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고산을 아십니까 #5. 故장영희 동문의 ‘노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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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18-06-27 09:33 조회14,770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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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동문의 삶의 무대이자 추억의 창고
‘뼛속까지 서강인’으로 자부했던 사람
제자·후배의 아픔과 고민이 새겨진 노고산
모교 영문과 교수였던 수필가이자 번역가 故장영희(71 영문, 1952~2009) 동문의 글 ‘돈과 사랑’(동아일보, 2006.9.8.)에는 장 동문의 제자인 재학생이 영작(英作) 수업 영어일기에 적어놓은 노고산이 나온다. 내용은 이러했다.
“나와 내 남자친구는 서로 정말 사랑한다. 하지만 우리는 심각한 문제가 있는데, 둘 다 너무 가난하다는 것이다. 내 친구들은 영화관도 자주 가지만 우리는 돈이 없어 못 갈 때가 많다. 남들이 롯데월드에 갈 때 우리는 노고산에 가고, 남들이 갈비집에 갈 때 우리는 분식집에 간다. 그는 아르바이트를 해도 어머니께 돈을 갖다 드려야 한다. 어디선가 ‘가난이 앞문으로 들어오면 사랑은 옆문으로 빠진다’는 말을 들었다. 가난이 싫어서 어떤 때는 그와 헤어질까 하는 생각까지 든다….”
학생은 일기 마지막에 ‘선생님,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라는 질문을 적어놓았다. 장 동문은 “돈이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 것은 아니니까”라는 취지의 답을 적었지만 마음이 편치 않다. ‘남의 인생이라고 함부로 말하고 있군. 어떻게 돈 없이도 사랑만 있으면 행복하리라고 단언하는가?’ 결국 일기장을 돌려주기 전에 장 동문은 질문 하나를 덧붙였다. “한번 가정해 보자. 아주 돈이 많지만 사랑하지 않는 사람, 돈은 없지만 사랑하는 사람, 즉 돈 없는 사랑, 사랑 없는 돈 중에 어느 쪽을 택하겠니?”
장 동문은 글을 이렇게 마무리한다. ‘돈과 사랑, 둘 다 있으면 제일 좋겠지만 내가 살아 보니까 인생은 이것 아니면 저것, 선택일 뿐, 결코 둘 다가 아니다. 그리고 내가 수미라면, 나는 그래도 사랑 없는 돈보다는 돈 없는 사랑 쪽을 택할 것 같다.’
서강의 모든 것을 담은 상징, 노고산
장영희 동문에게 ‘노고산 언덕’은 서강의 모든 것을 담은 추억의 창고이자 상징이었다. 장 동문은 졸업하는 제자와 후배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장영희, ‘사랑하는 너에게’, <문학의 숲을 거닐다>, 샘터사, 2005)
‘노고산 언덕 곳곳의 추억을 가슴속에 접고 학교라는 보호구역을 떠나 사회인으로 첫발을 내딛는 너는 지금 네 생애 가장 위대한 시작을 다짐하고 있다. … 네 삶의 주인은 너뿐이다. 너만이 네 안의 잠자는 거인을 깨울 수 있다. 서강에서 만났던 소중한 만남들, 이곳에서 보았던 너의 하늘, 너의 꿈, 너의 사랑을 마음속에 영원히 간직하거라. … 이제 세상에 나가 너의 젊음으로 낡은 생각들을 뒤엎고, 너의 패기로 세상의 잠든 영혼들을 깨우고, 너의 순수함으로 검은 양심들을 깨끗이 청소하고, 너의 사랑으로 외롭고 소외된 마음들을 한껏 보듬어라.’
삶의 모든 추억의 무대, 노고산
장영희 동문은 <코리아 타임즈>에 ‘스승의 날’을 맞아 기고한 글에서 이렇게 말했다.
‘사실 나는 그냥 서강대 교수가 아니라 뼛속까지 서강인이다. 서강대 학부를 졸업했고 석사 학위도 서강에서 받았으며 지난 10여 년 동안 서강에서 젊고 반짝이는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과거의 어떤 추억을 되돌아보든지, 그 무대는 언제나 서강이다. 노고산, 로욜라도서관, 알바트로스탑, 그리고 그 밖의 정겨운 건물들. 물론 캠퍼스보다는 서강이라는 이름의 그 의미가 내 삶을 뒷받침해준 것이겠지만 말이다. 서강이 아니었다면 나는 지금 이 칼럼을 쓰고 있지도 못했을 것이고, 어쩌면 이 땅에서 계속 살아가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노고산에 나무 심은 기수현(다니엘 A.키스터) 신부
“키스터 신부님께서 늘 부르셔서 노고산에 400~500그루 정도 나무를 심었어요. 심는다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또 물을 주어야 해서, 로욜라도서관 밑에 있던 연못에서 물을 길어다 물을 주기까지 했답니다. 신부님은 이것도 강의의 일환이라 말씀하시며, 나중에 사과나무에 열매가 열리면 공짜로 따다 먹으라 말씀하시곤 하셨습니다. 힘들긴 했지만 노고산에 나무가 울창한 모습을 보면 정말 뿌듯하답니다.”
이태규(81 영문) 동문이 영문과의 한결장학금 관련 인터뷰에서(2010년) 키스터(사진) 신부와 노고산을 위와 같이 회고했다. 이상근(90 영문) 동문 역시 키스터 신부를 이렇게 회고한다.
“학문적으로나 인격적으로나 제게 정신적 지주 같았던 분이세요. 다가가기에 조금 어렵기도 했지만 3, 4학년 때 사제관에 방문해서 밥도 얻어먹고 방에서 담소도 했어요. 겨울에는 노고산에 올라가 가지치기 하는 신부님을 도와드렸어요. 로욜라 동산에 연못이 있었는데, 나무를 심고 물을 주려고 양동이에 물을 길어 다니시던 교수님이 기억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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