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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훈(67 수학) 한국수출입은행장을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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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5-01-19 10:28 조회11,93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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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실과 신뢰의 리더십 서강에서 배웠습니다

서강옛집 편집위원회가 이덕훈(67 수학) 한국수출입은행장을 만났습니다. 이 행장은 한국개발연구원 선임연구위원, 대한투자신탁증권 대표이사, 우리금융지주 부회장, 우리은행 은행장, 한국은행 금융통화위원회 위원 등을 거친 금융통입니다. 이 행장은 67학번 수학과로 입학해 졸업한 뒤 69학번 경제학과로 학사 편입한 까닭에 모교 학사만 두 개를 보유했습니다. 이후 미국 웨인주립대학교에서 경제학 석사 학위를 받고 미국 퍼듀대학교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습니다. 인터뷰에는 표정훈(88 철학) 편집인, 정명숙(83 불문), 조광현(88 경제) 편집위원, 정범석(96 국문) 편집팀장 등이 참여했습니다. <편집자>

표정훈 무척 바쁘실 텐데 인터뷰에 응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이덕훈 수출입은행의 특성상 해외 출장이 매우 잦습니다. 아시아, 미주, 아프리카 등 각 대륙마다 개발은행들이 있거든요. 여기에 세계은행, 국제통화기금(IMF) 까지 국제 금융기구들이 있고 각국 수출입은행들의 모임도 있어요. 유엔개발계획(UNDP)의 두만강유역개발계획(GTI)도 있고요. 이런 국제금융기구와 해외 은행, 개발계획들은 한국수출입은행과 밀접히 관련돼 있기 때문에 정기적으로 출장 다니는 것 만해도 참 많습니다. 해외에서 열리는 공식 모임만 매년 8번 정도에 수출입은행 자체 프로젝트도 많아서 최소한 한 해 12번은 해외 출장이 잡힙니다.

표정훈 한국수출입은행이 일반 은행과 다르다는 건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만, 그 중에서도 큰 특징을 말씀해주신다면 무엇일까요?

이덕훈 예를 들어 한국수출입은행은 EDCF, 즉 우리나라가 개도국의 경제발전을 지원하고 경제교류를 증진할 목적으로 설치한 대외경제협력기금을 시행하는 기관입니다. 우리나라는 2009년 11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산하 원조 선진국 클럽으로 불리는 개발원조위원회(DAC)에 세계에서 23번째 회원국으로 가입했지요. 이로써 전 세계에서 수원국(受援國)에서 공여국(供與國)으로, 즉 원조 받는 처지에서 원조를 하는 처지로 바뀐 사실상 첫 번째 나라가 된 겁니다. 우리나라의 경제개발 경험과 성과가 세계 많은 개도국들의 모델이 되고 있다는 것에서 큰 자부심을 느끼곤 합니다. 저는 수학과를 마치고 경제학과에 편입해서 졸업했는데 경제학이 우리나라 경제 발전, 국가 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 분야라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그 시절엔 저 같은 경제학도들이 많았어요.

정명숙 행장님께서는 KDI(한국개발연구원)에서 오래 일하셨습니다. KDI는 우리나라 경제개발의 설계사 역할을 한 곳으로 평가받고 있는데요.

이덕훈 KDI는 단순한 연구기관 이상의 큰 역할을 한 곳입니다. 김만제 초대 원장님이 서강학파를 이끈 분들 중 한 분이기도 하고요. 가장 중요한 과제는 제도 구축, 제도 형성(Institution Building)이었어요. 여기서 제도라는 건 구체적인 제도 하나하나를 가리킨다기보다 전반적인 사회 시스템을 뜻해요. 경제개발이라는 게 법, 제도, 행태나 관행, 의식 등이 종합적으로 바뀌면서 뒷받침되어야 제대로 이뤄질 수 있으니까요. 이른바 저개발국들의 가장 큰 문제가 바로 이것이기도 합니다. 아무리 해외 원조를 많이 받아도 제도 구축이 미비하면 밑 빠진 독에 물 붓기가 되거든요.

