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나고 싶었습니다 - 김용권 영문과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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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19-10-29 10:22 조회22,990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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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 서강’을 향한 발전을 기원합니다
내년 개교 60주년을 앞두고, 서강 역사의 산 증인이라 할 수 있는 김용권 영어영문학과 명예교수님을 찾아뵈었다. 1930년생인 교수님은 1960년 개교 당시 영어영문학과 최초의 전임교원(전임강사) 이었다. 이후 1996년 정년퇴임할 때까지 학생처장, 문과대학장, 대학원장 등을 역임하였고 우리나라 영어영문학계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선생님께서는 1996년 정년퇴임하셨습니다만, 어떻게 지내 오셨는지 궁금합니다.
8년 전 간암세포가 있다는 진단을 받았어요. 색전술 시술을 받고 절제 수술을 받았는데, 80살 넘은 사람들은 100명 가운데 3명꼴로 절제술 받을 수 있는 몸 상태라고 하더군요. 6시간 수술을 받고 한 달 간 입원했습니다. 그 뒤로 5년 이상 지금까지 아무 이상 없고 완전히 회복됐습니다.
과식하면 안 되고 술, 담배는 물론 절대 하면 안 되고, 또 일주일에 한 번 정도는 살코기를 먹는 게 좋다고 하더군요. 색전술 시술 받기 전 날 마신 하이네켄 한 잔이 제 인생의 마지막 술이 됐지요. 지금 사는 곳 근처에 자리한 안산을 자주 오릅니다. 일주일에 다섯 번 정도는 안산을 여러 코스로 오릅니다. 또 푸시업 운동도 제법 합니다.
선생님은 명실상부한 ‘서강 가족’으로 유명합니다. 경제학과 김경환 교수가 자제신데요. 서강대학교에 진학시킨 이유가 있었을까요?
오래 전입니다만 미국 신부님들이 이런 말씀을 농담처럼 하시더라고요. “우리 교수님들은 서강대학이 서울대보다 낫다, 연고대보다 낫다고 말씀은 하시지만, 정작 자기 자식들은 왜 서강대에 보내지 않지요?” 꼭 그 말씀 때문은 아니었지만 ‘서강은 내 자식을 보내고 싶은 대학’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아들에게 서강대 진학을 적극 권유했어요. 마침 아들이 자기는 학문을 하고 싶다고 했는데, “학문을 하려면 단연 서강대다!” 이렇게 권했지요. 거의 한 달 동안 설득했어요. 저는 서울대에서 석사까지 마쳤기 때문에 당시 서울대의 학문 현실을 잘 알았습니다. 서강대가 학문하기 더 좋은 곳이라는 확신을 할 수 있었던 거지요.
자제 분, 그러니까 김경환 교수님 입장에서는 적잖이 고민됐을 것 같습니다.
아들이 중앙고등학교 수석졸업이었는데, 중앙고 측에서는 당연히 서울대를 갈 것이라 기대했어요. 서강대 가겠다는 뜻을 밝히자 당시 교감 선생님이 저를 만나자고 하시더니, 서울대 진학을 적극 권하더군요. 하지만 제 뜻을 듣고는 포기하셨습니다. 또 하나 이유가 있다면, 솔직히 아들 녀석을 좀 가까이서 지켜보고픈 마음도 없지 않았습니다.
김경환 교수가 아마 1988년에 경제학과로 왔으니까, 제가 1995년까지 재직하는 동안 7년 정도 같이 재직했습니다. 당시 저는 대학원장직을 맡고 있었습니다. 김경환 교수가 서강대에 어플라이하면서 저한테는 한 마디도 안했어요.(웃음) 물론 나중에 어플라이했다는 걸 알게 됐지만, 임용될 때까지 뭐가 어떻게 진행되는지도 당연히 몰랐고요.
선생님은 1969년부터 1974년까지 학생처장을 지내셨습니다. 그 시기가 참 사회적, 정치적으로 엄혹한 시기였는데요. 학생처장이라는 자리가 무척 무거울 수밖에 없는 시기였습니다.
