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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자촌 예수, 빈민사목 정일우 신부 영결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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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4-06-05 09:32 조회17,43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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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사람이 되려한 예수회 신부, 정일우(존 V. 데일리) SJ 신부의 영결미사가 6월 4일 오전 8시 30분서울 신수동 예수회센터 성당에서 봉헌되었습니다. 세상에 온 지 79년, 한국에 온 지 54년 만에 서강의 곁을 떠나는 자리에는 사제, 수도자, 동문, 지인 등 500여명이 모여 고인을 배웅했습니다. 성당 2, 3, 4층을 가득 메운 이들은 가슴 깊이 고인의 뜻을 기리고, 고인과 추억을 회상하며 참았던 눈물을 쏟았습니다.

 

총동문회가 3일 오전, 60학번부터 85학번까지의 동문들에게 고인의 선종과 영결미사 소식을 알리는 휴대폰 문자를 보냈고, 동문들은 ‘꼬마 데일리’로 불린 정일우 요한 신부(John Vincent Daly)와 작별하고자 많은 분들이 영결미사에 참석했습니다.

 

예수회 한국관구장 신원식 신부는 미사를 주례하면서 병환 중인 정일우 신부와 나눈 일화를 전했습니다. “정 신부님은 1년가량 치료하면 병이 나을 것으로 보고, 관구장인 나에게 ‘빨리 나아서 캄보디아에 가고 싶으니 그곳으로 보내달라’고 말했다”면서 “늘 가난한 이들과 함께 하고 싶어 했던 분이어서 제가 보내드리겠다고 약속했는데…, 캄보디아에 가시지는 못했지만 후배 신부들이 캄보디아에서 대신 열심히 일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이어 “정 신부님은 30일 또는 8일 피정지도를 하시고 나면 늘 5일 동안 설사를 하셨다. 아마 당신이 그동안 빨아들인 세상의 독을 피정을 하시면서 다 밖으로 내보내야 했기 때문일 것이다. 누군가를 온전히 사랑한다는 것은 그 대상이 가진 어둠과 악함, 상처들을 다 빨아들이는 것이다. 그분은 마지막 10년 동안 병고를 치르면서 세상의 모든 독을 다 빨아들이셨을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습니다. 관구장 신부는 또 “그분의 사랑이 내 마음 속에 남아 있으면, 그분은 우리 가슴 속에서 영원히 살아계실 것”이라면서 “정 신부님을 위해 기도할 필요가 없다. 오히려 그분이 우리를 위해 기도해 주시길 청한다”고 말했습니다. 평화의 인사를 제안하면서는 “신부님은 생전에 자신이 죽으면 ‘내 장례식을 축제처럼 지내 달라. 사랑과 기쁨을 나누는 자리이길 바란다’고 말씀하셨다”고 전했습니다.

 

모교 사회학과 교수를 역임했고 고인과 함께 빈민사목을 해온 박문수 신부(예수회)는 강론을 맡아 고인에 관한 많은 추억을 회상했습니다. 박 신부는 “예수회 수련장 시절 정일우 신부는 수련수사들이 시위에 참여하고 달동네를 체험하도록 했는데, 이런 권고에 항의하는 수련자에게 “이것을 배우지 못하면 예수회 활동을 할 수 없다”고 말했다”면서 “항상 몸으로 실천할 것을 강조했고, 청계천 판자촌에서, 양평동 판자촌에서, 복음자리 마을에서, 상계동에서, 괴산에서 빈민이나 농민들과 살면서 마치 어머니처럼, 가난한 사람들에게 희망과 위로와 생명을 주면서 우정을 나누어 왔다”고 전했습니다.

 

또한 “언론탄압이 극심하고 시절이 엄혹하던 유신 시기에 정 신부님은 혼자 광화문에 나가 영문으로 쓴 ‘한국이여 슬프네. 언론자유가 죽어가네’란 푯말을 들고 서 있었다”는 일화를 소개한 뒤 “신부님은 늘 ‘주민과 이웃이 되는 것에서 리더십이 나온다’는 자세를 견지했고, 가난한 사람들의 문화를 지키는 보금자리 원칙에 충실했는데 이것이 가톨릭 서울대교구 빈민사목의 모델이 됐다”고 말했습니다. 끝으로 “정일우 신부님은 우리에게 큰 은총이었다”면서 “그는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모습으로 나타났다”고 강조했습니다.

 

정일우 신부에게서 주교 서품 피정을 받았던 이병호 주교(전주교구)는 추도사에서 “예수회 이냐시오 성인의 영성수련이 낳은 것은 프란치스코 교황뿐만 아니라 정일우 신부도 마찬가지”라면서, “나는 이런 분들을 조금이라도 닮아보려고 했는데, 나는 껍질만 닮고 정 신부님은 속알을 닮아서, 그분을 보면 예수님을 직접 뵙는 것 같았다”고 말했습니다.

