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6회 자랑스러운 서강인, 이한일(60 경제) 동문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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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24-02-06 18:01 조회5,517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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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모르게 조용히, 서강에서 봉직했던 미국인 신부님들을 기리는 장학기금을 조성한 동문이 있다. 신분이 알려지는 것을 꺼려해 익명으로 기부하고 장학생 선발도 다른 이에게 맡겼지만 세상에 비밀은 없는 법. 철벽 수비에도 금이 가 알음알음 소문이 났다. 총동문회는 감사의 마음을 담아 2024년 신년하례식에서 그 동문에게 ‘자랑스런 서강인 상’을 수여했다.
1960년 서강대학교 개교와 함께 입학한 이한일(60 경제) 동문의 이야기이다. 그는 그동안 ‘정일우 신부 장학금’ 조성을 비롯해 ‘프라이스 신부 장학금’에도 큰 힘을 보탰다. 이제 이 장학금 기부자는 더 이상 익명이란 이름 뒤에 숨지 않아도 되게 된 셈이다.
이한일 동문은 모교 졸업 후 미국에서 노사관계 공부를 마치고 노사분규 현장에서 중재자로 40여 년을 헌신했다. 오랜 미국 생활 끝에 귀국하여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기도 했던 이한일 동문은 이제 남은 삶을 “가난한 사람을 위해 살고 싶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 시작은 모교 서강과 그가 서강대 재학 시절 만났던 세 분 신부와의 인연과 연결되어 있다. 이한일 동문의 두꺼운 삶의 페이지를 한 장씩 되짚어 넘겨보며 신부님과의 인연과 그 장학금을 조성하게 된 계기를 들어보았다.
Q. 어떠한 학창시절을 보내셨나요?
대한민국 역사상 가장 혼란스럽고 힘들었던 시기 속에서 자랐어요. 제가 열 살가량 되던 해, 6.25 전쟁이 발발했지요. 저는 삼남매 중 장남이었는데, 당시 백일도 안 된 막내 여동생과 두 살 차이가 나던 남동생의 손을 잡고 마포를 건너 피난 갔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부산으로 내려가 장남이었던 저는 김밥도 팔고 부모님 장사를 도왔어요. 당시에는 다 그렇게 살았어요.
서강대학교에 입학한 이후에는 4.19 혁명과 5.16 군사 정변이 연이어 일어났어요. 혼란과 격변의 시기였죠. 그래서인지 서강대학교에서 보낸 시간이 제게는 지식과 지혜를 쌓을 수 있는 귀중한 시간이었습니다. 당시 남덕우 전 총리, 이승윤, 김만제 전 부총리 등 서강학파로 알려진 대단한 분들이 경제학과 교수진으로 계셨어요. 쟁쟁한 교수님들과 학생들 사이에서 배움의 폭을 넓혀갈 수 있었죠.
Q. 재학 당시 ‘서강학보’의 3대 편집장을 역임하셨다고 들었는데요, 서강학보와의 인연이 궁금합니다.
서강학보가 당시에는 ‘서강타임스’였지요. 군대 제대하고 돌아오자마자 1963년부터 1966년까지 편집장을 맡았어요. 학보사가 꾸려진 당해에는 창간호가 발행되지 않았고, 제가 군대에 들어간 1961년에야 창간호가 발행됐어요. 군대에서 전역하고, 현 학보사의 뼈대를 많이 만들었죠. 당시에는 인쇄 기술이 지금처럼 좋지 않았고, 지원도 많지 않아서 힘들었어요. 우리 원고를 일간신문 인쇄공들이 납활자들을 한자한자씩 뽑아서 배열하여 게라(galley)로 인쇄해주면 그 초고 게라들로 교정을 합니다. 교정을 마친 최종 게라들을 백지 위에 오려 붙여서 편집을 했었죠. 지금에야 상상할 수 없는 일지만요. 당시에는 학보 일이 워낙 많고 바쁘다 보니, 정작 학교 공부는 뒷전이고 매일같이 학보 일에만 몰두했던 기억이 납니다.
Q. 1967년도에 졸업하셨는데 이후의 삶이 궁금합니다.
한국에 파견된 미국 평화봉사단 직원으로 1년가량 근무하다가 1968년에 미국으로 유학가 코넬대학교에서 3년 정도 공부했어요. 이후 1973년도에 취직해서 38년간 뉴욕주 노동위원회에서 일했죠. 자동차 노조, 전국교원노조회, NEA 등 다양한 곳에서 일했어요. 그러다 2005년에 한국에 돌아와 모대학 공공정책대학원의 초빙교수로 4년 정도 강의했습니다.
