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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듣는 은사님 명강의 - 이기백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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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03-11-17 17:11 조회10,52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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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에 대한 사랑과 진리에 대한 믿음은 둘이 아니라 하나다"

 

저는 근자에 의사의 권고에 따라서 원거리 여행을 삼가고 지내왔습니다. 그러나 이번 한국학 심포지움을 계획한 분들이 '진지한 토론을 마음껏 즐길 수 있는 모임'을 계획했다는 취지에 동감하여, 이 모임의 참석자 명단에 끼는 영광을 누리고 싶다는 생각에서 이렇게 동참하였습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도리어 주최자 측에 번거로움을 끼치는 것은 아닌가 하는 두려운 마음도 갖게 됩니다. 

 

아시다시피 학문의 연구는 진리를 탐구하는 데 그 목적이 있습니다. 이 점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근래에 와서 일반은 말할 것도 없고 학자들조차도 이 사실을 잊어버리고 있지는 않은가 하는 인상을 받아서 가슴이 아플 때가 있습니다. 사리사욕을 위해서 수단을 가리지 않는 풍조가 널리 퍼져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두려운 생각이 듭니다. 

 

최근에 프랑스의 역사학자 마르크 블로크의 유서를 읽을 기회가 있었습니다. 다 아시다시피 그는 아날학파의 대표적 학자 중의 한 사람입니다. 소르본 대학의 교수였던 그는 53세의 나이에 아내와 여섯 아이를 거느린 가장으로서 군대에 복무할 의무가 없었지만, 1939년 나치스 독일의 침략이 시작되자 자진하여 군대에 복무했습니다. 패전 뒤에는 레지스탕스 운동에 참여하였는데, 1944년에 체포되어 58세의 나이로 총살을 당했습니다. 그 고난의 시기인 1941년에 이 유서를 써 놓았는데, 그 유서 중에서 특히 저를 감동시킨 것은 "나는 dilexit veritatem이란 간단한 말을 내 묘석의 비명으로 써주기를 바란다."고 한 대목입니다. 그는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애국자였습니다. 그러한 그가 묘비문에는 'dilexit veritatem'이란 두 글자, 즉 '그는 진리를 사랑했다.'고 써주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실은 저 자신도 최근 지병이 악화되어 언제 세상을 떠나게 될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제 무덤 앞의 작은 돌에 이렇게 적어주기를 가족에게 부탁해 놓고 있습니다. "민족에 대한 사랑과 진리에 대한 믿음은 둘이 아니라 하나다."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마르크 블로크의 간결한 묘비문을 읽으면서, 그는 역시 진정 위대한 학자였다는 것을 새삼스레 느끼게 되었습니다. 저는 그의 정신이 오늘 한국사 연구자들 가슴 속에 깊이 새겨졌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합니다. 저는 정년퇴직을 할 때의 고별강연에서 진리를 거역하면 개인도 민족도 인류도 멸망할 것이라고 힘주어 이야기를 한 일이 있습니다. 그랬더니 한 학생으로부터 "진리란 무엇입니까? 진리는 늘 변하는 것 아닙니까? 결혼제도를 보더라도 처음 난혼이다가 대우혼이 되었고 이어 일부일처제로 변해오지 않았습니까?"하는 항의성 질문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렇게 답변을 하였습니다. "지금 암사동에 있는 신석기시대 집 자리를 가보면, 직경이 6m 정도의 움집으로 되어 있는데, 그것은 성인 부부가 자식 2,3 명을 데리고 누우면 가득 차는 공간인 것이다. 그래서 신석기시대에도 가족이 있었으며, 그것은 일부일처제를 기본으로 하는 핵가족이었을 것이라고 생각되고 있다. 그러므로 나는 신석기 시대에 난혼이 행해졌다는 것을 믿지 않고 있다. 그러나 우선 네 말이 옳다고 하자. 그 때에 어느 특정한 혼인형태가 아니라 그 같은 혼인형태의 변화과정 속에 숨어 있는 원리 원칙이 바로 진리인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저는 그 학생보다도 그 학생으로 하여금 진리를 무시하도록 만든 주위의 분위기가 더 문제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마르크 블로크는 같은 유서에서 "나는 그것이 어떤 핑계로 포장이 되건 간에 거짓에 대한 영합을 가장 더러운 마음의 문둥병이라고 생각한다."고 하였습니다. 그의 말대로 진리는 거짓말이 아닙니다. 그리고 진리는 우주와 인간을 꿰뚫고 있는 원리 원칙 혹은 법칙이기 때문에 인간의 운명을 좌우하는 힘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이에 대한 외경심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박은식 선생이 '학문이란 것은 천지를 개벽하고 세계를 좌우하는 능력이 있는 자'라고 한 것은 곧 진리를 탐구하는 학문의 힘을 말한 것입니다. 이 진리는 그러므로 그것이 오직 진리이기 때문에 존중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민족과 계급과 지연과 학벌에 의하여 이렇게도 되고 저렇게도 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마르크 블로크의 유서를 읽고 감동한 나머지 이같이 넋두리 같은 이야기를 하게 된 것 같습니다. 바라건대 오늘의 한국사 연구자들이 민족과 인류를 지탱하여 주는 진리를 사랑함으로써 한국사의 발전을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어 가는 견인차의 구실을 하게 되었으면 합니다. 비록 세상 사람들이 춤을 추지 않는 한이 있더라도 학자들은 진리의 피리를 정성껏 불어야 할 것입니다. 이 학술모임이 그 같은 아름다운 피리소리가 울려 퍼지는 자리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간절합니다.

