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나고 싶었습니다 - 이성주(09 정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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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18-07-02 11:18 조회20,429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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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 한국 시대를 대비한다
방송 프로그램에 출연하며 ‘꽃제비 탈북민’으로 널리 알려진 이성주(09 정외) 동문을 만났다. 이 동문은 모교 졸업 이후 영국 정부 기금인 쉐브닝 장학생으로 2016년 워릭대에서 국제관계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풀브라이트 장학생으로도 선발된 덕분에 오는 9월이면 미국 조지메이슨대학으로 박사 학위 취득을 목표로 떠난다. ‘통일 한국’ 시대를 대비한 인재가 길러지고 있다.
◌ ‘꽃제비 탈북민’이 무슨 의미인지요?
‘꽃제비’라는 단어가 듣기에는 예쁘지만, 북한에서는 떠돌아다니면서 구걸하러 다니는 어린이를 뜻합니다. 군관이었던 아버지가 김일성 주석 사망 이후 “공화국에는 희망이 없다”라고 불만을 말했던 게 발각돼서 온가족이 함경북도 경성군 관모리로 추방됐습니다. 돈이 떨어지자 부모님께서는 식량을 구해오겠다면서 1998년 차례로 떠나셨어요. 그 때 제가 12살이었습니다. 살기 위해 또래들과 패거리를 지어 유랑 생활을 시작했죠. 부모님을 보고 싶다는 희망만으로 하루하루 힘겹게 살아냈습니다. 꽃제비로 무리 지어 다니던 동료 2명이 사망해서 제 손으로 땅에 묻어주기도 했습니다. 4년 동안 꽃제비 생활을 하다가 대한민국에 정착한 아버지 도움으로 저 역시 2002년 10월 탈북했습니다.
◌ 남한 적응하는 과정도 쉽지 않았을 텐데요.
중학교 다닐 때 싸움을 참 많이 했습니다. 제 덩치가 크지 않지만 북한 길거리에서 ‘꽃제비’ 생활하며 생존하고자 실전에서 익혔던 싸움 기술을 당해낼 이는 없었습니다. ‘원펀치’라는 별명도 얻었죠. 17세에 중학교 1학년으로 입학한 것이다 보니 적응이 어려워서 결국 1년도 안 돼 자퇴했습니다. 검정고시로 중학교를 마쳤죠. 이 과정에서 은인이신 교회 담임목사님과 목사님의 딸인 누나로부터 커다란 도움을 받았습니다. 이후 부산에 있는 지구촌고등학교에 입학해서 기숙사 생활을 하며 제대로 공부하기 시작했습니다. 소중한 인생을 허비하지 않고, 제 인생에 대한 예의를 갖추고자 꿈을 찾아 나선 시기였습니다.
◌ 모교 재학 시절 어떤 학생이었습니까?
주로 공부만 했습니다. 기숙사, 도서관, 강의실, 체육관 등만 쳇바퀴 돌 듯 다녔습니다. 다산관 6층에 자리한 소강의실이 항상 열려 있었던 덕분에 시험 기간이면 탈북민 친구 및 남한 동기들과 같이 공부하곤 했습니다. 그래도 고등학교 시절처럼 눈코 뜰 새 없이 공부만 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벨라르미노 기숙사 생활을 통해 친구들도 많이 사귈 수 있었습니다. 고등학생 시절 공부하면서 꿈을 찾았다면, 서강에서는 공부를 통해 꿈을 넓힐 수 있었습니다.
◌ 주로 어떤 공부를 했나요?
정치외교학과로 입학해서 신문방송학을 복수 전공했습니다. 김영수, 이근욱, 류석진, 정영철, 손호철, 박호성 교수님과 정치외교학에 대해 깊고 넓게 공부할 수 있었습니다. 특히, 모교에 개설된 북한 관련 수업은 모두 들었습니다. 3학년 1학기부터는 대학원 수업을 청강했습니다. 대학원생들이 주체사상과 관련한 강의 들을 때면 늘 제게 개인적인 경험에 대해 물어보곤 했답니다. 신문방송학과에서는 조맹기, 나은영, 김균 교수님과 함께 정치커뮤니케이션에 대해 파고들었습니다. 스피치 수업을 통해 정훈(70 신방) 교수님과 알게 됐는데, 3분 스피치를 통해 북한에서의 경험담을 발표한 뒤부터 수업 시간 반장 역할을 맡기시더군요. 워낙 사람을 잘 챙기시는 선배님이시다 보니, 졸업 이후 교수님 댁에도 찾아갈 정도로 가까워졌습니다.
◌ 성적 관리를 잘한 모범생이었겠네요.
