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희(88.영문) ABN-AMRO증권 세일즈 트레이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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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작성일02-11-12 15:11 조회24,701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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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30] 파워우먼/ 세일즈 트레이더 김재희 이사
2002/10/31(조선일보)
서울역 맞은 편 서울시티타워 12층. 김재희(33) 이사를 만나러 네덜란드계 증권사 에이비엔-암로(ABN-AMRO)에 갔다. 하지만 김 이사는 좀처럼 말 붙일 틈을 내 주지 않는다. 그의 눈은 책상에 놓인 증시 모니터 5대를 번갈아 훑어내린다. 손은 내내 전화기를 붙들고 있고, 입은 쉴 새 없이 영어를 쏟아낸다. 해외 고객들에게 어떤 한국 주식을 얼마큼 사고 파는 게 좋겠다고 추천해서 매매 주문을 받고 키보드를 두드려 거래를 대행한다.
오후 3시 30분, 주식 장(場)이 끝나고도 그는 고객과 해외 지사들에 보낼 보고서를 작성하느라 모니터에서 눈을 떼지 않는다. 4시30분, 채권 장도 마저 확인한다. 오후 6시가 돼서야 의자에 앉아 잠시 숨을 고르는 그에게 “힘들지 않느냐”고 말을 걸었다. “재미있는 일을 하면서 힘들어하는 사람도 있나요?” 쉰 듯한 목소리가 나직하지만 힘에 넘친다. 종일 ‘전투’를 치르고도 표정과 몸짓에 여전히 생기(生氣)가 꿈틀거린다.
그는 국내 증권업계에선 아직도 생소한 직종인 세일즈 트레이더(Sales Trader)다. 그에게 하루 근무 시간은 온전히 ‘24시간’이다. 아침 7시 출근해 온종일 전화기와 씨름하고 저녁 7시 퇴근해서도 세계 시황에 촉각을 곤두세워야 한다. 새벽에도 그를 찾는 해외 파트너들을 위해 휴대전화는 항시 열어둔다. 한 치 앞이 어두운 ‘머니 게임(Money Game)’의 최전선(最前線)에서 내내 긴장의 끈을 쥐고 있어야 하는 거친 일이다.
지난해 그는 명함에 ‘이사’ 직함을 찍어 넣는 데 성공했다. 증권업계에 발을 디딘 지 6년 만이었다. 지금 연봉은 억대. 하지만 그의 출발점은 연봉 1700만원짜리 조사부 보조원(Research Assistant)이었다. 그 흔한 MBA나 경제학 전공도 한 적이 없다. 서강대 영문과를 나와 의료기기 회사에서 일하던 95년, 외국계 증권사에 다니는 친구를 만나면서 그는 ‘새 세상’을 발견했다. “순간순간 희비가 엇갈리는 증권세계가 너무 멋있어 보였어요. 도전할 대상을 찾았으니 망설일 필요가 있나요. 외국계 증권사 네 곳을 골라 무작정 이력서를 보냈지요.”
그렇게 해서 그는 슈로더증권 조사부에 채용됐다. 커피, 복사 심부름은 기본이었지만 웃는 얼굴로 해냈다. “외국계 기업도 다를 게 없어요. 남자들은 처음부터 ‘주니어 애널리스트’나 ‘에디터’ 직함을 달지만, 여자들은 보통 ‘비서’나 ‘보조 애널리스트’로 시작하지요.” 그는 모든 걸 스스로 배우고 터득해 나갔다. 모두들 자기 일이 바빠 귀찮아하는데도 100% 이해될 때까지 끈질기게 물어봤다. “남자들과 겨루려면 남자들 갑절 넘게 노력해야 합니다. 남자만큼이 아니라, 남자보다 더 잘하겠다는 마음가짐 없인 성공할 수 없습니다.” 그는 울면서 배우고 일했다.
이듬해 투자회사 CSFB(Credit Suisse First Boston)로 옮긴 그는 열정과 억척으로 자기 영역을 넓혀 나갔다. 한번은 매도할 주식을 놓고 남자 상사와 설전을 벌였다. 그 모습을 외국인 상사가 우연히 지켜봤고, 장(場)이 끝나자 상식에 근거한 그의 판단이 옳았음이 여러 사람들에게 증명됐다. 김 이사는 “예의를 지키는 한에서 할 말은 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IMF 한파가 한국을 휩쓸던 98년 1월엔 CSFB 홍콩지사로 발령 받았다. 붕괴 직전에 몰린 한국증시에 관심을 갖는 외국인 투자자는 드물었다. 아예 출근을 하지 않는 한국담당 동료들도 늘어났다. 그래도 그는 정시 출근해 종일 고객관리에 매달렸다. 감기에 걸리자 사무실에서 이불을 뒤집어 쓴 채 일을 했다.
당시 홍콩에 같이 있었던 권혜진(28·맥쿼리 자산운영사)씨는 “사람들이 손 털고 나가는 뒤숭숭한 분위기에서도 그는 끝까지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고 기억한다. “고객들이 한국으로 돌아올 때, 자기를 찾게 만들겠다고 하더군요. 긍정적인 태도, 멀리 보는 안목이 무척 인상적이었습니다.”
그는 2000년 에이비엔-암로에 스카웃됐다. 지금 거느린 고객은 유럽 유명 증권사, 투자회사, 다국적기업 수십 곳. 영어 스페인어 불어를 자유자재 구사하는 외국어 능력을 밑천 삼아 해외 전담 세일즈 트레이더로 활약하고 있다. “새로운 고객을 확보하기 위해 매매 거래가 없는 회사들까지 포함해 매일 80여 곳에 국내 뉴스와 투자 정보를 이메일로 보내고 있지요. 주식만 담당하고 있지만 한국 채권시장 정보까지 덤으로 고객들에게 보고했더니 성실하고 부지런하다는 인상이 절로 심어지더군요.”
그의 탁월한 외국어 실력은 오랜 해외생활에서 쌓았다. 75년 오퍼상을 하는 아버지를 따라 볼리비아로 이민을 떠나, 그곳에서 외국인 학교를 다녔다. 미국 조지타운대와 보스턴대에 합격했지만 그는 “한국 대학생활이 매력적이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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