 

조사(弔辭)는 상계동부터 고인과 빈민활동을 함께 한 손인숙 수녀(성심수녀회)와 빈민운동의 대부 고 제정구 씨의 부인인 신명자(복음자리 이사장) 씨가 했습니다.

 

손인숙 수녀는 정일우 신부의 삶을 세 단계로 나누어 소개했습니다. 첫째가 가난한 이들을 돕는 시기, 둘째는 빈자와 함께 하는 것으로 충분했던 시절, 셋째는 실제로 가난한 사람이 된 시절이라고 설명했습니다. 그러면서 “빈자를 위한 삶, 가난한 사람과 마주하는 삶을 살면서도 우리에게 ‘그들과 그냥 함께 살아라. 무슨 일을 하려 들지 말라’고 말씀해 적잖이 당황했는데 ‘내가 도움을 주는 게 아닌, 나에게 그들이 필요한 사람이라는 것을 서서히 체험하면서 큰 깨달음을 얻었다”고 말했습니다. 이어 “움막이든 처마밑이든 가리지 않고 자고 생활했던 정 신부님은 때때로 가난한 사람들과 똑같이 악다구니도 쓰고 화를 내기도 했는데, 얽매이지 않고 자신 안에 들어 있는 악머구리를 드러낼 수 있는 자유를 가진 분이었다”고 회고했습니다.

 

신명자 씨의 조사는 참석자들의 심금을 울렸습니다. 정 신부를 회상하며 “우리의 영혼을 휘저은 분” “시시하게 살지 않은 분” “언제나 100%였고, 당신의 사랑을 몽땅 보여주고 몽땅 주고 가신 분”이라고 말했습니다. 이어 “신부님은 아이들과 물장난을 쳐 온집안을 난장판을 만들어놓던 개구쟁이였고, 사람들과 날밤을 새워 이야기하고, 온종일 어울려 춤을 추는 끼가 넘치는 분이었고, 무엇이든 온전히 몽땅 줘버리는 그 분의 영성과 자유로운 품속에서 부족한 우리들이 커왔다. 신부님을 만난 것 자체가 축복이었다”면서 울먹였습니다.

 

또한 “가장 어려운 사람이 우선이 되도록 가르침을 주었고,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배려가 삶의 기준점이 되도록 해주신 분”이라며 “돌아가시더라도 하늘의 별이 되어, 세상의 바람이 되어, 심지어 민들레꽃이 되어서라도 저희에게 와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고인은 이날 경기도 용인 천주교 공원묘지 예수회 사제묘원에 묻혔습니다. 앞서 정일우 신부는 지난 2일 오후 7시 40분 선종했습니다. 고인은 미국 예수회 위스칸신 관구에 입회하여 1960년 9월 한국에 들어왔으며, 1966년 6월 사제서품을 받고, 한국 예수회 수련장과 한국지구 부지구장 및 양성담당을 맡았습니다. 그동안 빈민운동에 투신해 복음자리마을, 한독주택 마을, 목화마을 등을 건립하고, 천주교 서울대교구 빈민사목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했으며, 1986년에는 제정구 전 의원과 함께 막사이사이상(賞)을 공동으로 수상했습니다.

 

이어 예수회 한몸공동체 초대 원장, 한국 예수회 제3수련장을 맡았으며, 1994년부터 충북 괴산에서 특수사목 농촌사도직 ‘누룩공동체’를 만들어 살다가 2004년 64일간의 단식기도 중 쓰러져 병고를 치르다 선종했습니다.

아래는 영결미사에 참석한 정훈(70 신방) 동문이 보내 온 글입니다.

정일우 신부 영결미사의 사람냄새
2014년 6월 4일 아침 서강대 예수회센터 성당ㅡ 먼지 나는 선거날, 그 곳은 적막했습니다. 말없이 잔잔하게 움직이는 소복의 신부님들과 울음을 참는 참배객들이 나누는 눈인사만 젖어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병호 주교(전주교구)의 인사말씀은 우리를 미소 짓게 만들었어요.

 

"정 신부를 보러 난민촌에 가면 제정구 선생이 곁에 있고 제정구를 만나러 판자촌에 가면 정일우가 있었다. 그들이 예수였다. 명색이 주교인 저는 껍데기였다. 오늘 이 미사 주보를 보고서야 정신부의 본명이 요한인줄 알게 됐다. 저는 그를 그냥 정일우 라고만 알았다."


농담처럼 던지신 주교님의 말씀에서 ‘사람냄새’를 짙게 맡았습니다. 국적을 떠나 직종과 종교를 넘어서서 귀천을 벗은 사람냄새 말입니다. 73년 청계천 판자촌에 들어가 빈민사목을 몸으로 실천하신 정 신부님은 제정구 선생과 함께 양평동, 목동, 상계동에서 밀려난 원주민들의 친구였습니다. 특히 77년 170세대를 이끌고 소사땅에 9평짜리 브로크집을 직접 지으면서 '복음자리'를 일구어낸 역사는 현대한국의 마케팅사에 기록해야 하지 않을까요. 이어서 잘 생긴 박문수 신부의 강론 역시 쿨했습니다. 그는 목소리도 감미롭지만 가난한 동네 현장에서 우리말을 배워서인지 가끔 얄궂은 농담이 매력적입니다.