조광현 KDI에서 20년 간 일하셨으니 우리나라 경제 개발 정책의 산 증인이라고 하실 수 있겠습니다.

이덕훈 제도 형성 디자이너 역할에 헌신했던 것에 대하여 자부심과 보람을 느낍니다. 우리나라는 절대 빈곤에서 벗어나 개발도상국으로, 또 선진국으로 발전하기 위해 농업국가에서 산업국가로 탈바꿈해야 했고, 이를 위해 개방 경제 체제를 구축하면서 대외 교역을 증진시켜야 했습니다. 구체적인 예를 들면 우리나라가 오랜 기간 수입 억제책을 쓰다가 90년대 이후 자유화로 방향을 크게 바꾸었잖습니까? 그런 큰 방향에 따라서 다양한 제도, 관행, 의식 등이 바뀌어야 했던 거지요.

물론 경제가 발전한다고 해서 모든 문제가 해결되느냐 하면 그렇지 않아요. 경제 발전에는 불균형 문제, 격차 문제가 따르기 마련이니까요. 이 문제를 조화롭게 풀어나가는 것이 매우 중요한 과제가 됩니다. 이것은 지금도 중요한 과제입니다만, 우리나라는 대체로 슬기롭게 잘 해왔다고 평가하고 싶어요. 그밖에 제도 형성에서 국민들의 경제에 관한 의식, 인식 수준도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KDI에서 경제교육에도 무척 많은 공을 들였어요.

표정훈 우리은행장 시절 행장님이 실천하여 보여주신 리더십을 지금도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당시 우리은행이 처한 상황이 참 어려웠다고 알고 있습니다.

이덕훈 정말 어려웠지요. 한일은행과 상업은행이 합병해서 우리나라 최대 은행으로 출범한 게 1999년 1월입니다만(한빛은행으로 출범, 2002년 5월 우리은행으로 상호변경), IMF 외환위기를 겪은 당시는 우리나라 금융 산업이 환골탈태해야 하는 시기였어요. 신(新)은행 시스템을 전면적으로 구축해야 하는 대변혁기였습니다. 막대한 공적 자금까지 투입되었고요. 직원 1만 5000명 중 4000명을 내보내야 했습니다. 제가 울기도 많이 울었어요. 캄캄한 바다 한 가운데 표류하는 난파선에서 선원들을 한 명씩 바다로 내던지는 기분이었으니까요.

일단 한빛은행의 시스템을 정비하고 KDI에 복귀했는데 2001년에 다시 가야했습니다. 우량고객이 다 빠져나가고 자산이 크게 줄어든 상태였습니다. 은행 조직이 군대 조직 못지않게 규율이 강합니다. 군대는 총포로 사람을 죽일 수 있지만 돈도 사람을 죽이고 살릴 수 있으니까요. 그런 조직인데 지점장들이 저에게 “방법이 없다”라고 하소연해요. 참담했습니다. 직원들이 자포자기 상태였어요.



정명숙 직원들과 함께 백두대간 산행에 나선 것도 바로 그런 상황에서 벗어나고자 시도하신 거네요.

이덕훈 그렇습니다. 한 차례 200명, 300명씩 두 달 동안 모두 7000명 정도가 버스 500대로 이동해서 1박2일 릴레이식으로 백두대간을 올랐어요. 전무후무한 일이라 사고 위험도 많았습니다만, 전문 산악인팀에게 인도자 역할을 맡기고 별도 대책반을 만들고 이동 버스는 모두 새 버스로 하도록 조치하고, 운전기사 분들도 그 전 날 쉰 기사 분들만 운전하도록 하는 등 만반의 준비를 했습니다. 그런 과정을 통해서 임원진과 일반 직원 간 화합과 단결이 단단해졌습니다. 한일은행 출신과 상업은행 출신 간 화해 분위기도 조성하고, 무엇보다도 다시 해보자는 의욕을 다질 수 있었습니다. 제가 은행장 했다고 하면 편하고 높은 자리에 있었다고 생각하는 분도 계시지만, 단 한번도 맘 편할 날이 없었습니다. 늘 백척간두에 선 심정이었어요.