1971년 대학생들의 시위가 격화되자 서울시 일원에 위수령이 발동되었죠. 서울시내 10개 대학에 강제휴교령이 내려지고 무장 군인을 주둔시켰습니다. 당시 서강대학은 5시가 지나면 직원들도 다 퇴근하고 학생들도 귀가해서 사실상 사람이 없었습니다. 신부님들은 사제관으로 가셨고요. 그런데 밤 10시 넘어서 군인들이 교내로 진입한 겁니다.
부랴부랴 학교로 갔어요. 저 혼자 본관 학생처장실을 지키고 있는데, 베레모 쓰고 권총 찬 군인이 들어오더군요. “내가 학생처장이오” 했지요. 이후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몰라서 학생처장실에서 담요 덮고 여러 날 잠을 잤습니다. 당시 교무처장인 트레이시 신부님에게 “위스키 없습니까?” 물었더니 조금 남은 위스키 병을 들고 오시더라고요. 그걸 홀짝홀짝 나눠 마시면서 학생처장실을 지켰습니다.
80년대에도 그랬지만 70년대 초중반에도 대학 학생처장이라는 자리는 난감하고 어려운 일을 많이 풀어야 했겠습니다.
마포경찰서 자주 다녀야했습니다. 시위하다가 검거된 학생들 데려오기도 했고, 총장님과 함께 시경에 가서 정일우 신부를 데려오기도 했고요. 시경에서 연락이 왔거든요. “여기 외국인 신부 한 명이 검거됐는데 서강대 소속이라고 하니 와서 데려가라”라고 말이지요. 교육 당국에서 학칙을 개정해서 총장이 직접 오라고 할 때도 있었는데, 총장님이 우리말에 능숙하지 않으시기에 결국 제가 갔던 적도 있었습니다.
한 번은 교내에서 학생들의 농성이 일주일 정도 이어진 적이 있었습니다. 오전 9시에 학생처장실로 출근하면 마포경찰서에서 나온 형사 한 사람, 문교부에서 나온 공무원 한 사람, 그리고 시경에서 나온 형사, 이렇게 세 명이 먼저 와 있었어요. 남산, 그러니까 당시 중앙정보부에서 사람이 나올 때도 있었고요. 제가 처장실에 들어서면 그 사람들이 일어나 저한테 인사를 해요. “처장님 나오셨습니까!” 참 웃지 못할 그 시대의 풍경이지요.
그런데 학생처장이라는 보직을 5년이나 하신 건 이례적인데요. 보통 길어도 2년 정도 하시지 않습니까?
다른 학교는 학생처장을 보통 1년 정도 했습니다. 저는 5년이나 했지요. 총장, 이사장님, 또 그밖에 보직 교수님들을 비롯해서 외국인 신부님들이 저에게 일종의 대외 소통 역할을 기대하셨어요. 뭔가 문제가 터지면 그걸 해결하는 방식이나 속도에서 외국인 신부님들은 뭐랄까, 다소 불리한 처지였죠. 아무래도 우리말, 우리글이 서투르고 한국 사회 사정이나 관행에도 완전히 익숙하진 못했으니까요.
돌이켜보면 학생처장의 업무 범위 안에서만 일을 한 게 아니었어요. 제가 하도 힘들고 해서 다른 학과 모 교수님에게 “학생처장 자리를 제발 좀 맡아 달라”라고 부탁했더니 그 분이 이렇게 말씀하시는 거예요. “학생처장, 그 자리가 사람이 할 자리인가?” 좀 야속하게 느끼기도 했지만 그 말이 아주 틀린 말은 아니어서 “허허!” 웃고 말았습니다. 그만큼 힘든 자리였습니다.
그 때 그 시절 얘기가 참 무궁무진할 것 같습니다. 기억나시는 일을 더 말씀해주신다면…
당시 자유중국, 그러니까 지금의 대만이죠. 대만 국기를 단 고급 승용차가 아침부터 며칠 동안 학교 안에서 보이는 거예요. 외교관 차량이었던 거지요. 저게 뭔가? 싶었습니다. 알고 보니 이랬습니다. 그 전에 주한 대만 대사의 딸이 서강대학에 편입한 적이 있었습니다. 당시 총장님이 저에게 규정상 문제가 없는지 물어보시기에 없다고 답해드렸지요. 그런데 그 딸이 대만 대사관 차량을 타고 학교 안까지 등교를 했던 거죠.
