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 신숙원 명예교수 -내 사랑 서강, 첫사랑이자 마지막 사랑입니다.(1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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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24-04-04 10:58 조회4,701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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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로욜라 도서관이 개관 50주년을 맞이했다. 이를 축하하는 ‘개관 50주년 기념 비전선포식’에서 로욜라 도서관 발전에 크게 공헌한 신숙원 명예교수와 안경순 여사에게 감사장이 전달됐다. 이에 더해 기존 U-Dream Hall은 ‘신숙원 U-Dream Hall’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 신숙원 명예교수
서강대 영문학과 교수, 도서관장, 대통령직속 도서관정보정책위원장, 건양대 교무부총장 및 국제부총장, 서강대 이사를 거친 긴 시간 동안 로욜라 도서관의 모든 역사에 함께한 신숙원 명예교수를 만나봤다.
Q. 교수님께서는 요즘 어떤 일상을 보내고 계신가요?
정년퇴임을 하였기에 한 일에 집중하기보다는 여러 활동을 간간이 하고 있습니다. 건양대학교 교육재단의 발전위원으로서 건양대학교 발전과 관련한 일을 하고 있고, 한 달에 한 두번 정도 학생들에게 멘토 역할도 해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故 남덕우 총리께서 설립하신 ‘선진화포럼’에서 미래의 지도자 육성을 위한 회의와 강연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또한 예수회의 기쁨나눔재단에서 운영하는 ‘꿈나무마을’ 출신의 ‘자립준비청년’들을 돕는 후원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회 재단은 자립준비청년을 위해 ‘밥집 알로’라는 후원 커뮤니티를 운영 중인데, 이곳에선 보육 시설을 나와 홀로서기를 시작하는 청년들에게 무료 저녁을 제공하며 이들이 사회에 나온 후 독립적으로 앞날을 잘 개척해나갈 수 있도록 돕고 있습니다. 서강대 여교수 몇 분이 이들을 위한 후원 활동과 후원자 모집에 힘을 모으고 있습니다. 저는 그곳에서 만난 한 청년에게 2년째 영어를 가르치며 자문 봉사를 하고 있습니다. 평생 학교와 교육에 열정을 쏟아왔는데, 지금도 여전히 그렇게 하게 되네요.(웃음)
Q. 서강에서의 특별히 기억에 남는 추억이 있으신가요?
제가 영문학을 전공했는데 그 중에서도 드라마(희극)가 주 전공이었어요. 교수 시절 제자들에게 연극과목을 강의하면서 English Drama Club을 조직하고 매 학기 말에는 영어로 연극 공연을 했어요. 당시에는 전국 대학생 영어 연극 대회가 열렸었는데 우리 학생들이 전국 대학생 영어연극 경연대회에서 1등을 했어요. 강의의 한 부분으로 학생들과 함께 주기적으로 연극 감상을 하러 가기도 했고, 도서관의 알바 학생들 ‘서로회’와 직원선생님들과 함께 야유회도 가고... 도서관과 영문학과와 관련된 즐거웠던 추억들이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제자들과 무척 친밀하게 지냈는데, 당시 학생들이 대략 75~83학번이었어요. 이번 로욜라 도서관에 헌정된 ‘신숙원 유드림 홀’에도 그때 함께 했던 학생들이 기부를 많이 해주었고, 지금도 ‘신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자주 만나며 즐겁게 지내고 있습니다.