 

2002년 10월 10일

 

"유언 남기듯 칼날같은 삶 후학들에게 권고"

이기백 교수님의 지난해 한국학 심포지움 강연을 듣고

 

서강옛집의 편집자로부터 이기백 선생님의 근황을 써달라는 청탁을 받고 무척 망설였습니다. 평생을 한국사 연구에 남달리 헌신하셨으며, 제자들을 끔찍이도 사랑하신 선생님의 근황을 알려는 동문들의 심정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이제 인생의 마지막 단계에 도달하신 선생님의 깊은 생각을 헤아릴 길이 없는 저는 그런 글의 적격자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선생님께서 당신의 한평생을 담은 묘비명을 남기신 글을 제가 지니고 있기에, 이것이야 말로 삶과 죽음의 경계선상에서 선생님이 생각하시는 바가 무엇인 지를 극명하게 나타내신 것이라 생각되었습니다. 

 

꼭 일 년 전인 2002년 10월 중순 경 서강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가 주최하는 국제한국학 심포지움에 참석하셔서 선생님은 이 글을 읽어 주셨습니다. 당신의 유언을 남기듯 평생에 걸친 선생님의 삶의 도정을 압축하여 묘비문을 남기시고, 다시 이런 길을 찾아 헤맨 선생님의 칼날 같은 삶을 국내외의 후학들도 따를 것을 강력하게 권고하셨습니다. 당시 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 모두는 숨을 죽이고 선생님의 말씀 하나하나를 새겨들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수많은 제자들의 바람대로 앞으로도 오랜 동안 건강한 삶을 누리실 것이라 확신하지만, 아마도 이런 말씀 듣기는 쉽지 않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작년의 그 학술모임에서 읽으신 원고를 제게 주셨는데, 이것을 선생님을 기억하려는 모든 제자들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수 십 년 전의 선생님의 모습을 기억하는 모든 사람들은 팔십 평생을 한시도 멈추지 않고 용맹정진하신 선생님의 모습에 숙연해 질 것이라 생각합니다.

 

정두희(66 사학) 모교 사학과 교수

 

"주위선 鶴같은 분... 제자들에겐 공포의 대상"

이기백 선생님과 나의 대학원 시절

 

이기백 선생님께서 한림대학을 그만두시기 직전인 몇 해 전, 나의 동기 몇 사람은 선생님과 함께 점심식사를 할 기회를 가졌다. 그 자리에서 선생님은 "한림대학 학생들은 다들 나를 인자한 할아버지라고 하는데, 임자들은(선생님은 우리들을 늘 그렇게 부르신다) 왜 그렇게 어려워하는지 모르겠어"라고 하셨다. 제자들도 나이를 먹어 친구처럼 허물없이 지내고 싶은데, 자꾸 어려워만 하니까 섭섭하시다는 말씀처럼 들렸다.