교수 부임 시절 오전에는 학부 강의, 저녁에는 대학원 강의를 맡았어요. 학부생들 중에는 주로 외국인 학생들이 많았기에 낮에는 영어로, 밤에는 한국어로 강의를 했던 기억이 나네요. 당시 참 재밌는 학생들이 많았는데, 네팔에서 온 학생, 독일에서 온 학생 등 다양한 국가에서 온 학생들과 재밌게 공부했던 기억이 많이 납니다. 대학 문화 역시 예전처럼 질문을 많이 하고, 교수와 학생들 간 자유롭게 대화를 주고받는 분위기로 되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해요.
예수회 대학의 교육은 유대인의 교육과도 맞닿아 있는 부분이 많은데, 꼬치꼬치 따지며 질문을 많이 하는 분위기가 당시 서강대에서 가장 좋았던 부분 중 하나입니다.
Q. 가장 기억에 남는 학창시절의 추억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퀴어리(Quiery) 신부님께서 가르치던 영문학 수업을 들었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영어로 노래 한번 해봐라’하고 노래를 시키시더니, ‘너 이도령 해라’라고 말씀하셨어요. 그렇게 얼떨결에 영어판 뮤지컬 춘향전의 이도령 역을 맡아서 공연했던 게 기억에 남아요. 당시 춘향이는 영문과에 다니던 64학번의 박천애 동문이 맡았었어요. 당시 함께 공연했던 배우와 스태프 전원이 재학생들이었지요. 영어 뮤지컬의 넘버들은 퀴어리 신부님께서 작곡하셨는데, 어찌 보면 우리나라 최초의 영어 뮤지컬인 셈이죠. 65년도에 첫 공연을 하고 2~3년 후에 배우와 스태프 모두 새로운 팀으로 구성하여 교내와 남산 드라마센터에서 한번 더 무대 올렸던 기억이 나네요. 참 재밌었습니다.
또 한 가지 기억은 입학하고 4월 18일에 개강을 했는데, 다음날인 4월 19일에 4.19 혁명이 일어난 거예요. 우리들은 혁명이 일어나도 학교에 가야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모두들 강의실에 앉아있었는데, 당시 수업의 교수님이셨던 구상 시인께서 들어와 ‘이대, 연대 다 데모하러 나갔는데 너희들은 뭐하는 거냐’며 강의실에서 쫓아내셔서 데모하러 나갔던 기억이 있습니다. 당시에는 교수연구실도 따로 없었죠. 교수실에 들어가면, 모두들 칸막이를 쳐놓고 학생들을 맞이했던 기억이 납니다.
하지만 이보다 더 값진 서강에서의 추억을 되살려 본다면, 정일우, 프라이스, 메이스 세 분 신부님을 만났다는 것 입니다.
Q. 정일우 신부님, 프라이스 신부님, 메이스 신부님 세 분과의 인연에 관해 말씀해주실 수 있으신가요?
우선 정일우(John V. Daly) 신부님과는, ‘이상하게 친해졌다’고 표현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정일우 신부님께서 1960년에 처음 서강대에 오셨을 때는 사제서품도 받기 전이셨어요. 이후에 미국에서 서품을 받으시고 다시 한국에 오셨는데, 그때부터 신부님과 급속도로 친해졌습니다. 당시 서강대에 데일리 신부님이 두 분 계셨는데, 한 분(John P. Daly)은 덩치가 크시고, 정일우 신부님은 작으셔서 ‘꼬마 데일리’라고 불렀던 기억이 많이 납니다.
제가 지방의 군병원에 장기입원했던 적이 있었는데, 그때 신부님께서 여러 번 문병오셨어요. 저와 큰 접점도 없었는데, 사심 없이 제게 한결같이 따뜻하게 다가와 주셨던 그분의 모습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합니다. 그래서인지 2, 3년에 한 번씩 귀국할 때마다 찾아뵈었습니다.
프라이스(Basil M. Price) 신부님은 제가 노동법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를 만들어주신 분이에요. 고등학교 선배님과 그분의 강의를 듣고, 노사관련법을 제대로 공부해야겠다고 마음먹게 됐습니다. 이후 미국 유학길에 올라 노동법, 단체협약, 분쟁 조정 등을 공부하고 40년 간 해당 분야에서 일을 하게 됐죠. 제게 귀감이 되어주신 분입니다.
