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교 60주년 앞두고 보는 그 시절 서강 - 엄정식(60 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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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19-08-12 09:25 조회19,001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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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과 신화, 그리고 역사
80세를 바라보며 거의 60년 전의 학창시절을 회고한다는 것은 분명히 감개가 무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것은 또한 모교인 서강대학을 위해서도 의미 있는 일이 될 것이다. 나의 대학생활은 이제 명문 사학으로 발돋움한 이 대학의 전설과 신화, 그리고 역사의 한 부분이 되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 당시에 싹튼 ‘자아’의 인식이라는 문제의식은 나에게 평생 천착해 온 학문적 주제가 되어서 지금까지도 나의 뇌리를 떠나지 않고 있다. 그러한 의미로 나에게 그 시절을 회고한다는 것은 단순히 추억에 대한 회상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이제 막 개교한 학교에서 첫 입학생이 되어 대학생활을 시작한다는 것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처럼 호기심과 모험심으로 가득 찬 것이었다. 우선 150명의 동기 입학생들은 모든 것을 처음 시작한다는 자부심과 호기심에 들떠 있었다. 새로 지은 본관 건물의 문고리를 처음 잡아본 것도 우리들이요, 강의실이며 도서관, 체육관 등 여러 시설들을 처음 사용한 것도 바로 우리들이었다. 소박하고 아담한 캠퍼스에서 외국 신부님들을 비롯한 여러 교수님들의 가르침을 받으며 엄격한 교칙과 훈육, 그리고 낮선 교육 방식에 몹시 시달리기도 하였으나 늘 학우들과 함께 보람 있고 바쁜 나날들을 보냈다고 기억된다. 그렇게 우리는 서강대학의 학풍을 형성하고 전통을 만들었으며 자랑스러운 신화의 주역이 되었던 것이다.
그 당시 서강대학의 특유한 학풍은 주로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고 생각된다. 교육의 인간화, 합리화, 그리고 국제화가 그것이다. 교육의 ‘인간화’란 서강대학에서 전문교육은 물론 교양교육 혹은 인성교육을 유달리 강조했다는 점을 지적하는 것이다. 초대 학장인 길로련 신부가 입학식에서 서투른 우리말로 강조했듯이, 서강대학은 “손발이나 머리뿐만 아니라 가슴도 가르치는” 그런 대학이었다. 교육의 ‘합리화’란 예수회 교육의 오랜 전통에 따라 합리적이고도 체계적으로 제도화된 학칙을 엄격하게 규정하고 그것을 철저하게 실천한다는 뜻이다.그 당시 이와 비슷한 학칙은 다른 학교에도 있었다. 그러나 교무처장직을 수행하던 트레이시 신부가 지적했듯이 이 대학에서는 그것을 예외 없이 지킨다는 것이 다른 점이었다. 마지막으로 교육의 ‘국제화’란 국제적 수준의 교육 내용을 이수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단순히 영어 강좌를 개설할 뿐 아니라 국제적 수준에 걸맞는 교과목이 개설되어야 하고 이것을 제대로 담당할 수 있는 교수진이 확보되어야 했다.
우리는 학업에 늘 쫓기면서도 과외 활동에 매우 적극적이었다. 선배가 없는 학교에 다니기 때문에 모든 동아리 모임들도 우리가 처음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스스로 엘리트임을 자처한 학우들의 토론 모임인 ‘아테네 클럽’, 화랑의 후예임을 호언하고 자주 야외 수련도 즐겼던 ‘검도반’, 그리고 틈만 나면 어울려서 그림 실력을 자랑하던 ‘강미반’ 등등 이루 다 기억하기도 어려울 정도로 여러 활동에 참여했었다. 그중에서도 많은 시간과 정력을 쏟았던 것은 새롭게 창간된 ‘서강타임스’ 기자로서의 활동이었다. 그것은 민주화와 산업화로 상징되는 4.19와 5.16등 큰 사건들을 거치면서 ‘분단된 조국’에서 사는 청년으로서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데 도움을 주었고 극히 추상적이고 사변적인 학문을 전공하는 나에게 역사의식과 현실 감각을 고취하는 계기를 마련해 주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 모든 시간보다 더 많은 시간을 나는 나 자신과의 대화를 즐기며 홀로 지내었다. 철학은 결국 혼자 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대학에 입학할 무렵 나는 나 자신과 자주 대화하는 버릇이 있었다. 학년이 높아갈 수록 이 버릇은 점점 더 고착되어갔다. 말하자면 나는 생각하는 ‘나’와 생각되는 ‘나’, 욕구로서의 ‘나’와 당위로서의 ‘나’, 현실로서의 ‘나’와 이상으로서의 ‘나’ 등으로 나누어지면서 점차 더욱 뚜렷하게 이분화 되어가는 경향을 보였다. 틈이 날 때마다 나는 깊은 사색에 잠기며 내면 깊숙한 곳에 존재하는 또 하나의 나와 끊임없이 대화를 나누고, 또 때로는 일기 형식으로 그 내용을 노트에 적어두기도 하였다. 거의 모든 관심사에 대해서 나는 숨김없이 솔직하게 그 ‘나’와 의논하였다. 그 대화는 상황에 따라 다양한 형태로 나타났다. 이는 호소이기도 했고 절규이기도 했으며 때로는 차분한 논증의 형태를 띠기도 했다. 이렇게 내면에 있는 나를 애타게 부르며 서강대학에서 보낸 시절을 나는 소크라테스적 성찰에 따라 “‘다이몬’과의 방황”이라고 부른다.
시간이 흐르면 과거는 희미한 기억 속으로 사라지게 마련이다. 그러나 그 중 어떤 것은 생생한 추억이 되어 바로 어제 일처럼 뚜렷하게 남아있기도 한다. 그 내용이 퇴색되고, 어떤 점은 미화되거나 추상화되기도 했지만 좀처럼 기억에서 지워지지 않는 일도 더러 있다. 아니 오히려 세월이 갈수록 더욱 더 생생하게 부각되는 것도 있는 것이다. 내가 자아의 문제와 계속 여전히 씨름하고 있는 한 그 시절 다이몬과의 만남은 더 이상 애틋한 추억이나 희미한 기억 속의 사건들 중에 하나가 아니다. 그것은 다른 현상과 달리 세월이 갈수록 생생하게 새로운 모습으로 다시 태어나고 더욱 깊은 의미를 지니며 구체화되어왔다. 서강대학에서의 학창 시절은 분명히 내가 경험한 과거의 일부이지만 다이몬과의 방황은 아직도 진행 중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한 의미로 나는 그 시절을 지금도 다이몬과 함께 살아가고 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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