표정훈 ‘서강대학생 이덕훈’은 어떤 학생이었습니까?

이덕훈 ‘착한 학생 이덕훈’이었지요.(웃음) 서강에서 받은 첫 인상은 학교가 참 아름답고 반듯하고 깨끗하다는 것이었어요. 제가 입학한 1967년에 우리나라는 가난하고 모든 게 열악했어요. 대학이라고 예외는 아니었습니다만, 서강은 달랐어요. 겨울에 스팀 난방이 된다거나 화장실이 수세식이라거나 하는 작은 부분들도 그랬지만, 공부를 엄청나게 시켰거든요. 우리 서강이 말입니다. 당시 우리나라에는 그런 대학이 없었어요. 전 과목에서 매주 퀴즈를 보고 한 학기에 시험을 네 번이나 치렀다니까요. FA제도도 엄격했고요.

저도 1학년 1학기 때 학사경고를 받았어요. ‘저도’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 당시 1학년 학생 상당수가 학사경고를 받았으니까요. 당시에는 일종의 담임 같은 지도교수제도가 있어서 4년 동안 교수님 한 분이 지도교수가 되어주셨는데, 저는 이한택 신부님(당시는 수사)이 지도교수였어요. 그런 제도를 통해서 서강은 단지 공부만 많이 시키는 게 아니라 학생들을 인격적으로나 정신적으로도 잘 이끌어주었어요.

표정훈 서강에서 받으신 교육은 어떤 교육이었다고 보십니까?

이덕훈 서강이 저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주었습니다만, 가장 큰 것은 성실성이라고 생각해요. 성실성이라고 하면 별 것 아니고 평범한 것 같지만 사실 이게 세상을 살아가는 가장 큰 힘이 되거든요. 의무에 충실하고 책임을 다하는 자세 하나만큼은 대다수 서강 출신들이 학교에서 확실하게 몸에 익혔다고 봐요. 실력도 실력이지만, 입학할 때와 졸업할 때 서강 출신들이 가장 크게 달라지는 면이 바로 성실성일 겁니다. 졸업 후 지금까지 많은 후배들을 만나보고 일도 함께 해봤지만, 역시 성실성이 남달라요.

조광현 서강의 현주소와 방향에 관해서 걱정하는 목소리도 없지 않습니다.

이덕훈 제가 다닐 땐 700명 규모였지만 지금은 그 열배가 훌쩍 넘지요? 어떤 방향으로 어떤 비전을 갖고 서강이 나아가야 하는가, 체계적으로 깊이 고민해야 할 문제입니다. 일단 서강이 갖고 있던 기본 정신이랄까요, 성실성과 책임감, 전문성, 합리성과 공정성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이게 바탕이 되어야 ‘믿을 수 있는 서강’이 될 수 있지 않겠어요? 여기에 진작부터 글로벌화 수준이 높은 대학이었다는 특징도 충분히 살려나가야 하겠습니다.

사실 책임감, 전문성, 합리성, 공정성, 신뢰성 이런 가치들은 한 국가가 선진국으로 진입하기 위한 조건이기도 합니다. 그런 게 뒷받침되어야 쓸데없는 사회적 비용을 줄이고 저비용, 고효율을 달성할 수 있으니까요. 현실적 제약이 만만치 않겠지만 서강이 그러한 기본적 가치에 충실한 대학, ‘기본이 되어 있는 대학’으로 발전하기를 바랍니다.

조광현 마지막으로 동문들에게 드리고 싶은 말씀을 들려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이덕훈 서강 동문들이 모두 사회 각계각층에서 잘 하고 계십니다만, 행복하게 자기 세계를 개척해 나가시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자신감을 갖고 보다 적극적으로 자기 세계를 개척해나가십시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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