故장영희(71 영문) 10주기 #2.내 인생의 나침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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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19-05-02 10:09 조회22,156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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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의 나침반이었던 장영희 교수님이 돌아가시고 벌써 10년이 흘렀다니 참 세월이 빠르구나 싶다. 10년 전의 슬픔과 막막함은 사라졌지만, 감사한 마음을 전하지 못한 안타까움과 좀 더 오래 사시면서 명쾌한 강의와 따뜻한 글로 학생들의 앞길을 인도하시는 모습을 보지 못한 아쉬움은 아직도 크다.
내가 대학에 입학했던 80년대 후반, 서강대는 입학식 날 영어회화반 편성을 위한 시험을 치르게 했다. 개강 첫날 내가 속한 반을 찾아갔더니 강의실 밖 벽에 붙은 수강자 명단 속 내 이름 옆에 F라고 적혀 있었다. 그게 female의 약자인줄 모르고, 첫 시험부터 F맞았다고 속상해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렇게 시작된 대학생활은 나를 늘 주눅 들게 했고 구석쟁이로 몰아넣었다. 속사포로 영어를 쏟아내시던 장영희 교수님의 강의 시간은 공포 그 자체였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하나도 못 알아들어 숙제도 친구에게 물어 겨우겨우 해가곤 했는데, 교수님께서 돌려주시는 페이퍼엔 빨간색 줄과 코멘트가 한가득이었다.
교수님이 너무 무섭고 깐깐하고 독하고 철저한 분으로 보여 감히 상담할 용기도, 사석에서 인사할 용기도 내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 화장실에 들어오시는 교수님을 보고 내 친구가 말했다. “교수님, 어젯밤 꿈에 교수님이 나타나셨어요.” 교수님 왈, “그래? 똥 밟은 기분이었겠네?”
요샛말로 확 깨는 기분이었다. 은단을 삼킨 듯 목안이 화~해지는 기분이었다. 앗, 이런 면이…. 유쾌하게 웃으시던 교수님이 이제까지와는 다른 모습으로 다가왔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저마다의 인생에 전환점이 되는 순간들이 있기 마련이다. 내게 있어 그런 순간은 3학년 늦은 봄날 장영희 교수님의 미국 소설 강의시간이었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열심히 영어로 떠들어대시던(나한텐 그렇게 들리고 보였다) 교수님이 갑자기 환하게 웃으시며 우리말로 말씀하셨다.
앤 타일러의 ‘Breathing Lessons’를 번역하고 있는데 제목을 어떻게 정할지 모르겠다고 하시면서 우리들의 의견을 물으셨다. 원제목 그대로 ‘숨쉬기 수업’으로 가면 무슨 요가 책 같지 않겠느냐고 하셨다. 그러고는 소설 줄거리를 간략히 설명하신 후 중요한 의미가 있는 소재들 몇 가지를 들어주시며 어떤 게 좋을지 물으셨다. 대다수의 학생들이 ‘종이시계’가 좋겠다고 대답했다. 그 후 책은 ‘종이시계’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고, 서점에서 그 책을 사들고 나오면서 나는 마치 교수님의 큰일에 내가 한몫 톡톡히 하기라도 한 것처럼 뿌듯했다. 내 인생의 전환점은 그때 그 강의 시간, 그 말씀을 하시던 장영희 교수님을 볼 때였다.
‘아, 나도 교수님처럼 되고 싶다. 나도 저 교수님처럼 환하게 웃으며 내 일을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강렬한 열망이 나를 사로잡았다. 그런 생각이 들만큼 좋아하는 일, 하고 있는 일 이야기를 하시던 교수님은 정말 아름다우셨다. 그때의 환한 미소, 밝은 목소리, 유쾌한 웃음…. 내 마음속에 생생하게 살아 있다.
졸업하고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교수님의 발치에도 미치지 못하지만 번역 일도 하며 교수님을 닮으려고 열심히 노력해왔다. 마음이 힘들 때 읽었던 교수님의 수필집 ‘내 생애 단 한번’은 자꾸만 빗나가려던 나의 인생길을 돌아보고 제대로 걷게 도와주었다.
번역한 책이 나올 때마다 ‘좀 더 부끄럽지 않은 책이 나오면, 좀 더 자신 있는 책이 나오면 한권 들고 교수님을 찾아뵈야지’라고 생각하며 미뤄왔었다. 그러다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얼마나 놀라고 슬프고 안타까웠는지 모른다. 미루고 미루다가 드리지 못한 말씀을 이제야 글로 대신한다.
“교수님, 교수님 덕분에 제가 좋아하는 일을 찾았어요. 교수님 덕분에 주위 사람들을 사랑하고 배려하고 함께 행복하게 사는 게 얼마나 소중한 일인지 깨달았어요. 교수님, 감사합니다. 존경합니다. 사랑합니다. 주님 곁에서 편히 쉬세요, 교수님.”
한정아(88 영문) 번역가
* 글 목록
#1.여전히 제 안에 살아 계신 선생님 : 왕선택(84 영문) YTN 기자
#2.내 인생의 나침반 : 한정아(88 영문) 번역가
#3.문학의 힘을 보여주신 선생님 : 정원식(92 영문) 경향신문 기자
#4.늦된 제자의 고백 : 이미현(96 사학) 프리랜서 에디터
#5.‘우리 모두의 스승’이 되신 ‘나의 선생님’ : 이남희(98 영문) 채널A 정치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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