Q. 교수님께서는 학계에서 굉장히 폭넓은 활동을 해오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교수님의 지난 삶이 궁금합니다.
저는 이화여자대학교에서 영문학을 전공했어요. 우리 동문끼리는 ‘영문도 모르고 영문학과에 갔다’고 서로 놀려요(그렇지만, 저 자신도 그렇고 많은 분들이 제가 서강 동문이라고 생각해요). 1965년도에 영문학을 공부하러 미국에 유학을 갔는데, 그 시기에 도서관학이 새로운 학문 분야로 등장하기 시작했어요. 다들 영문학이 너무 어려우니 새 학문인 도서관학을 하라고 권유했죠. 그래서 일단 ‘도서관학을 먼저 하고 다음에 영문학을 하자’고 생각했어요. 먼저 미국 위스콘신 대학교 대학원에서 도서관학 석사를 마치고 보스턴 칼리지에서 사서로 일하게 됐어요. 보스턴 칼리지도 예수회 학교예요. 당시에는 예수회에 대해 전혀 몰랐는데 이 시점이 서강과의 인연의 시작이었습니다. 당시 알게 된 서강 동문을 통해 서강대 초대 총장이셨던 존 P. 데일리 신부님을 만나 뵙게 되었어요. 그 후에 서강에서 영문학과 교수로 취임하는 동시에 도서관 부관장 보직을 함께 시작했습니다.
2007년 7월에 정년퇴임할 때까지 32년 반 동안 서강에서의 교수 생활기간에 있어, 거의
30년을 도서관부관장, 관장직을 맡았지요. 그 후 건양대학교에서 6년간 부총장으로 지내며 다양한 활동들을 했죠. 건양에서도 부총장을 하며 도서관장직도 맡았었어요.
Q. 로욜라 도서관과의 인연의 시작이 궁금합니다.
74년도에 서강대학교가 개가식 도서관으로 개편됐었는데, 이는 우리나라 최초의 완전 개가식 도서관으로 당시 상황에서는 거의 혁명에 가까웠어요. 당시 연세대학교나 이화여자대학교는 도서관학과가 있었음에도 완전 폐가식 도서관을 운영했거든요. 로욜라 도서관의 개가식 제도는 도서관이 완전 개방되어 학생들이 도서관의 모든 자료에 접근하여 지적 호기심을 자극받고 공부하여 학문발전에 기여해야 한다고 생각하신 서강 초창기의 서양 신부님들의 노력으로 이뤄낸 거죠. 개가식으로 도서관이 개편되고 이를 제대로 운영할 사람을 찾던 중 제가 미국에서 데일리 총장신부님을 만나게 되어 서강에 영문과 교수로 취임하면서 동시에 도서관 부관장 보직을 맡아 일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저는 영문학 석사를 마치고 박사 학위 취득을 위한 유학을 계획 중이어서 도서관 일은 1~2년 정도만 하고 그 후에 미국에 가려고 했는데 도서관에 일이 참 많았어요. 그런데 아마도 더 중요한 이유는 제가 서강과 사랑에 빠져버렸기 때문일 거예요. 그래서 미국행은 미루고 한국에서 영문학 학위를 취득하였고 도서관 부관장, 관장까지 하게 됐네요.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있는데 영문학과 과장 보직 순서가 제게 왔을 때 한 동료교수께서 ‘신숙원 교수는 학과장은 곤란하다. 전적으로 도서관에서 사셨기에 영문학과에 기여한 바가 적다’고 하셨어요. 그래도 학과장도 했어요 재미있지요?(웃음)
Q. 서강대 도서관장으로 재직 당시 로욜라 도서관에서 특별히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가 있으셨나요?
로욜라 도서관이 폐가식으로 운영될 당시 학생들이 도서관에 있는 잡지의 일부분을 자꾸 찢어가는 거예요. 또 잡지나 책들을 자기만 읽으려고 서가와 서가 사이에 숨겨놓기도 했어요. 그래서 제가 ‘찢어진 잡지와 책들을 전시하자’고 제안했어요. 처음에는 도서관 직원 분들이 안하던 학생들도 따라 할 것이라고 강하게 반대했어요. 저는 예수회 학교인 서강인의 양심을 믿었어요. 그래서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파손된 자료들을 도서관 1, 2층에 전시하여 “서강인의 양심은?” 이라는 제목을 붙이고 파손도서 전시회를 열었어요. 이 전시회를 본 학생들이 서강인들이 파손한 책들을 보고 충격을 받았던 거 같아요. 그 후 도서를 파손하는 일이 많이 줄었어요.