 

사실 선생님은 항상 온화한 미소를 띠고 계신다. 흥분하거나 막말을 하신 것을 한번도 본적이 없다. 남을 비하하는 말씀을 하신 적은 더구나 없다. 따라서 굳이 한림대학생들의 표현을 빌리지 않더라도, 선생님이 인자한 할아버지라는 사실을 부인할 사람은 없다.

 

그런데 선생님으로부터 학문 지도를 받은 필자의 선배, 동기들로부터는 선생님이 인자하시다는 말을 한번도 들은 적이 없다. 다들 선생님 앞에서 기를 펴지 못하는 것을 보면, 선생님은 오히려 공포의 대상이었다고 해야 맞다. 이러한 현상은 대학의 교수들이 되고, 나이 50을 훨씬 넘긴 오늘에 이르기까지 거의 변함이 없다.

 

내가 박사과정에 들어가 처음 제출한 레포트 제목은 '昔脫解'였다. 선생님의 지도로 석사학위를 받은 후였고, 또 그 레포트를 쓰면서 선, 후배들의 도움을 많이 받았으므로 비교적 자신이 있었다. 그런데 나를 연구실로 부르신 선생님께서는 "석사 논문은 어찌해서 운이 좋아서 쓴 것 같고, 이제 임자의 능력을 알았으니 학교를 그만 두는 것이 좋을 듯하다"고 하셨다. 당시 한국사를 전공하는 대학원생들은 서로를 '基白敎 신도'라고 부르거나, 선생님의 누상동 댁을 방문하면서 '聖地巡禮' 간다는 표현을 쓰기도 했다. 그러한 분으로부터 능력이 없으니 학교를 그만 두라는 말을 들은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고 그저 고개만 숙이고 있었다.

 

당시의 광경을, 우편물을 전하기 위해 선생님의 연구실에 들어온 尹煕勉 현 전남대 교수가 목격했다. 그는 후일 "두 사람의 관계가 마치 고문하는 사람과 고문당하는 사람 사이 같더라"고 전했다. 그날 나는 퇴계로에 있는 대한극장에 가서 혼자 영화를 봤는데, 내용은 물론 제목도 기억하지 못했다. 그러한 고문을 어찌 나 혼자만 당했겠는가.

 

서강대학의 출신이 아닌 분들로부터 '이기백 선생은 鶴같은 분'이라거나 '이기백 선생이야말로 이 시대의 師表다'는 말을 나는 가끔 듣는다. '君子'라는 표현을 쓰신 분도 계셨다. 선생님의 인품에 대해 잘 알지 못할 그 분들이 무엇을 근거로 그런 말씀을 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제자인 내가 듣기 좋으라고 한 소리가 아닌가도 생각된다.

 

그런데 크게 틀린 말은 아닌 것 같다. 최근 나는 선생님과 다른 학문적 견해를 발표하였다. 당연히 그래야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선생님께 죄송하다는 마음이 생겼다. 그래서 그러한 점을 편지로 말씀드렸더니 "학문의 발전을 위해서 바람직하다"는 회답을 주셨다. 자신과 학문적 견해를 달리한 제자를 배척하기는 커녕 격려하신 것이다. 쉽지 않은 일일 것이다.

 

나는 공부하는 데 필요한 자질이 부족하다. 이는 나와 함께 학교를 다닌 친구들이 모두 인정하는 바이다. 그러나 내가 선생님의 영향을 받아 공부하는 것을 직업으로 삼고, 대학교수가 되어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이는 선생이 학생을 얼마나 크게 변화시킬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구체적인 예가 될 것이다. 

 

이렇게 된 데에는 물론 선생님이 잘 이끌어주신 때문이기도 하지만, 내가 선생님을 존경하고 모방하려고 노력했기에 가능한 일이기도 하였다. 따라서 나는, 학생은 선생을 존경해야 공부를 잘 할 수 있다는, 확실한 믿음을 가지고 있다.

 

김당택(70 사학) 전남대 역사교욱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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