"정 신부는 혹시 당신 장례식을 한다면 울지 말고 축제처럼 떠들썩하게 해달라고 하셨다. 그는 자유, 겸손, 빈한의 카리스마였다. 목동 원주민의 말이 기억난다. 정 신부는 우리의 어머니라고 말하더라. 남잔데 왜 어머니냐고 물으니 우리 생명을 출산해 주셨으니 어머니라고 해야 더 느낌이 좋다고 하더라."


조사는 두 분이 했어요. 성심 수녀회의 손인숙 수녀님은 고인을 오래 따라다녔다고 소개했습니다. 그런데 매우 철학적인 교훈을 알려주더군요.


"정 신부. 당부가 가슴에 남습니다. 난민촌에 와서 무엇을 돕거나 무슨 큰 일을 해야된다는 사명감을 갖지마라. 그냥 함께 있어라. 우리는 원조를 주는 기부자가 아니고 그냥 항께 있는 사람이다."


흔히들 소년소녀 시절부터 무엇이 되겠냐고 묻고 또 다짐을 하곤 합니다. 무엇이 되려고 밤잠을 안 잤지, 어떤 사람으로 남으려고 고뇌하지 않지요.


마지막 조사는 신명자 씨였습니다. 누구의 부인인지 아는 사람도 있었고 모르는 사람도 있었으나 내용에서 아, 그렇구나, 할 수 있었지요. 그녀의 선 굵은 말씀 자체로 누구의 부인이 아니더라도 존경스러움을 주더군요.


"학창시절부터 데모와 제적으로 반복되었던 꼴통 정구가 정일우 신부님을 만난 것과, 제가 그 정구를 만난 것이 지난날의 빛나는 축복이었다"로 시작한 그녀의 물기 배었으나 본때있는 진언은 아, 사람은 사람을 알아보기 마련이구나, 하며 가슴을 적시게 했습니다.


그녀의 조사는 이렇게 마쳤습니다.


"신부님은 익살, 장난기, 신명, 가난, 동행, 무소유, 자유스러움 그 자체였다. 정구와 다짐하며 주고 받으시던 말씀이 생각난다. 시시하게 살지 말자…"


그냥 ‘정구’라고 호칭하는 그녀의 고집에서 인생길의 동지, 반려, 동행이 사람 냄새와 더불어 와닿습니다.


영결미사에 오시지 못한 분을 위해 제가 받은 교훈을 적었습니다. 정일우 신부님이 하늘에 오르시어 제정구 선생과 영육간의 친구들과 당신을 미션으로 부르신 프라이스 신부님을 보듬는 모습을 봅니다.

다음은 동문인 조현철 신부(예수회, 77 전자)가 <한겨레> 6월 4일자에 쓴 조사입니다.

* <한겨레> 누구보다 사람이 되고 싶었던 ‘판자촌 예수’


<4일 예수회 센터 3층 성당에서 열린 정일우 신부 영결미사. 사제, 수도자, 동문, 지인 등 500여명이 모여 고인을 배웅했다. 3, 4층 성당은 조문객으로 꽉 들어차, 서 있는 동문들이 많았으며, 2층에 스크린을 마련해 영결미사를 중계했다>


<영결미사를 봉헌하는 가톨릭사제들. 왼쪽에서 두번째부터 고인이 투병하며 요양하던 서울시 종로구 평창동의 성이냐시오 공동체 안정호 원장신부, 박문수 신부, 이병호 주교(전주교구)>




<모교 사회학과 교수를 역임했고 고인과 함께 빈민사목을 해온 박문수 신부는 강론을 맡아 고인에 관한 많은 추억을 회상했다>


<정일우 신부에게서 주교 서품 피정을 받았던 이병호 주교(전주교구)가 추도사하는 모습>


<상계동부터 정일우 신부와 빈민활동을 함께 한 손인숙 수녀(성심수녀회)가 조사(弔辭)하는 모습>


<정일우 신부와 함께 빈민운동의 해온 고(故) 제정구 씨의 부인인 신명자 복음자리 이사장. 그의 조사를 듣고 눈물을 흘리는 사람이 많았다>

 
<2004년 대통령 탄핵을 규탄하는 촛불집회에 참석한 정일우 신부>


<올해 1월 4일 화요가족이 평창동 성 이냐시오의 집으로 새해 인사를 갔을 당시 정일우 신부의 모습. 건강이 나빠졌고, 프라이스 신부를 추억하는 회고발언을 길게 하던 지난해와 달리 휠체어에 기대어 “반갑습니다” 한마디도 힘들어 했다.>

 
<이웃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았던 젊은 시절의 건강한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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