수업 시작 전에 교수님께 강의를 녹음해도 괜찮겠냐는 허락을 늘 구했습니다. 수업에 충실하게 임하고, 녹음한 강의를 노트에 성실하게 옮기며 복습했습니다. 워낙 꼼꼼하게 정리하다보니 교수님께서 제 노트를 빌려 가신 뒤에 거기에서 시험 문제를 내신 적도 있었습니다.(웃음) 제가 적은 문제의 답안지가 족보로 돌아다니고 있는 것을 한번 확인한 적도 있고요. 7학기 만에 조기 졸업할 수 있었는데, 서강에서 공부하는 게 무척 즐거워서 가능했던 것 같습니다. 수업종, 독후감, 지정좌석제 등의 긍정적인 효과를 톡톡히 봤습니다. 아무래도 성실해질 수밖에 없더라고요.
◌ 공부 외에 전념했던 활동이 있다면요?
탈북민 학생 모임인 ‘우리 하나’ 동아리에 2학년 이후 가입해서 활동했습니다. 박호성 교수님이 지도해주신 정치 사상 동아리 활동도 했습니다. 기억에 남는 활동 가운데 ‘한미 학생회’가 있는데, 한 달 동안 한국과 미국 대학생들이 같이 지내면서 북한 정책에 대해 토론하는 시간이었습니다. 참가비가 150만 원이나 되어서 처음에는 참여할 생각도 못하고 있었는데, 교무처를 통해 100만 원 지원을 받았습니다. 부족한 금액은 김영수 교수님께서 참여하시는 모임의 회원들이 정기 모임때 5만원씩 모아주시다보니 금세 채울 수 있었습니다. 공부하겠다는 의지를 가지니 모교와 교수님들과 선배님들이 모두 도와주시더라고요. 감사하고 소중한 경험이었습니다.
◌ 동문들과의 교류도 활발한지요?
2학년 때 ‘알파시그마누’에 가입할 것인지를 묻는 학교 이메일에 제대로 응하지를 못해서 가입 못한 게 무척 아쉽습니다. 그게 뭐하는 것인지를 몰랐거든요.(웃음) 일면식도 없는 상태에서 동문이라는 이유로 제게 먼저 만나자고 해주신 분은 지금 인터뷰어이신 이정국 선배님이 유일하십니다. 제가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올해 1월 처음 뵙고 벌써 식사 자리만 여러 차례 가졌는데 동문이라는 이유만으로 살뜰하게 챙겨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제 결혼식 선물까지 챙겨주시니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이성주 동문은 인터뷰 뒤 지난 5월 말 결혼)
◌ 얼마 전 영어 공부 책을 펴냈더군요.
탈북하고 나서 17세 때 정착교육을 받는 동안 하나원에서 처음 알파벳을 봤습니다. ‘미국놈 말’이 이런 거구나 그때 알았습니다. 길거리에서 ‘폭탄 세일’이라고 적힌 전단지를 보고 백화점 점원에게 ‘폭탄 어디서 파느냐’고 물었을 정도로 무지했죠. 학창 시절 영어가 꼭 필요한 공부라 생각해서 정말 다양한 방법으로 영어를 익히려고 노력했습니다. 그 때 온몸으로 경험한 시행착오와 함께 효과적인 영어 학습 방법을 책으로 펴낼 기회가 생겨서 덜컥 출판까지 이어졌습니다. 꽃제비 경험을 담은 영어 책 ‘Every Falling Star’를 2016년 발간한 뒤에, 한국으로 역수입된 게 한국어 번역본인 ‘거리 소년의 신발’입니다. 국내 출판 관계자가 어떻게 영어 책을 먼저 펴냈는지를 궁금해 하셔서 제 영어 학습법을 설명해드렸더니 ‘책으로 내면 영어공부로 고생하는 사람들에게 도움되겠다’라며 출간을 제의하셨어요. 그렇게 나온 게 ‘나의 1·2·3 영어 공부’입니다. 앞으로 공부하는 데 열중하다보면 돈이 많이 필요할 것 같다는 생각에 출판했는데 잘 팔릴지 모르겠습니다.(웃음)
◌ 앞으로 계획이 궁금합니다.
2015년부터 탈북민을 돕는 북한인권시민연합에서 컨설턴트로 일하고 있습니다. 지난 4월에만 탈북민 60명을 구조하는 데 힘을 보탰습니다. 탈북 루트와 현지 상황을 점검하기 위해 동남아를 방문할 계획이 가장 가까운 계획입니다. 도와 달라는 탈북민들의 연락이 자주 오는데, 돌려받지 못할 것이란 것을 알면서도 금전적으로 도와줄 때가 있습니다. 이제 결혼하고 유부남이 되면 가정을 돌봐야하기 때문에 경제적으로는 많은 돈을 못 쓸 것 같습니다. 풀브라이트 장학금을 받게 되어 미국 버지니아에 위치한 조지메이슨대학교로 박사 학위를 위해 다녀올 예정입니다. 한반도 갈등을 풀어낼 방법에 대해 연구하고 싶습니다.
인터뷰 진행 이정국(74 수학) 수학과 동문회장
이성주 동문에게 결혼 선물로 부인인 최영희(74 수학) 동문이 직접 그린 그림을 선물하는 이정국(74 수학) 동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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