메이스(John D. Mace) 신부님은 서강을 설립한 미국 예수회의 마지막 서강대 총장이기도 하셨고 또 제게 친구와도 같은 분이셨어요. 한국에는 1962년도쯤 오셨지요. 당시 속초 하조대에 서강대 학생들을 위한 별장이 있어서 여름마다 바다에서 수영하고, 계곡에서 샤워를 하며 친구들과 놀았는데, 그곳에서 메이스 신부님과도 친해져서 좋은 인연을 이어 나가게 됐습니다.
Q. 귀감이 된 그분들의 가치관을 전해주실 수 있을까요?
정일우 신부님은 늘상 ‘예수님처럼 살고 싶다’고 말씀하시곤 했어요. 당신께선 가난한 사람들을 사랑하고, 타인을 아낌없이 돕는 삶을 원하신다고요. 많은 정치인, 기자들이 그분께 ‘왜 철거민과 사시냐’고 질문하면, 그분께선 ‘가난한 사람들이 좋다’, ‘가난하게 살고 싶은 게 목적이다’라고 말씀하셨어요. 다른 꿈은 없다고,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하며 그들의 정신적인 지주가 돼주는 것이 오롯한 꿈이라고 하셨죠.
프라이스 신부님과 메이스 신부님은 제게 ‘침묵하고 행동하지 않는 것’으로 많은 것을 가르쳐주신 분들이에요. 많은 이들이 앞에 나서며 말하고 행동하는 것만이 좋은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하지만, 어떠한 상황에서는 행동하지 않고, 말하지 않는 것으로부터 더욱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습니다.
세 분의 영향으로 타인을 돕고, 누군가의 꿈에 보탬이 되는 삶을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됐죠. 그분들이 제게 특별한 무언가를 해주셨다기 보다는, 그분들의 존재 자체가 제게는 삶의 표본이었습니다.
제가 20여 년 동안 익명으로 기부금을 조금씩 내고 있는 이유는 장학금을 받는 학생들이 기억해야 할 이름이 내가 아니라 정일우, 프라이스, 메이스 신부들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처럼 사시려던, 빈민들의 친구 정일우 신부님, 한국 최초의 노동문제연구소를 창설하시고 연구소와 생사를 함께 하신 프라이스 신부님, 우리 서강을 설립한 예수회 미국 위스컨신 관구의 마지막 서강대 총장이셨던 메이스 신부님을 기리기 위해서입니다.
프라이스 신부님 장학금은 저는 마중물만 조금 댄 것이고, 그 장학금을 시작했고 운영해온 분들은 수십년간 프라이스 신부님을 기리고 있는 “화요가족” 회원들입니다.
Q. 세 분의 공통점은 무엇인가요?
세 분 모두 한국과 서강을 정말 사랑하셨고 꼭 한국에서 눈을 감기를 바라셨습니다. 메이스 신부님은 1985년부터 2022년까지 동 필리핀과 동 티모르, 캄보디아에서 예수회 신부를 양성하시고 봉사하셨는데, 파킨슨병 치료차 도미하셨다가 아시아로 돌아오지 못하시고 안타깝게도 미국에서 돌아가셨어요. 그나마 정일우 신부님과 프라이스 신부님께서는 한국에서 돌아가셨고 묻히셨지만 평생 한국과 서강을 위해 헌신하다 타향에서 돌아가셨다는 점이 마음 아픕니다.
메이스 신부님은 외지 곳곳으로 봉사를 다니시면서도 꼭 한국 땅을 밟고 다른 곳으로 이동하곤 하셨어요.
그리고 무엇보다 가장 큰 세 분의 공통점은 세 분 모두 검소한 삶을 살며 평생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애쓰셨다는 거예요. 그분들과 함께 있으며 받은 가장 큰 선물은 정신적인 가르침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남을 사랑하는 법, 남을 위해 헌신하는 법, 이 세상을 조금이라도 나은 곳으로 만들기 위한 진심 어린 마음. 그분들은 그것을 제게 가르쳐주셨습니다. 눈을 감는 순간까지 자신보다 남을 생각했던 그분들의 생애가 더욱 많은 사람에게 기억되면 좋겠습니다.
이나윤(22 신방) 학생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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