과 새해를 맞으며 동문들의 가정과 하시는 일마나 아기예수님의 은총이 가득히 내리시기를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김미자(64 국문) 전 동문회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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