또 하나 서강의 자랑거리는 ‘도서관 이용법’이라는 교양과목을 개설한 거예요. 도서관학과가 있던 연세대학교와 이화여자대학교도 못했던 일이지요. ‘도서관 이용법’을 수강한 학생들은 ‘비행기 안에서 결혼한 세계 최초의 신랑 신부 이름과 축하객 명수를 찾아오시오’라는 질문도 쉽게 답할 수 있었지요.
▲ 신숙원 U-Dream Hall 헌정
또 하나 선구적이었던 일이 생각나네요. 우리는 서강의 도서관 자료가 서강대학교의 자료이지만 그 안에 들어있는 지식과 정보는 우리나라와 전 세계인의 것이라 생각했어요. 그래서 일단 신촌 주변에 있는 연세대, 이화여대와 협의를 맺고 세 학교의 직원과 학생들이 세 도서관의 자료를 이용할 수 있도록 협력을 맺었어요. 후에 숙명여대가 함께 했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참으로 진취적이었다고 할 수 있었어요.
이는 다 서강의 개방적인 교육철학 덕분이지요.
Q. 서강에서 기억에 남는 인연이 있으시다면 누구인가요?
아무래도 초대 총장이신 John P. Daly 신부님이시죠. 제가 도서관 부관장으로 있던 시절, 데일리 신부님께서 총장이셨는데 제가 취임한 후 얼마 안되어 총장직을 사직하시고 도서관장으로 오셨어요. 당시 새로 온 제가 혼자서 도서관 예산을 따내기 힘들 것 같아 도와주실 테니 ‘최고의 도서관’을 만들라고 하셨었죠. 참 감동을 많이 받았습니다. 어떤 학교의 총장님이 총장직을 내려놓고 도서관 관장으로 오겠습니까.
Q. 서강을 떠올리면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이 있으신가요?
지금은 없어졌지만, 예전에는 2주에 한 번씩 독후감을 써서 제출해야 했어요. 당시 독후감 제출 당일마다 학생들이 도서관 층계 곳곳에 앉아서 옆에 있는 학생의 독후감을 베끼던 풍경이 기억에 남습니다. 마감일도 엄격히 지켰죠. 다른 학생의 독후감을 베껴대니 이를 없애자고 반대하는 분들도 계셨지만 베낀다 하더라도, 나름 거기서도 얻어가는 것이 있다고 생각되어 이 제도는 오래 계속되었지요. 언어를 통해 자신의 의견과 감정을 정확히 표현하는 능력을 키우는 것은 우리 삶에 제일 필요한 일이지요. 또 책을 통해 다른 사람들과 사회에 대해 배우고, 세대와 세계를 넘어서서 뉴턴, 제인 오스틴, 마크 트웨인 등 과거의 인물들을 만나고 알아간다는 건 그 자체로 신비하고 행복한 일이죠. 현재는 독후감 제도가 없어졌다고 들었는데 크게 아쉽습니다.
Q. 교수님께 로욜라 도서관은 어떤 의미인가요?
우선 우리 학교에서 학자, 연구원이 학생 수에 비해 굉장히 많이 배출됐어요. 그 밑에는 우리 로욜라 도서관의 역할이 크지 않았나 싶습니다. 서가에 꽂혀 있는 다양한 책들을 보며 이 책도 읽고, 저 책도 읽다보면 지적 호기심이 생겨나고 자연스럽게 학문적 성취로 이어질 수 있었던 거죠. 제가 대통령 소속 도서관 정책위원장으로 일하던 시절에 지방대학을 방문하면서 로욜라 도서관을 이용한 타 대학의 교수와 학생들이 참 많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로욜라 도서관을 개가식으로 만들기 위해 애쓰신 신부님들과 초대 총장님의 노력을 알기에, 더욱 애틋하고 특별하게 느껴지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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