그래서 그 딸, 그러니까 학생을 불렀습니다. 당시 박근혜 전 대통령이 전자공학과 재학 중이었는데, 승용차를 타고 신촌로터리에 내려서 학교까지는 걸어서 등교했습니다. 근거리 경호원 한 명과 원거리 경호원 2명이 경호했었지요. 여하튼 대만 대사 딸에게 “대통령 딸도 로터리에서 하차하여 걸어서 등교하는데, 학교 안까지 승용차 타고 등교하는 건 자제해 달라”라고 말했습니다. 이후론 대사관 차량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선생님은 우리나라 영문학 발전의 산 증인이기도 합니다.
제가 영문학 공부할 땐 전국 대학에 영문학 박사가 없었어요. 제가 서울대에서 영문학 석사학위를 받은 일곱 번째 사람이었죠. 영문학, 미국학 관련 학회 6개 설립을 주도하거나 참여했는데 연구발표회 때 가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래 뵈도 나름 아주 바빠요.(웃음) 학술지도 계속 받아보고 있는데 학문 경향이 정말 많이 바뀌었죠. 그야말로 상전벽해인데 40대, 50대 연구자들이 열심히 노력하는 걸 보면 참 대견합니다.
서강대학교 역사에서 전환점이랄까 중요했던 시기랄까, 그런 때가 언제였다고 보시는지요.
서강대학이 개교한 것 자체가 우리나라 대학 교육 역사에서 획기적인 일이었어요. 당시로선 파격적인 대우로 우수한 교수들을 스카우트해왔고, 학사 관리가 정말 엄격했던 데다가 소수 학생들을 열심히 가르쳤으니까요. 60년대 당시 우리나라엔 그런 대학이 없었어요.
중요한 전환점은 아무래도 1970년 종합대학 승격이었죠. 1960년대 후반부터 ‘대학’들이 종합대학, 그러니까 ‘대학교’로 승격하려는 경쟁이 치열해졌어요. 사실 미국 신부님들은 굳이 종합대학이 되어야 하는지 납득을 잘 못하셨어요. 작고 소수지만 탄탄한 미국의 ‘칼리지’를 염두에 두셨던 것 같아요. 여하튼 종합대학이 되려면 공과대학이 있어야 해서 전자공학과를 설립하게 됐지요.
또 중요한 전환점은 1985년의 이른바 ‘한국화’였죠. 한국예수회가 재단을 맡게 되었던 것이죠. 한국예수회는 1985년에 독립 관구가 되었고, 한국인 최초로 서인석 신부가 제6대 총장에 취임했고요. 정말 큰 분수령이었는데 모든 큰 변화에는 장단점과 공과(功過)가 있기 마련이지요.
내년으로 서강대학교는 개교 60년을 맞이하게 됩니다. 소감이 어떠신지요?
살아보니 60년 세월은 길다면 길고 길지 않다면 길지 않은 시간 같아요. 일단 최근 학교 교정을 보면 건물도 새로 많이 들어서고 많은 변화와 발전이 있어 보입니다만, 어떤 방향을 취해서 학교 발전을 도모해나갈 것인가, 참 중요하고 어려운 문제입니다.
대학의 가치와 정신 측면도 중요하지만 실질적으로 우수한 성과를 내는 것도 중요합니다. 이른바 대학의 국내외 순위라는게 전적으로 중요한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그 측면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고 봅니다. 저야 뭐 은퇴한지도 오래되어 힘을 보태기야 힘들지만, 늘 서강의 발전을 기원합니다. 앞으로 ‘100년 서강’까지 잘 발전해야 할 텐데 말입니다.
<김용권 명예교수 프로필>
1> 생년월일: 1930.10.11
2> 학력
서울대학교 영문학 학사, 석사
University of Minnesota 박사
3> 경력
1960.03.01 서강대학교 영문학과 전임 강사
1966.09.01 서강대학교 영문학과 교수
1969.02 ~ 1974.02 학생처장
1976.03 ~ 1979.02 영문학과 학과장
1979.03 ~ 1982.12 문과대학 학장
1985.01 ~ 1989.02 대학원 원장
1996.02.29 퇴직
1996.04.01 명예교수 추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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